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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에 있는 향천사에는 향천사사적기록(香泉寺事跡記錄, 1937년)이 전해 내려오는데 이 기록에는 백제 의각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향천사는 백제 의자왕 16년(656)에 의각선사가 창건하였다. 의자왕 12년 백제는 신라의 공격을 받아 많은 성을 빼앗겼다. 의각선사는 이 난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난파(難波, 고대에는 '나니와', 현재는 '난바')에 있는 백제사에서 불법의 전파와 구국 일념에 힘썼다. 이때 선사는 반야심경을 말씀하는데 서광이 입과 눈으로 나와 벽을 뚫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백제의 의각스님이 주석했던 절 난바의 백제사를 찾은 것은 2012년 7월 14일 한낮이었다. 수은주가 36도를 오르내리는 가운데 찾은 오사카 텐노지 도오가시바에  있는 절은 '백제사'가 아니라 '관음사'로 바뀌어 있었다.

백제사(현,관음사) 산문(山門) 안쪽으로는 신사의 도리이(鳥居)가 보이는데 이러한 신불습합(神佛習合)형태의 절은 아주 특이한 형태로 일본 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 백제사 산문 백제사(현,관음사) 산문(山門) 안쪽으로는 신사의 도리이(鳥居)가 보이는데 이러한 신불습합(神佛習合)형태의 절은 아주 특이한 형태로 일본 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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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아담한 크기였는데 특이한 것은 이 작은 절 안에 신사(神社)도 함께 있어서 명치이전의 신불습합(神佛習合)형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점이다. 산문(山門)을 지나면 바로 신사의 도리이(鳥居, 신사입구에 세워두어 신성한 공간임을 알리는 표시로 일종의 홍살문 같은 역할)가 나타난다.

이렇게 신사와 절이 함께 경내에 나란히 남아 있는 예는 흔치 않다. 일본은 명치정부 때 신불분리(神佛分離)정책을 폈는데 신사를 보존하고 불교를 폐지시키는 이른바 폐불훼석(廃仏毀釈)을 단행하여 수많은 고찰들이 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용케도 백제사터에는 관음사의 간판을 걸고 지금껏 한 경내에 신사와 불교가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

2층 건물 중 위에는 도요가와이나리신사이고 아래는 관음사 법당으로 쓰고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왼쪽) 이곳은 절보다도 신사쪽이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 종무소 여직원은 관음사 안내문은 없다면서 이나리신사 안내장만 주었다. 건네준 안내장 사진은 도요가와이나리신사의 총본산 사진이다.
▲ 신사와 절 2층 건물 중 위에는 도요가와이나리신사이고 아래는 관음사 법당으로 쓰고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왼쪽) 이곳은 절보다도 신사쪽이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 종무소 여직원은 관음사 안내문은 없다면서 이나리신사 안내장만 주었다. 건네준 안내장 사진은 도요가와이나리신사의 총본산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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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만든 도리이를 지나자마자 왼쪽에는 우물터가 보이는데 바로 그 앞에 초등학생 키 높이만 한 오사카시에서 세운 백제사터 표지석이 서 있다. 평성 9년(1998) 3월 오사카시라고 쓰인 표지석 앞면에는 "이 주변에는 나라시대(奈良時代) 전기 이후의 기와가 다수 발견되어 절터로 추정된다. 일찍이 도단죠(土壇状, 흙담장) 유구(遺構)도 남아 있었다. 난파대별왕사(難波大別王寺, 나니와오오와케노오오키미데라)와 섭진백제사(摂津百濟寺, 셋츠구다라지) 터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堂ヶ芝廢寺(도오가시바폐사)”라고 쓰였는데 이는 도오가시바 땅에 있던 폐사라는 뜻이다. 표지석 옆면에는 이곳이 백제사터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각종 문헌에서 백제사가 있었다는 증거가 많기에 추즉이 아니라 ‘백제사터’라고 분명해해야만 한다.
▲ 백제사터 표지석 “堂ヶ芝廢寺(도오가시바폐사)”라고 쓰였는데 이는 도오가시바 땅에 있던 폐사라는 뜻이다. 표지석 옆면에는 이곳이 백제사터로 추정된다고 쓰여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각종 문헌에서 백제사가 있었다는 증거가 많기에 추즉이 아니라 ‘백제사터’라고 분명해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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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도오가시바(堂ヶ芝) 일대에는 백제군(百濟郡)이 있을 정도로 백제인이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표지판에 중국인과 조선인이 살았다는 말은 맞지 않다. 중국인이 살았다는 문헌도 없는 데 역사기록마다 “중국과 조선” 운운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 기술이 아니다.
▲ 백제사 안내판 이곳 도오가시바(堂ヶ芝) 일대에는 백제군(百濟郡)이 있을 정도로 백제인이 밀집해 살았다. 따라서 표지판에 중국인과 조선인이 살았다는 말은 맞지 않다. 중국인이 살았다는 문헌도 없는 데 역사기록마다 “중국과 조선” 운운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 기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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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비석과는 달리 게시판 모양의 안내문도 하나 서 있었는데 여기에는 오사카시교육위원회(大阪市教育委員会)가 다음과 같이 써 놓고 있다.

