MBC 드라마 <닥터 진>은 차남 이명복(훗날의 고종)을 임금으로 만들기 위한 흥선군 이하응(이범수 분)의 피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속의 이하응이 아들에게 중국 역사서인 <자치통감>을 읽도록 권한 것도 그런 의도 때문이다.
사대부로 표현되는 조선시대 기득권층은 '왕은 역사서가 아닌 유교 경전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에서는, 사대부의 조언에 따라 사대부의 이익을 구현하는 임금을 이상적인 군주로 설정했다.
역사서를 열심히 읽고 역사발전이나 정치투쟁의 법칙을 훤히 꿰뚫는 임금은 자신들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사대부들의 염려였다. 그래서 역사서를 열심히 탐독하는 왕은 관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명복에게 <자치통감>을 권한 드라마 속 이하응이 주변의 이목을 끈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닥터 진>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극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는 이하응의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의 이하응도 어느 정도는 그러했다. 하지만, 실제의 이하응은 아들보다는 자신의 권력에 훨씬 더 신경 쓰는 인물이었다.
이 점은, 아들의 친정(직접 통치) 선포로 인해 섭정 자격을 잃은 뒤에 이하응이 취한 행보에서 잘 드러난다. 자신보다 아들의 권력을 더 중시했다면, 그는 권력을 되찾으려 하기보다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쪽에 좀더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그는 후자보다는 전자를 선택했다.
섭정 자격을 잃은 지 9년째인 1882년에 구식군인들의 반란인 임오군란이 벌어지자 고종을 무력화시키고 일시적으로 권력을 회복한 사건, 1886년에 고종 이명복이 러시아와 비밀동맹을 체결한 혐의가 제기되자 청나라와 결탁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허수아비인 이준용(장남 이재면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한 사건, 1894년에 일본과 결탁하여 고종의 권력을 일시적으로 빼앗은 사건 등은 이하응이 아들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하응이 아들을 왕으로 만든 진짜 이유
이하응이 아들을 왕으로 만든 것은, 아니 아들을 왕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위계승순위에서 아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 했을 것이다.
아들을 두지 못한 철종이 사망했을 당시, 철종에게는 7촌 조카들이 있었다. 흥선군의 아들과 조카들이 이에 해당했다. 흥선군은 철종의 6촌 형제였기 때문에, 철종의 7촌 조카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선왕의 후계자는 선왕보다 아래 항렬에서 뽑는 게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흥선군이 아들을 왕으로 민 것은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하응은 섭정 자격으로 통치권을 행사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섭정 자격을 잃은 뒤에도 그의 권력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섭정을 하는 동안에 권력 기반을 좀더 공고히 했다면, 아들이 친정을 선포한 뒤에도 그는 막후 실력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이하응이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됐거나 혹은 계속해서 막후 실력자로 남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경우에는 조선이 적어도 12년의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12년의 시간을 번 결과로 조선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을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시간을 벌었을 것이라는 점만큼은 확신할 수 있다.
조선이 결정적으로 약해진 시기는 1882~1894년이다. 이 12년간 조선은 청나라의 극심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이 내정간섭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공전(空前)의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청나라 외교관인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주도한 내정간섭으로 인해 조선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이 12년간, 조선의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일개 외교관에 불과한 원세개가 조선의 정치·외교·군사를 좌지우지했을 정도다. 경제도 마찬가지였다. 1882년 이후 영국제 면직물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면서 조선의 산업기반은 크게 약해졌다. 그것이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
또 그 12년간, 일본 해군력이 조선은 물론 청나라까지 추월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18세기 후반부터 일본이 조선을 경제적으로 추월한 것은 사실이지만, 18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국력은 그리 막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1886년부터 해군력을 집중 증강한 탓에,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청나라 해군을 격파하고 아시아 최강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이 해군력 증강을 추진하는 동안에 조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일본의 성장을 그냥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청나라의 내정간섭으로 인해 조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12년간 조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외국 기업이나 상인들이 조선에서 좀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도록 이것저것 개방하는 것뿐이었다. 그 12년간 일본은 청나라를 능가하고 그런 여세를 몰아 조선까지 삼켜버렸으니, 그 12년을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쇠약, 강화도 조약 때부터?