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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리 소나무숲과 시비

 임한리 소나무숲
 임한리 소나무숲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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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중학교에서 임한리 숲으로 가려면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를 건너가야 한다. 길 주변으로는 코스모스를 심었는데, 6월임에도 불구하고 꽃이 피었다. 이들 코스모스 밭을 지나면 멋진 소나무 숲이 나온다. 소나무 굵기로 보아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들판 한가운데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더한 것 같다.

송림 입구에 시비가 세워져 있어 가보니 송당(松塘) 유홍(兪泓 : 1524-1594)의 시 두 편이 적혀 있다. 하나는 산해관(山海關) 주사 마유명(馬維明)에게 화답한 광국시(光國詩)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사마시 동기의 생신을 축하하는 시다. 이 중 광국시의 내용을 옮겨본다. 광국시란 명과 조선 양국이 오해를 풀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시를 말한다.

 임한리 송림의 시비
 임한리 송림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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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명이 구중궁궐에 퍼지고              黃麻宣九闕
밝은 해가 내 작은 정성을 비춘다.           白日照微誠
한나라 신풍시의 술이고                        漢市新豐酒
진나라 세류성의 병영이라.                    秦城細柳營
귀향길에 흥이 저절로 솟구치고              鄕程多逸興
아리따운 꾀꼬리 주옥같이 노래하는구나. 珠曲送嬌鸚
압록강 가에 봄기운이 가득하고              鴨渚春應好
봄꽃이 십리를 밝히는구나.                    煙花十里明

기계(杞溪)유씨인 유홍은 자가 지숙(止叔)이고 호가 송당(松塘)이다. 예조 판서를 지낸 유여림(兪汝霖)의 손자다. 1524년에 나서 154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5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조좌랑을 역임하고 1568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1587년에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 수도 북경에 갔다. 1590년 광국(光國) 평난 공신(平難功臣)에 녹훈되고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구불구불 소나무
 구불구불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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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을 지킬 것을 주청하고, 평안도로 피난할 때 왕자들을 보필했다. 1594년 좌의정에 이르렀고, 그해 12월 25일 해주에서 죽었다. 1595년 2월 고양에 장사지냈고, 1596년 충목(忠穆)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642년 손자인 유백증이 4권 2책의 목판본 문집 <송당집>을 간행하였다.

소나무 숲으로 들어가니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마치 용틀임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의 소나무 숲에는 식물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소나무가 빽빽하질 않아 빛이 땅바닥까지 들어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나무 줄기를 타고 넝쿨식물이 올라가기도 한다. 이곳 임한리 소나무숲은 안개가 끼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는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이곳을 찾는다.

삼가천과 속리초등학교

 삼가천에 놓인 다리를 지나 장안면으로 들어가는 대원들
 삼가천에 놓인 다리를 지나 장안면으로 들어가는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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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한리 송림을 나온 우리는 숲 옆으로 조성된 해바라기 밭을 바라본다. 해바라기 꽃이 몇 송이만 피어서 아직은 노란 꽃의 절규를 볼 수가 없다. 해바라기 꽃이 피면 소나무 숲과 멋진 대조를 이룰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논둑 밭둑 걸어서 삼가천 쪽으로 간다. 제방에 이르러서는 상류를 향해 계속 걸어간다. 우리의 1차적인 목적지는 장안면 개안리에 있는 선병국 가옥이다.

삼가천은 속리산면 대목리 천왕봉 아래에서 발원, 장안면을 지나 탄부면 구암리에서 보청천에 합류된다. 그러므로 장안면에서부터 탄부면과 마로면에 이르는 너른 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그리고 천왕봉과 구병산 사이, 삼가리에서 서원리에 이르는 골짜기가 특히 아름답다. 삼가천 위로는 청원-상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우리는 이 고속도로 밑으로 해서 장안면 봉비리로 간다.

 봉비리 입구
 봉비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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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비(鳳飛)라는 이름은 봉황새가 날아갔다는 뜻으로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봉래리라고 지어야 할 텐데. 그래야 봉황이 날아들고 복이 올 텐데 말이다. 우리는 봉비리에 있는 봉비교를 건너지 않고 삼가천을 따라 장내리 쪽으로 간다. 제방을 따라 길이 나 있으나 조금은 단조롭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군부대가 보이고, 선병국 고가가 숲 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우리는 속리초등학교 앞 슈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곳에서는 삼가천 건너 선병국 가옥도 잘 보이고, 바로 옆의 속리초등학교도 잘 보인다. 선병국 가옥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 위에서는 꾀꼬리 한 쌍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우리는 꾀꼬리가 아름다운 소리만 내는지 알지만 그렇지 않다. 상당히 영리한 새여서 그런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를 낸다.

 속리초등학교의 아이들
 속리초등학교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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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속리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오후 3시 20분쯤 되었는데, 운동장에서 방과 후 체육활동이 한창이다. 선생님들도 함께 있다. 속리초등학교는 1930년 속리산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 1947년 속리면이 내속리면과 외속리면으로 나눠지고, 2007년 외속리면이 장안면으로 개칭되는 과정에서도 학교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히려 현재 속리산면에 있는 초등학교의 이름은 수정초등학교다.

장을 팔아 먹고사는 건가?

