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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햇살처럼 눈부시다
▲ 방비엥의 아침 강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햇살처럼 눈부시다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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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비엥에서 빠질 수 없는 '놀거리'는 카약 킹과 스윙점프다. 하루 투어를 통해 카약을 타고 캄캄한 동굴 속을 탐험하고 강을 따라 내려오며 카르스트 절경을 감상한다. 그리고 마을 인근에 도착해서 10미터 정도의 높이에서 밧줄을 타고 강 속으로 스윙점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아이들은 방비엥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었으므로 아침부터 긴장과 함께 잔뜩 설레어 있다. 감기에 걸린 아내와 나, 그리고 하영이만 빠지고 12명의 아이들이 모두 하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로 픽업을 나온 트럭에 타면서 상훈이가 아프다는 하영이를 두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 얼굴로 부탁을 한다.

"삼촌, 저도… 오늘 안 가면 안 돼요?"

"네가 오늘 하루 대장인데 안 가면 어떻게 해?"

"삼촌, 그럼, 하영이… 좀, 잘… 부탁해요."    

...
▲ 방비엥의 아침풍경 ...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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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상훈이를 알고 나서 녀석의 이런 표정은 또 처음이다. 어찌나 애절하고 절절한지 순간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느라 혼이 났다. 둘 사이가 언제 저리 애틋해졌나 싶다가도, 이국땅에서 아프다는 여자 친구를 혼자 숙소에 남겨두고 떠나는 그 첫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렇게 녀석이 부탁한 특별한 미션도 있고 하니, 하영이와 함께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죽 집'을 찾아간다. 물론 이곳에 죽 집이 있을 리가 없다. '포'를 파는 국수집이지만 '라이스 수프'도 팔고 있어 내가 그렇게 부를 뿐이다. 하영이는 입맛에 잘 맞는 지 맛나게 먹었다. 숙소에서 쉬었다가 점심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다.

아이들의 일기장 검사가 밀려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하면서 일주일에 한 두 번씩 13명의 일기를 읽고 일일이 댓글을 달아주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우리들의 여행이란 것이 교통수단이든 투어든 숙소든 어느 것 하나라도 미리 계약해두고 떠나온 그런 패키지여행이 아니므로, 우리부부는 틈 날 때마다 이러한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돌아다녀야 하고 또 밤에는 아이들이 일기를 써야 함으로 일기장을 검사할 시간이 넉넉지가 못하다.

낮 동안에 오늘처럼 짬이 생기는 날이라면 부지런히 읽어두어야 한다. 이렇듯 일기검사가 우리부부에겐 일감이 되어 여행길의 불청객 같다가도, 정작 아이들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즐거움 또한 있다. 이미 지나온 여행길을 아이들의 눈을 따라 다시 걷는 동안,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의 색과 크기를 가늠해 보고, 그들의 마음에 남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이는 주민, 관광객...
▲ 방비엥의 아침풍경 서로를 아랑곳하지 않는 듯 보이는 주민, 관광객...
ⓒ 양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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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득키득 웃다가 쩝쩝 쓴 맛을 다시다가 일기장을 들고 침대에서 뒹구는 사이에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시 상훈이가 부탁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하영이를 만나러 나갔다. 점심으로는 볶음밥 집을 선택했다. 물론 이 식당도 원래 볶음밥 집이 아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해달라면 매콤하게 볶음밥을 만들어 주기에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다. 게다가 파파야 샐러드가 아주 맛있는 집이다.

이번에도 하영이는 맛있게 먹어치웠다. 나랑은 현재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다니고 있는 하영이가 여행에서 돌아온 어느 날 그날을 기억하며 이런 말을 한다.
  
"그날 방비엥에서 이모와 삼촌이랑 같이 간 식당들이 진짜 맛있었어요. 이상하게 다른 데에서도 이모랑 삼촌이 시키시는 음식은 다 맛있는 것 같아요."