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조선이 약해진 것은 1882년부터가 아니라 1876년 강화도 조약(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 때부터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일본이 강화도 사건을 일으키고 조선과 국교를 체결한 시점부터 조선이 약해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강화도 조약은 부당한 내용을 담고 있는 조약이지만, 당시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조약 체결이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 그로부터 7년 전인 1869년부터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조선 주상과 일본 쇼군(군사정권 수장)은 공동 속국이자 중재자인 대마도를 매개로 양국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쇼군 대신 천황이 외교무대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대마도가 일본에 편입되고 중재자가 사라짐에 따라, 일본 천황이 조선 주상을 직접 상대해야 하는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1869년에 양국관계가 단절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 입장에서는, 천황이 일본을 대표하는 것이나 중재자 대마도가 사라지는 것이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이렇게 7년간 국교가 단절됐기 때문에, 조·일 양국은 어떻게든 국교를 재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양국을 매개하는 상인들의 이해관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약 체결과정에서 고종 이명복이 지나치게 많은 것을 내준 탓에 오늘날까지도 강화도조약이 두고두고 비판을 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이 일본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일본이 조선을 장악한 것은 1894년 이후였다. 그러므로 구한말의 위기는 1876년부터 일본에 의해서가 아니라, 1882년부터 청나라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은 1882년 이후의 '잃어버린 12년'을 피할 수 없었을까? 그것은 부득이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 12년이 시작된 결정적 계기는 고종 이명복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 시절의 이하응이 미국·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로 서양열강은 조선과의 관계를 조심스러워했다. 조선은 서양열강의 대포 앞에서 힘없이 무너진 청나라·일본과는 다른 나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복이 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이하응의 대외전략은 '외세가 안방을 차지하는 것을 막자'였던 데 비해, 아들 이명복의 전략은 '외세를 안방으로 끌어들여 상호 경쟁을 유발하고 그들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보다 훨씬 대담했던 것이다.
비록 의도는 좋았지만, 외세를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이명복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그는 청나라의 손을 빌려 서양열강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청나라에 외교관계까지 맡겼다. 1882~1894년에 조선이 서양과 체결한 조약은 거의 다 청나라의 손으로 체결한 것이었다. 청나라 외교관인 원세개가 세도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맥락 때문이다.
청나라의 중재로 서양열강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이명복은 서양 제품이 침투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었다. 청나라·일본은 서양열강에 패배한 상태에서 조약을 체결했지만, 조선은 그들에게 승리한 상태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그런데도 이명복은 불리한 조건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양열강을 상대했던 것이다.
그는 임오군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까지 끌어들였다. 군란이 진압되면 청나라 군대가 떠나가리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내정간섭 군대로 돌변한 청나라 군대는 그냥 눌러앉았고, 이것이 1882~1894년 내정간섭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서울 용산에 지금까지도 외국 군대가 버젓이 주둔하고 있으니, 이명복이 얼마나 많은 '업적'을 남겼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종, 외세에 발 꽁꽁 묶이는 신세 자초
이렇게 그 12년간 조선이 당한 시련은 다분히 조선이 자초한 것이었다. 이명복이 그렇게 쉽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면, 외세는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린 뒤에야 조선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복은 별다른 반대급부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쉽게 내주었다. 이하응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로 조선을 두려워했던 미국·프랑스 사람들은 이게 웬 떡인가 했을 것이다.
이명복이 외세를 이용할 목적으로 외세를 잔뜩 끌어들인 탓에, 청나라·일본은 물론이고 서양열강도 조선 무대에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손 안 대고 코 푼다'는 속담은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것이다.
이명복은 외세를 이용해 조선을 발전시키려 했지만, 그것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리어 조선은 외세에 발이 꽁꽁 묶이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일본은 해군력을 팽창했고 한·일 간 격차를 훨씬 더 넓혀 놓았다.
그러므로 이명복과 정반대의 패러다임을 가진 이하응 같은 인물이 통치했다면, 외세가 조선을 뚫는 일은 그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 사이에 조선은 면역력을 키워 경쟁력을 갖춘 상태에서 시장을 개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리한 조건으로 개방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불리한 조건으로 시장을 내준 이명복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이 망한 것은 이하응의 '시장 사수' 때문이 아니라 이명복의 '무분별한 개방'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하응이 왕이 됐거나 권력을 계속 유지함으로써 조선이 12년이란 시간을 벌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무의미하다고들 한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 하고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지적이다. 그렇게 가정해봤자 지난 역사가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므로,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그때 이렇게 했다면?'이라고 가정해 봐야만, 유사한 상황이 닥쳤을 때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지만, 우리는 역사의 가정을 통해 지난날을 반성하고 유사한 실수를 예방해야 한다. 외세가 무모한 시장개방을 요구하고 그런 무모함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한다면, 우리는 결코 제2의 이명복을 지도자로 내세워서는 안 된다. 이미 제2의 이명복을 지도자로 세우는 우를 범해 버렸다면, 제3의 이명복이라도 미리 막지 않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