오사카는 고대의 동아시아 제국의 외교 창구 였으며 외래문화를 최초로 수용한 첨단지역이었다. 나니와츠(難波津) 주변에는 중국과 조선반도에서 도래한 많은 사람들이 거주 하고 있었다. 이 백제사터와 사천왕사는 매우 가까운데 이 일대에 일본 최고(最古)의 절들이 세워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위의 설명에서 "오사카 일대에 중국과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집단 거주했다" 중에 "중국"이란 말은 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오사카, 아스카, 나라 일대에는 한반도 도래인들이 집단 거주한 기록은 있으나 중국인이 집단으로 거주했다는 기록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오사카 백제사(百濟寺)에 관한 기록을 교토대학 우에하라(上原真人) 교수의 <백제왕씨의 절(百済王氏の寺)>을 참고로 보면 "서기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에서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禅広, 禅光, 善光)이 건너 왔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에게 나니와(難波)에 거주지를 주고 상급관리로 채용했으며 지통왕(持統天皇)은 선광에게 백제왕(百済王, 구다라노고니키시)이라는 성(姓)을 하사했다. 또한 백제에서 건너온 집단 이주자들을 위해 백제군(百濟郡)을 두었으며 749년 경복(敬福)왕 때에는 가와치(河内国 交野郡 中宮)로 새 터전을 마련해주고 도래인에게는 최고 지위인 종삼위(従三位)벼슬을 주어 가와치군수(河内守)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오사카에는 두 군데의 백제사가 존재했는데 초기에 지은 것이 도오가시바(堂ヶ芝)의 백제사이고 나중에 지은 것인 히라가타시(枚方市)의 백제사라고 보면 된다.

오사카에 있던 두 개의 백제사의 현재
▲ 오사카 두 백제사 오사카에 있던 두 개의 백제사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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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터만 남은 히라가타시의 ‘백제사터’로 현재는 오사카시의 특별사적지로 관리되고 있으며 이곳 가까이에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박사 무덤이 있다. 이 지역 역시 백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 백제사터 지금은 절터만 남은 히라가타시의 ‘백제사터’로 현재는 오사카시의 특별사적지로 관리되고 있으며 이곳 가까이에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해준 왕인박사 무덤이 있다. 이 지역 역시 백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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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다시 초기의 백제사로 돌려보자. 백제스님 의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는 문헌은 9세기에 쓰인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설화집 <일본영이기>(원제목은 '日本現報善悪霊異記')이다. 이 책 '상권 14'에는 의각스님에 관한 진기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는데 매우 기이하다.

의각스님은 원래 백제국 스님으로 사이메이왕(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 때에 일본에 건너와서 나니와쿄(難波京)의 백제사에 살았다. 의각법사는 키가 7척(210미터)으로 불교에 널리 통달했으며 항상 반야심경을 외웠다. 그때에 혜의(慧義)라 불리는 스님이 있었는데  한밤중에 나와 경내를 어슬렁거리다가 흘깃 의각스님 방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방에서 신기한 광채가 새어나왔다. 혜의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방문을 손가락으로 뚫고 들여다보았다. 법사가 단정히 앉아서 경을 독송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광채가 입에서 나고 있었다.

혜의스님은 놀라서 다음날 아침 절 안의 승려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의각법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젯밤 반야심경을 백번 외웠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떠보니 방안의 사방 벽이 모두 툭 터져 집 밖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너무 이상하여 절 밖으로 나갔다가 정원에 들어서서 보니 좀 전에 툭터져 보였던 방의 벽이 원래상태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원에서 반야심경을 외우니 또 전과 같이 방의 벽들이 훤히 터져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필시 반야심경의 영험인 것이다. 

참으로 흥미로운 기록이다. 백제스님 의각이 보통 인물이 아닌 존재로 그려져 있는데 2미터가 넘는 키도 그렇거니와 입에서 광채가 나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특히 오사카의 나니와(難波, 현재는 난바라고 부름)의 백제사에 주석했다는 기록과 충남 예산의 향천사 기록이 일치한다.