아마도 하영이는 그것이 오래된 여행자의 노하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시 방문하는 여행지의 장점이란 그런 것이다. 지난여름에 라오스 여행을 먼저 했었던 우리부부에게는 도시마다 몇 개의 맛 집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 나라 어느 도시가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 하나로 먼저 기억될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아르헨티나의 꼬르도바는 남미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호수와 산들이 있는 도시다. 하지만 아내와 내게 꼬르도바는 핏물이 살짝 베어 나오는 쇠고기 스테이크와 와인이 기가 막히도록 맛있었던 도시로 기억될 뿐이다.

또 베트남의 경우, 하노이를 두 번째 여행하고 떠나던 날에 내가 아내에게 했던 말도 있다.

"만약 이 우울한 도시를 내가 다시 찾아온다면 그건 아마도 '넘 네우앙(물소고기를 숯불에 구워 우리 메밀국수처럼 시원한 육수에 국수와 함께 얹어주는 요리)'을 먹기 위해서 일 거야."    

관광객 대부분이 동굴과 강으로 떠나버린 낮 풍경
▲ 한산한 방비엥의 거리 관광객 대부분이 동굴과 강으로 떠나버린 낮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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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이가 부탁한 미션을 다 수행하고 오후에는 강가에 나가 보았다. 지난여름 강물에 휩쓸려 부서지고 없던 나무다리가 다시 만들어져 있었다. 매해 우기가 지나면 다시 나무를 엮어 다리를 만든다는데, 그래서일까, 잔잔히 흐르는 순한 강물에 다리를 내리고 구름처럼 물결치는 봉우리들을 배경삼아 서있는 모양이 어느 예술가의 작품처럼 근사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주민을 따라 나무다리를 건넜다. 강에는 마을 아낙들이 강물 속에서 부지런히 무언가를 건져 올리고 있다. 수초 같은데, 먹을거리가 되는 모양이다. 천천히 해가 기울고 흐르는 강물과 거기에 발을 담그고 일을 하는 그네들의 풍경이 하도 평화로워 한 참을 앉았다가 '미스터 리'의 치킨하우스로 돌아왔다. 카약 킹 투어를 떠났던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이모, 삼촌'을 부르며 뛰어왔다. 당연히도 모든 녀석들이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데 옷만 젖은 것이 아니라, 몇 녀석들은 눈도 젖었다. 울었던 모양이다.

"스윙점프 하다 바로 떨어져서 너무 아파 울었어요."

"저도요."

해변이 아니랍니다
▲ 여기는.. 해변이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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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이와 서희다. 스윙점프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반대로 카약도 신나고, 스윙점프는 세 번이나 했다고 자랑하는 녀석도 여럿 있었다. 각설하고, 직접 아이들의 일기장을 통해 리얼한 상황을 들여다보자.

스윙점프를 했다. 다이빙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본 나는 정말 긴장되고 설레었다. 한 번 하고 난 뒤에는 정말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서 3번을 연속으로 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도 저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박정호(열여섯 살)

드디어 내 차례인데 공중을 달리는 것 같아 재밌었다. 그러다가 좀 느려지면 풍덩 하고 빠지는 것이고. 난 3번이나 탔다. -송승현 (열다섯 살)

맨 처음 정호 형이 스윙점프를 했다. 그 다음 희경이 누나가 성공하고 서희가 하는데 하자마자 떨어졌다. 서희가 다시 도전하고 또 해도 계속 떨어졌다. 그래서 성호 형이랑 나는 안 하기로 했는데 유진이 누나가 나 하면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하는데 솔직히 무섭다. 손이 잘 안 잡히지만 했다. 무섭지만 꽤 재밌다. - 주영준(열네 살)  