우리는 하개교를 건너 선병국 가옥으로 간다. 선병국 가옥이 있는 마을 이름이 전에는 하개리였으나, 2007년 개안리로 바뀌었다. 그래서 하개라는 다리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다. 개안리는 현재 선병국 가옥으로 유명하다. 비결서에 의하면 이곳 개안리는 10승지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구한말 신정훈 선생이 전라도 고흥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99칸 집을 지었다.

 선병국 가옥 배치 평면도
 선병국 가옥 배치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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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병국가옥은 삼가천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섬 안에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배가 물을 타고 내려가는 형상이다. 그래서 그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땅의 이름을 선창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선병국 가옥은 먼저 북쪽에 있는 후문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후문에서 담장을 따라 서쪽으로 간 다음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관람방법이다.

정문으로 가다 보면 담장 밖 오른 쪽으로 '아당골 장체험장'이 나온다. 이 건물 앞에는 수많은 장독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다. 장독이 8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곳에는 된장, 고추장, 간장이 담겨져 있다. 장을 만들고 장독대를 관리하는 사람은 보성선씨 21대 종부인 김정옥씨다. 집밖에 말고 집안에도 장독대가 있는데, 이곳에는 350년 된 선씨 집안의 씨간장이 있다.

 집안 장독대
 집안 장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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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간장이 선씨 집안 음식맛의 기본이 된다. 좋은 장은 좋은 재료와 좋은 물 그리고 적당한 세기의 불이 결합해서 만들어진다. 좋은 콩을 구입, 깨끗한 물에 씻고, 센 불에 익히는 과정을 거쳐 메주를 만들어낸다. 이 메주를 좋은 공기 속에 말리면서 발효를 시킨다. 그리고 잘 발효된 메주를 사용, 매년 음력 2월 장을 담근다.

이러한 장을 이용해 만드는 대표음식이 된장찌개와 너비아니다. 된장찌개가 된장을 이용한 보편적인 음식이라면, 너비아니는 간장을 이용한 쇠고기 구이다. 너비아니는 쇠고기를 납작하게 썰고 잔칼질을 해 육질을 부드럽게 한 다음 간장양념을 넣고 굽는 특별한 요리다. 100년이 넘는 고택에서 350년 내려온 장을 가지고 만드는 정성스런 음식은 한마디로 명품이 아닐 수 없다.

 선병국 가옥 사랑채
 선병국 가옥 사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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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병국 가옥은 장을 판매하고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관리비의 일부를 보탠다고 한다. 김정옥씨는 종부로서의 역할 외에도 종갓집 음식비법을 소개하는 강의에도 참여하고 사회활동도 한다. 그리고 사랑채의 안주인인 홍영희씨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들 보성선씨 며느리들은 안과 밖에서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보성선씨 고택 이야기

우리는 고택에 들어가기 전 바깥마당에 있는 비석과 정려를 살펴본다. 석비와 철비가 있는데, 송덕비, 기적비, 시혜비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전 비서경 선공영홍 시혜비(施惠碑)'다. 비서를 지낸 선영홍공이 농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세운 비다. 선영홍공은 선정훈공의 아버지로 1920년 전후 고흥군 두원면, 점암면, 남양면, 남면의 소작농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1922년 고흥군 두원면에 세워졌다가, 도로 확포장으로 2004년 이곳 보은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다.

 효열각
 효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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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비 옆에는 선영홍공의 아버지인 선처흠공과 그의 부인 경주김씨의 효열각이 있다. 동몽교관을 지낸 선처흠공은 효자고, 그의 부인 경주김씨는 열녀라는 것이다. 고종 29년인 1892년 정려를 내렸다. 이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정문을 통해 사랑채로 들어간다. 사랑채에는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뒤로 3단의 기단 위에 H자형 집이 자리 잡고 있다. 마당 왼쪽으로는 멋진 소나무가 있다.

사랑채 문 위로는 '선을 행함이 최고의 즐거움(爲善最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주희의 말이라고 적혀 있는데, 자료를 찾아보니 후한 광무제의 아들 유창(劉蒼)의 말이라고도 한다. 문을 열고 안쪽을 들여다보니 마루가 깔린 대청이다. 이곳에는 다기와 평상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현재 전통다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랑채를 오른쪽으로 돌아 문을 나가면 사당이 있다.

 선병국 가옥 안채
 선병국 가옥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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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당을 지나 오른쪽으로 가면 안채가 나타난다. 안채는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고, 집 바로 앞에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했다. 건물 주위에 가재도구가 더 많다. 살림집임을 알 수 있다. 안채를 나오면 오른쪽으로 수많은 장독대를 또 다시 만나게 된다. 이처럼 장독대는 집의 안팎에 있다. 장독대를 둘러보면서 후문 쪽으로 가다 보니 담장으로 옛날 울타리용으로 심은 탱자나무를 볼 수 있다.

집 뒤로는 구병산의 서쪽자락이 흘러가고 있다. 선병국 고가를 제대로 보려면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도 듣고, 장체험도 하고, 다도체험도 해보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학혁명 유적지를 찾아 보은읍 종곡리까지 10㎞는 더 가야 한다. 중간에 길상리에 있는 펀 파크(Fun Park)까지 보고 가야 하니 시간이 없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선병묵 고가와 선병우 고가 탐방도 생략하고 장내리 동학혁명 보은 취회(聚會)지로 간다. 취회란 집회(集會)의 다른 표현이다.


#임한리 송림#유홍의 광국시#삼가천#속리초등학교#선병국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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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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