의각스님이 나니와의  백제사에 주석하고 있을 무렵 일본 조정은 사이메이여왕(제37대 齊明天皇, 재위 655- 661)이 즉위하고 있었다. 사이메이왕은 재위 5년째인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자 일본 조정에 와 있던 백제왕 풍장(豊璋)을 백제 구원을 위해 본국으로 보내고 사이메이왕 자신이 직접 나니와(難波)에 진지를 구축하여 무기와 선박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여왕 나이 67살이었다. 고령의 여왕이 백제부흥을 위해 직접 오사카에서 후쿠오카까지 달려간 것은 아무래도 일본조정이 백제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가 얼마나 미웠으면 여왕이 손수 군대를 지휘하여 신라원정을 하려했겠는가. 그러나 여왕은 이미 늙어버려 이듬해인 68살(661년)로 군대 출정식도 못한 채 현지(후쿠오카)에서 죽고 만다.

백제 의각스님이 나니와의 백제사에서 얼마 동안을 머물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설화의 기록으로는 사이메이왕 때라고 했으니 사이메이왕의 재위 기간인 655년에서 661년까지로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남 예산의 향천사 기록에는 656년에 향천사를 지었다고 했으니 일본으로 건너온 것은 향천사를 창건한 해이거나 이후로 추정된다.

사이메이 여왕이 백제 부흥을 위해 뛰고 있던 시각에 의각스님은 백제사에 주석하면서 신통력을 지닌 스님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천리안을 지닌 스님으로서 꺼져가는 조국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조정의 움직임을 인지하고 그 어떠한 행동을 했을 것 같은데 일본 내에서의 의각스님을 다룬 활약상은 현재 <일본영이기> 외에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본영이기>에서 의각스님이 매우 신통한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을 두고 다무라엔쵸(田村圓澄) 박사는 "방에서도 밖의 일을 훤히 꿰뚫었다는 것은 산림수행승만이 가능한 일로 당시 법기산사(法器山寺)에 있던 백제승려 다라상(多羅常)이 산속에서 수련을 거듭한 끝에 영험을 터득한 스님이 된 것처럼 의각스님 또한 일본 불교가 산림수행불교로 거듭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한일고대불교관계사)

여기서 기왕에 백제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일본 내에 산재한 백제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존하는 백제사는 시가현(滋賀県)에 있는 백제사(일본 발음은 햐쿠사이지)로 이곳은 16세기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지상의 천국'으로 극찬할 만큼 단풍으로 유명하여 일명 백채사(百彩寺)라고 불리는 곳이다.
             
시가현의 호동3산 백제사는 지금도 고색창연하다.
▲ 시가현 백제사 시가현의 호동3산 백제사는 지금도 고색창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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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곳은 나라시(奈良市)의 백제대사(百済大寺)를 들 수 있는데 현재는 대안사(大安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은 성덕태자가 세운 남도7대사 '흥복사(興福寺), 동대사(東大寺), 서대사(西大寺), 원흥사(元興寺), 약사사(薬師寺), 대안사(大安寺), 법륭사(法隆寺)'의 하나로 일본불교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던 절이다.

예전 백제사가 있던 터에는 관음사로 바뀌어 있었으며 경내는 도요가와신사의 상징물인 여우상도 공존하고 있다.
▲ 관음사 전경 예전 백제사가 있던 터에는 관음사로 바뀌어 있었으며 경내는 도요가와신사의 상징물인 여우상도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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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곳은 오사카시의 히라가타(枚方市)에 있던 백제사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이곳은 원래 신라 감은사의 가람배치와 유사한 형태의 절로 창건당시에는 대규모였으며 지금은 오사카에서 유일한 특별지정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역사적인 곳이다. 대략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사카, 나라, 시가현의 백제사들
▲ 백제사들 오사카, 나라, 시가현의 백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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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오사카 도오가시바에 있던 백제사는 지금은 폐사되어 전혀 생소한 이름의 관음사가 자리하고 있지만 1300여 년 전에는 수많은 백제인들이 드나들던 커다란 규모의 절이었다. 이 절에서 신통력을 바탕으로 민중교화에 앞장섰던 백제출신 의각스님이 주석했던 것이다.

뜨거운 폭염 아래에 찾아간 절은  그 크던 가람을 잃은 채 일본의 신사(神社)와 뒤섞인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사람도 옛사람이 아니고 절도 옛모습이 아니라 쓸쓸한데 어디선가 매미 소리만 구성지다. 모두에게 잊힌듯하지만 절 터에서는 백제시대의 파편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 또한 옛문헌에는 뚜렷하게 백제 의각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지니 백제 후손 중 어느 한 사람쯤 이 곳을 찾아 의각스님을 그려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의각스님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주소: 大阪市 天王寺 堂ヶ芝町 (현, 관음사로 바뀌어 있음)
가는 길: JR 오사카칸죠센 (JR大阪環状線)을 타고 모모다니에키(桃谷駅)에서 내리면 5분 거리에 있다.
* <대자보>에도 보냄



태그:#백제사, #의각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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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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