다 즐겁게 타 길래 나도?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정호가 저거 타면 고소공포증이 싹 없어진다 길래 '고소공포증이 낫고 싶다! + 재밌어 보이는데? + 별 거 아닌 것도 같고 + 언니가 못 탔으니까 나라도'라는 수천 가지 생각이 겹치면서 큰맘 먹고 도전했다. 솔직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손이 달달 떨렸는데(난 고소공포증이 되게 심하다.) 진짜 두 눈 딱 감고 봉에 무게를 실었는데 세상이 하얗게 되면서 온 몸이 엄청! 엄청나게 아팠다. 나중에 듣고 보니 스윙점프는 줄을 따라 몇 번 왔다 갔다 해주고(정호는 이 과정에서 고소공포증이 없어진댔다.) 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하는데 나는 봉에 매달리고 2초 만에 떨어진 거니 거의 다이빙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뒤론 아파서 온 몸이 다 쑤셨다.  난 물에 떨어지고 땅으로 올라와서 엉엉 울었다. 고소공포증이 더 심해진 것 같다. 흑흑. -서유진(열일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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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비엥, 젊은이들의 열기가 흘러 넘치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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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바로 스윙점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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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여행 떠나 두 번째로 모든 아이들에게 부모님께 전화를 걸도록 했다. '미스터 리'의 인터넷 폰으로 한 명씩 전화를 하는 동안 잠시 볼 일을 보고 왔더니, 모든 아이들이 눈이 벌겋게 젖어 있다. 설명을 들어보니, 잘 통화를 하다가 한 녀석이 이유도 없이 울기 시작하자 그 다음부터는 줄줄이 엄마 아빠 목소리만 듣고도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나가던 타국의 여행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고 그랬단다. 어린 아이들이 전화기만 잡으면 울고 옆에 선 아이는 또 따라서 울고… 서양인들이 무슨 사연인지 무척 궁금했을 것 같다. 더구나 막내 서희는 펑펑 울다가 결국 말을 이어가지 못해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단다. 이런!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을 하고 계실까?

'전화하기'가 모두 끝나고 아이들에게 왜 울었냐고, 여행이 그렇게 힘드냐고, 아니면 오늘 스윙점프 때문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들의 대답이다.

"아니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재미있어요."

"그런데, 왜?"

"그냥요. 엄마 아빠 목소리 들으니까, 그냥 눈물이 나요."

그날 밤 부모님들은 밤잠을 설쳤을 지도 모르겠다. 여행 전에 우리부부에게 부탁하기를 아이들 고생 많이 시켜달라고 말씀들은 그렇게 하셨어도, 애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는가 싶어 늦은 걱정을 하셨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지금, 여행을 떠나와 가족과 집이 소중해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과 기록이 아닐까?
▲ 15살 나운이의 일기장 평생 잊을 수 없는 체험과 기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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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전했다. 그러나 계속 힘이 풀려서 바로 떨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잘 타는데 말이다. 그것도 3번이나 도전했는데 세 번 다 추락해버려서 온 몸이 아팠다. 너무 피곤하고 온 몸이 젖어서 추웠다. 숙소에 도착하고 씻고 난 뒤 우리는 집에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근데 계속 가족을 생각하니깐 눈물이 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집에 전화했는데 엄마가 받는 것이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버렸다. 결국 울어버렸고 엄마랑 통화한 지 2분도 안 돼서 끊어버렸다. 눈물도 너무 많이 났고 잘 들리지 않아서 그랬는데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몇 분 동안 계속 울었다. 팀원들도 거의 다 울었다. 빨리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전화가 끝난 뒤 우리는 어제 만났던 외국인들이랑 놀았다. 영어로 대화도 많이 했다. 하여튼 오늘은 너무 슬픈 하루였다. -남서희(열네 살)

덧붙이는 글 | 본 연재 기사는 <제민일보>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기사 내용은 김향미 & 양학용 여행작가 부부가 지난 겨울 중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11명의 청소년과 2명의 대학생과 함께 라오스로 한 달 동안 여행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저서로는 967일 동안의 세계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묶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예담)와 라오스 여행이야기를 담은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좋은생각) 등이 있습니다.



태그:#라오스, #여행학교, #방비엥, #레포츠, #시속4킬로미터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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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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