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7월 30일 오후 1시. 출판사를 운영하는 홍영태 비즈니스 북스 대표가 서울 와룡동 소재 문화체육관광부(문화부) 정문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책이 아닌 피켓이 들려 있다. 피켓에는 단 한 줄의 요구가 적혀 있었다.

'이재호는 물러나라.'

1인 시위를 시작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비가 쏟아졌다. 때마침 홍영태 대표도 1인 시위를 마쳤다. 오랜 가뭄을 겪은 출판계는 단비를 기다렸다. 출판계가 기다린 것은 '제대로 된 출판진흥원장의 임명'이라는 비였다.

문화부, 고려대-<동아일보> 출신 인사 출판진흥원장에 임명

 7월 25일 출판계 관계자 300여 명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구 앞 광장에서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낙하산 인사 규탄 및 출판문화 살리기 실천대회'를 열었다.
7월 25일 출판계 관계자 300여 명이 서울 광화문 교보문구 앞 광장에서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낙하산 인사 규탄 및 출판문화 살리기 실천대회'를 열었다. ⓒ 한국출판인회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가 아닌데도 출판인들이 거리로 나왔다. 지난 7월 25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 광장에 출판업계 관계자 300여 명이 모여 규탄대회를 열었다. 다음날(26일)부터는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출판인들이 이렇게 거리로 나온 이유는 따로 있다. 초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출판진흥원) 원장 임명 때문이었다.

지난 7월 18일 문화부는 이재호 <동아일보> 출판편집인을 출판진흥원 초대 원장(임기 3년)으로 임명했다. 출판인들의 오랜 바람이었던 출판진흥원은 지난 7월 27일 공식 출범했다. 그러나 출판계가 이재호 원장의 임명 철회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홍영태 대표는 "출판계는 그동안 오랫동안 지속돼 온 정부의 홀대를 참아왔는데, 이번 낙하산 인사가 도화선이 돼 분노가 폭발했다"며 "출판계가 14년간 노력해 겨우 출판진흥원을 만들어놨더니 정부는 자격도 없는 낙하산 인사를 데려왔다"고 허탈해했다.

출판진흥원은 출판업계의 숙원사업이었다. 출판계는 진흥원이 출범하면 출판계의 해묵은 현안을 해결하고, 출판 산업 발전을 이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진흥원이 출판문화 발전의 초석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은 깨졌다. 문화부가 출판 활동 경력이 미비한 이재호(58) 전 <동아일보> 출판편집인을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출판산업을 가장 잘 아는 인사가 뽑혀야 하는 자리에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인사'를 앉혔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가뭄' 겪던 출판계, '낙하산 인사'를 바라진 않았다

이재호 신임 원장은 고려대를 졸업했고 <동아일보> 정치부장, 국제부장을 거쳐 2009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장과 출판편집인을 지냈다. 출판계는 이재호 신임 원장이 고려대·<동아일보> 기자 출신인 점을 들어 "정부가 출판 산업에 식견과 비전이 없는 특정학교, 보수언론 출신의 인물을 임명하는 낙하산 인사를 자행했다"고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문화부가 임명안을 발표한 날,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는 즉각 '출판문화살리기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하고 이 신임 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출판업계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출판산업 진흥책을 연구할 기구가 필요했다. 출판계는 지난 99년 출판진흥원 설립을 처음으로 제안한 뒤 13여 년 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하지만 정부는 예산 등을 이유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지난해 문화부 산하 특수법인으로 출판진흥원을 두기로 합의했다.

출판계는 출판산업의 발전을 위해 ▲ 도서정가제 확립 ▲ OECD 수준의 도서관 장서 구입예산 확보 ▲ 독서진흥기금조성 ▲ 학교 독서교육의 강화 ▲ 출판 유통의 현대화 등의 과제를 제시하고 이를 풀어나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진흥원 설립을 추진했다. 출판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연구기관이 필요했고, 진흥원이 그 역할을 하도록 하려는 게 출판업계의 애초 의도였다.

