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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금요일

Wilmore, KY

사촌형은 애즈베리(Asbury) 신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기숙사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방 셋과 주방, 거실이 딸린 2층 주택이다. 유학중인 남편을 따라 부인과 자녀가 함께 사는 경우가 많아 주변이 가족 공동체로 북적거린다.

일반 가정집이라고 할 정도로 기숙사의 상태는 최고였다. 평화로운 전경
▲ 애즈베리 신학교 기숙사 일반 가정집이라고 할 정도로 기숙사의 상태는 최고였다. 평화로운 전경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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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이후 6년 만에 찾아온 사촌동생을 위해 형수님이 김치찌개를 끓여놓았다. 제일 먹고팠던 음식을 이렇게 센스있게 알아채다니. 체면 차리지 않고 단숨에 세 공기를 먹어 치웠다.

보금자리를 마련하자 색안경을 낀 것 마냥 세상이 달라 보인다. 살갗을 까맣게 태우며 땀으로 목욕시키던 앙칼진 햇볕은 이제 따사로운 일광욕이다. 핸들을 휘청거리게 만들던 개들은 귀여운 애완동물이며, 속도를 한없이 늦추던 바람은 산뜻한 선풍기다.

사촌형의 소개로 근처 한인들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애즈베리 신학대학(asbury seminary) 목회학(master of divinity) 석사과정을 밟으며 만난 사람들이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신학적 토대를 함께 쌓아가는 동지들. 어린 자녀들을 포함해 12명이 모였다. 이렇게 뜻 깊은 자리에 음식이 빠질 수 없다. 소고기 바비큐 파티.

5년 이상 미국 생활을 했던 늦깎이 학생들은 쌓였던 이야깃거리를 내 앞에 풀어놓는다. 여행 목적으로 90일 비자면제 프로그램을 통해 현지를 방문한 나는 그들의 비자가 궁금해졌다. 남자는 유학생 신분이라 학생 비자를 받았고 아내는 학생 동반 비자를 받았다. 현지 출산을 하여 자녀들은 자동적으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한국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소고기 바비큐 파티가 내 눈 앞에 있다. 미국에서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가격이 거의 비슷하다.
▲ 소고기 파티 한국에서라면 엄두도 못 낼 소고기 바비큐 파티가 내 눈 앞에 있다. 미국에서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가격이 거의 비슷하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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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이 없는 유학생 가족은 미국 법에 의하여 저소득층으로 분류가 된다. 주마다 기준이 다른데 켄터키 주의 경우 4인 가족 기준 월 소득이 2907달러 이하면 메디케이드 적용 요건을 갖추게 된다. 덕분에 아이들은 메디케이드(medicaid) 자격을 부여받았다. 메디케이드는 메디케어와 함께 미국 의료복지의 양대 산맥인데 이들이 19살이 될 때까지 소요되는 모든 의료비를 공제받을 수 있다.

시민권이 없는 부모들은 여행자 보험으로 의료보험을 대신한다. 사촌형 내외는 1인당 500달러 상당의 비용을 연간 지불하고 있었다.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가입토록 하는 기초 의료보험이 1500달러임에 비춰보면 상당히 저렴하다.(여자는 임신·출산 관련 의료수요가 있다는 이유로 2배인 3000달러에 보험을 가입해야 한다) 모든 보험이 그렇듯이 상담을 위한 단순 내원이나 기왕력이 있는 질환은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접수비(Deductible)로 내는 100달러는 보험적용이 되지 않고 자가 부담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유학생들도 웬만큼 아프지 않고서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다행히 한국인이라도 출산 시에는 주에서 운영하는 산전 프로그램(prenatal program)에 의해 응급 메디케이드(emergency medicaid)를 제공받을 수 있다. 단, 적용 범위는 정상적인 자연 분만에 국한된다(제왕절개도 포함된다.) 조기 출산으로 쌍둥이를 출산했던 한 산모는 20만 달러의 의료비 청구서를 받았다. 한 아기가 미숙아라 의료비가 더욱 눈덩이처럼 불어났는데 다행히 일반 보험에 들어둔 덕분에 커버는 할 수 있었다. 허나 한 번 뿐이다. 큰 보험금 지출을 겪었던 보험회사는 보험갱신을 거부했다.

밤중에 응급실을 방문하면 기본 1000달러의 비용이 발생하니 무서워서 병원을 못 갈 판이다. 본인도 한국에서 응급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새벽녘 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을 방문하고 5~6만원 가량의 진료비를 낸 기억이 난다. 그마저 비싸다고 투덜거리지 않았던가.

보란 듯이 가난하지 않아 메디케어에 끼지 못한 어정쩡한 미국인들은 민영보험에 가입해야 한다. 한국의 전국민건강보험제도와 같은 공적 의료보험과는 달리 민영보험은 기본적으로 보험료가 상당히 높다. 아프지 않기만을 바라며 의료보험 가입을 포기한 사람이 전 국민의 15%인 5000만 명. 그들이 겪는 고통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식코>(Sicko)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전문의 체계 또한 우리와 다르다. 사촌형은 중이염을 앓는 아들을 소아과 의원에 데려갔다. 의사는 항생제 처방 하나를 주면서 중이염 전문 소아과 전문의을 소개해주었다. 같은 치주질환인데도 통증부위가 이빨인지 잇몸인지로 분류하는 바람에 치과 전문의 세 명을 연달아 찾아간 적도 있다. 분과별로 질환이 세분화될수록 치료에 걸리는 비용과 시간은 늘어난다.