문제는 정부가 출판산업 진흥책을 연구해야 할 기관에 출판 산업 전문가를 마다하고 비전문가를 임명했다는 점이다. 출판계는 '이 신임 원장이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 인사인데다 출판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진흥원이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되기 어렵다'고 전망하고 있다.

문화부는 이 신임 원장이 <동아일보> 출판국에 3년 간 재직한 경험을 경력으로 들고 있다. 그러나 출판계 내부에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크다. 홍영태 대표는 "<동아일보> 출판국에 3년 간 있는 동안 책을 200권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신문사 출판국과 일반 출판사는 많이 다르다"며 "신문사 출판국장이 출판산업을 안다고 하면 소가 웃을 일"이라고 비판했다.

윤철호 (주)사회평론 대표는 "수습기자 3년 한다고 언론사를 이끌어 갈 수 있나"고 반문한 뒤 "출판산업을 이해하고 비전을 제시할 사람이 원장을 맡아야 하는 게 상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출판문화산업에 정부가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을 뿐만 아니라 출판계를 경시하고 있다는 것이 이번 인사문제에서 드러났다"고 지적했다.

출판계 "이재호 원장은 MB가 마지막으로 챙겨준 인사"

 출판계는 7월 26일 부터 서울 의룡동 문화체육관광부 정문에서 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출판계는 7월 26일 부터 서울 의룡동 문화체육관광부 정문에서 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 원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김혜란
출판계는 지난 5월 초대 원장 공모가 나자 대한출판문화협회와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출판사 대표 출신 후보를 각 1인씩 추천했다. 유관단체나 개인이 추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문화부는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5명의 원장 후보를 놓고 지난 6월 초 면접심사를 거쳤다.
그러나 출판인들은 인선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점을 지적한다. 문화부는 출판진흥원 출범이 열흘 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신임 원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출판계가 "왜 발표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문화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말만 전했다. 출판계는 이를 두고 출판계 내부의 반발을 우려해 원장 임명 발표를 최대한 늦췄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문화부는 "법에 정해진 공모과정대로 원장을 선임해 인사과정에는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출판업계 한 관계자는 "이 신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이 마지막으로 챙겨주고 갈 인물이라는 소문이 있었다"며 "정권이 바뀌면 이명박 낙하산 인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를 초대 원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나"고 말했다.

곽미순 한울림 대표는 "초대 원장은 출판계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 분이 선임돼야 하는데, 이재호씨는 지금까지 그런 활동을 하지도 않았던 분"이라며 "진흥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야 할 처지인데 뿌리부터가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문화연대도 지난 20일 논평을 내고 "이명박 정권초기에 유인촌 전 문화부 장관을 내세워 문화예술계와 방송계 단체장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물갈이 한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문화부 "대통령과 같은 대학 출신은 임명할 수 없나?"

 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원장
이재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신임원장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정태구 문화부 출판인쇄산업과 사무관은 "추천위원회에서 5명을 추천받았고, 그중에서 한 분을 선택해 장관이 임명했다"며 임명과정에서 문제가 없었음을 분명히 했다.
또 그는 "출판진흥원은 국고를 집행하는 기구인데 개인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람이 (임명되면) 공정하게 국고를 지원할 수 있겠는가?"라며 "초대 원장은 출판의 전문성보다는 안정적으로 정책화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이 신임원장을 임명했다"고 말했다.

정 사무관은 "물론 전문성이 중요하지만 안정적으로 인력을 확보하고 국회나 다른 행정부와 완만하게 교섭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신임 원장이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대학 출신은 전부 임명하지 말아야 하나?"라며 "수긍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출판계를 계속 설득해 출판진흥원을 이끌어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재호 신임 원장은 지난 7월 20일 임명장을 받고 지난 7월 27일부터 법적 효력을 얻은 뒤 출판진흥원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출판계는 출판계의 요구가 제대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이 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싸움을 계속해나갈 방침이다.

덧붙이는 글 | 김혜란 기자는 <오마이뉴스> 16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이재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