그래서 한인들의 경우 미국 병원대신 한의원에 대한 갈망이 크다. 허나 이 곳 켄터키는 유독 의료시설이 열악한 지방. 가뭄에 단비 내리듯 매년 한 번씩 선교차원에서 의료봉사가 이루어진다. LA에 거주하는 독실한 한의사 장로님이 직접 오셔서 진료를 한다. 그때는 인근 한국인들이 모두 모여들어 일주일 내내 치료를 받는다.

그는 사촌형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다. 미국식 문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집 밖을 나섰다가 문이 뒤에서 잠겨버렸다. 이 때 그의 도움으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인도 북동쪽 나가랜드(nagaland)에서 태어난 사시는 참으로 유쾌한 사내였다.
▲ 사시 쟈미르(Sashi jamir) 그는 사촌형 바로 옆집에 사는 남자다. 미국식 문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집 밖을 나섰다가 문이 뒤에서 잠겨버렸다. 이 때 그의 도움으로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인도 북동쪽 나가랜드(nagaland)에서 태어난 사시는 참으로 유쾌한 사내였다.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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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비 걱정 외에도 교육 또한 만만치 않은 이슈다. 근방에 사는 유학생 가족 대부분 아이들에게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가르친다.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목회자들로서는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셈이다. 미국 현지에 눌러앉는다 해도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심는 교육은 중요하다.

트윙키 보이(Twinkie boy). 겉은 노랗고 속에는 하얀 크림이 든 미국식 빵에서 나온 말이다. 겉은 동양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 모국어가 아닌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문화가 익숙한 동양계 미국인을 일컫는다. 현지에서 태어나 미국인과 다를 바 없는 2세지만 주류인 백인사회에 편입하기 쉽지 않다. 백인 눈에는 그저 동양인 일뿐. 사춘기가 지나면서 어정쩡한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이민 2세들은 종종 비뚤어져서 아시안 갱이 되기도 한다.

트윙키는 한국에서도 이방인이다. 한국말 하나 못하는 그들이 한국에서 인정받기는 쉽지 않다. 언어 문제로 갖은 고초를 겪은 이민 1세들이 고통을 대물림하기 싫어 영어만 죽어라 가르친 결과다. 국적의 중간자로서 이들에게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어는 미국에 사는 그들에게도 필수다. 자전거 위가 아닌 의자 위에서 미국을 새롭게 보는 하루다.

조카에게 아낌없이 민폐 주는 삼촌, 미안하다

6월 9일 토요일

Wilmore, KY

"삼촌, 삼촌! 엄마가 이 방 쓰래요."

첫째 시온이가 내게 달려와 웅얼거렸다. 두 꼬맹이가 쓰던 침실이 내 차지다. 대신 사촌형 내외가 아이들을 끌어안고 같이 자게 되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듯 하여 몸 둘바를 모르겠다.

늦게까지 늘어져 자다 형수님이 마련해 준 김치찌개에 밥을 또 세 공기나 먹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소파에 파묻혀 사촌형과 깨알 같은 대화를 나눈다. 어느덧 다가온 점심시간. 식충이가 따로 없다. 함포고복(含哺鼓腹). 부른 배를 두드린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아도 피곤함이 느껴진다. 한방에서는 노일상(勞逸傷)이라고 하여 지나친 게으름 또한 신체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쏟아지는 낮잠을 주체하기 어렵다. 사촌형과 사이좋게 바닥에 퍼질러 눈을 붙인다. 한두 시간 후 이웃집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않았더라면 태산이 무너져도 깨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봐도 아이들은 순수하고 해맑다.
▲ 시온이와 놀러온 이웃집 소녀 언제봐도 아이들은 순수하고 해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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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조카 이삭이가 가지고 놀던 물건이 눈에 띄었다. 교회 여름학교에서 선물로 나눠주었다는데 호루라기가 합쳐진 나침반이다. 자전거 여행자 '에비'는 호루라기 소리가 개를 물리치는 데 효험이 있다 하였다. 목에 걸도록 끈까지 달려있는 편리함.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일 레어 아이템을 여기서 발견할 줄이야.

"승민형. 나 저거 갖고 싶은데."

견공들에게 쫓기던 심란한 여행길과 그걸 이겨낼 호루라기의 효능을 이야기했더니 사촌형은 요란스레 낄낄댄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삭이가 나를 불렀다. 조막만한 손에는 작은 종이상자가 놓여져 있었다. 제 딴에는 정중히 예를 갖춘다고 이미 뜯었던 포장을 원래대로 돌리려던 흔적이 가득하다. 뭘 이런 걸 다 주고 그러냐. 조카야! 얼굴 가득 감사한 마음을 띠며 선물을 재빨리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순간 내 자신을 돌이켜 본다. 주는 거 없이 받기만 하는 삼촌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소싯적 친척 분들이 우리 집을 들르실 때마다 형과 나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졌다. 오늘은 뭘까? 신발을 벗고 집안에 들어오신 그 분들은 항상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그 시절 5000원 하던 과자 종합선물세트는 어린이들에게 로또만큼의 흥분과 희열을 주었다.

"이거 애들 주세요."

부모님의 손을 통해 전달된 상자는 그 즉시 밀실에서 철저히 작업을 당했다. 추억의 과자를 하나씩 꺼내며 우리는 합리적인 원칙 하에 물품을 분배했다. 내가 이거 가질 테니까 너는 카라멜 가져. 이삼일 동안 과자 부스러기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우며 우리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았다.

20년이 지났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지만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조카들이 있다. 먹지 못하는 자전거와 캠핑 장비들만 잔뜩 짊어지고 온 털 복숭이 사나이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침실을 빼앗더니 호루라기도 그의 손에 넘어갔다.

"이삭아, 삼촌한테 호루라기가 왜 필요하다 그랬지?"
"모르겠는데."
"개들이 삼촌을 쫓아오는데 저걸 불면 도망간다고 그랬잖아."

그랬군. 아버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호루라기를 준 모양이다. 삼촌이 나중에 돈 많이 벌면 너가 좋아하는 과자 실컷 사주마. 기다려라.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사촌형 친구분을 치료했다. 그 답례로 카드 하나를 받는다. 미리 적립된 금액에 따라 해당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 선물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사촌형 친구분을 치료했다. 그 답례로 카드 하나를 받는다. 미리 적립된 금액에 따라 해당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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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일요일

Wilmore, KY

책상에서 머리를 싸매고 아무리 궁리를 해본들 실전은 예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자전거에 잔뜩 실었던 짐이 골칫덩이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었던 화개장터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평화로운 시간을 맞이하야 앞 뒤 페니어백을 몽땅 떼 내어 속에 든 잡동사니를 모조리 꺼내놓았다. 폼 클렌져, 핸드 로션, 바디 로션. 목욕도 제대로 못 하는데 기능성 화장품이 무슨 소용이랴. U-bar.(수평으로 놓인 기본 핸들바와 달리 수직으로 잡을 수 있도록 고안된 손잡이) 미국서 구입한 자전거와는 규격이 다르다. 당장 나에게 소용이 없다면 무게만 차지하는 고철덩어리다. 야광조끼, 일명 엑스반도는 야간에 라이딩을 하지 않아 필요 없어진 물건이다. 명함은 왜 500장이나 가져왔던가?

진즉 버린 물건도 있다.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 미국판, 국어 사전. 여행자들의 바이블이라는 론니 플래닛은 도보 여행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자전거는 차와 사람의 중간자적 입장을 표방한다. 차량과 도로를 공유하며 달리지만, 멈추면 사람이 된다. 제 편한 대로 양쪽을 오가는 두바퀴 쇳덩이의 애매모호한 요구를 어찌 책으로 담을 수 있으리.

페니어백에서 물건을 꺼내 놓으니 금방 난장판이 되었다.
▲ 짐 정리 페니어백에서 물건을 꺼내 놓으니 금방 난장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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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은 마크 트웨인을 조금이라도 닮아보려는 열정의 표출이었다. 청년 시절 그는 미주리 주에서 네바다 주까지 매우 느리고 고통스러운 역마차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필요 이상의 무게는 안전상 위험한데다 짐에는 온스(oz; 약 28g) 단위로 요금을 부과했는데도 그는 항상 웹스터 대사전을 옆에 끼고 다녔다. 가파른 산길, 타는 듯한 사막, 산적과 인디언이 출몰하는 지대에서도 사전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어의 달인이 되고 싶었던 강인한 신념이 마침내 대문호를 만들어냈다.

시대를 풍미했던 대 작가에 대한 오마주는 빛을 보지 못했다. 자전거 안장 위에서 독서는 불가능했고, 텐트에서는 쉬기 바빴다. 빳빳하고 두꺼운 국어사전은 중력의 법칙에 의거하여 육체를 고되게 했다. 결국 침몰하는 배에서 짐을 내던지는 선장의 심정으로 작별을 고했다.

일찍이 법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고 싶다면 살아 생전에 남에게 건네라. 물건은 그 주인과 생명이 닿아 있는 것이라 주인이 죽으면 그 빛을 잃는다. 죽은 사람이 남긴 물건을 가족이 아닌 바에야 누가 가지고 싶으랴.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을 만날 때 물건은 생명을 얻는다.

돌이켜보니 무책임했다. 나의 체취를 간직한 물건들. 조금도 가치를 발하지 못하고 그들은 분서갱유의 물결로 사라졌다. 길 가는 여행자를 만나 부탁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걸 가져달라고. 당신의 체온으로 보듬어 달라고 말이다.


태그:#미국,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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