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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고추가루 ..
빨간 고추가루.. ⓒ 정현순

"고추가루 정말 곱네요.집에서 말린 태양초라 그런가?"
"전부 완전태양초는 아니고요. 건조기에도 조금 말렸어요."
"그래도 그건 완전태양초나 다름없어요. 빛깔부터 다른 것 봐."

방앗간에 고추를 빻으러 온 아주머니들의 말이다. 얼마 전 태풍 볼라벤이 지나고 난 뒤, 시장에 갔다. 고추 한 근(600g)에 18000~23000원이란 소리에 '올해 고추 값이 비쌀 거란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건조기를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의 양손에는 커다란 비닐봉투 안에 한가득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태풍의 후유증이지. 밭에 가보니깐 고추나무는 다 쓰러져 있고 고추는 떨어져서 바닥이 시뻘게. 개중에 멀쩡한 것만 주워왔어."
"잘 주워왔어. 물에 씻어 말리면 괜찮을 거야."

얼른 받아 물에 씻어 소쿠리에 건져 놓았다. 지금까지 따온 고추와 거의 비슷한 양만큼 많았다. 소쿠리에 건져 놓은 고추를 보고 인터넷쇼핑몰을 훑어 보았다. 며칠 전 언니와 고추때문에 통화하다가 작은 가정용 건조기가 있으니 이번 기회에 장만하는 것도 괜찮을 거란 언니의 말도 생각났고, 저 많은 고추를 저대로 두었다가는 모두 버릴 것만 같았다.

그 전에 말리던 고추도 비가 잦은 탓에 날파리 같은 것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있었으니 핑계 김에 하나 장만해야겠다는 마음에 급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또 다른 태풍 덴버가 올라온다는 예보도 있었고.

고추건조기에 있는 고추 ..
고추건조기에 있는 고추.. ⓒ 정현순

가정용 건조기를 찾아 상품 후기를 읽어보니 대체적으로 좋다는 평이었다. 망설임 없이 주문을 했다. 판매처에서도 급한 내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다음 날 밤에 물건이 도착했다. 남편도 "이런 것이 다 있었네" 하며 신기해 했다. 건조기를 사기 전에 방앗간 어디에 건조시켜주는 데 없나 하고 걱정을 했다.

건조기가  도착하자마자 고추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전에 거의 말라 가던 고추는 3~4시간을 건조시켰다. 건조된 고추는 정말이지 신기할 정도였다. 젖은 강도에 따라 8~10시간 정도 건조를 시켰다. 새벽에 일어나서도 건조된 고추는 따로 놓아두고 젖은 고추는 다시 건조시키고.

며칠을 그렇게 하는 사이에도 날씨는 흐린 상태였다 .비가 온 후 햇볕이 좋다 해도 습기가 올라와 다음 날 바로는 마당에 너는 것이 조심스럽다. 베란다에 고추를 널어도 빨래는 같이 널지 말아야 한다. 그나마 마른 고추가 젖은 빨래의 습기를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건조기 사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고추뿐 아니라 호박, 가지, 과일 등 용도가 다양했다.

물에 씻어 물기를 빼고 건조기에 말렸지만 그것은 두 번이나 건조를 시켜야 했다. 건조기의 힘을 빌리는 것도 한계는 있었다. 마냥 오래 놔두면 새까맣게 타는 것처럼 색깔이 변하는 것도 있었다. 경험이 없는 내 생각에 건조기의 도움을 적당히 받은 후 잠깐이라도 햇볕에 말려야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볕이 났으면 좋으련만. 하늘은 구름이다. 다시 거실에 널어 놓고 선풍기를 틀어놓았다. 그리곤 마침내 5일과 6일은 날씨가 좋아 이른 아침부터 마당에 잠깐씩 널어 바람과 적당한 햇볕을 쏘였다.

이틀에 걸쳐 말린 것을 빻으러 갔다 .첫날 말린 것은 덜 말랐으니 다음에 가져오는 것은 조금 더 말려오라는 주인의 말. 하지만 너무 말라도 좋지 않다고 하는 방앗간집 아주머니의 말이다. 적당히 말린다고 했는데 6일에 가지고 간 것은 너무 말렸다고 한다.

잠깐 날씨가 좋아서였을까? 방앗간은 고추 빻으러 온 사람으로 기다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고추를 빻아 가는 사람들의 고추를 보면서 얼마 짜리냐, 어디에서 샀냐, 매운내가 난다 등, 그렇게 오고 가는 말 속에는 정보도 있었다.

그중에 어떤 할머니는 비가 너무 자주 오니까 말리는 고추 안에서 나방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말에 어떤 이가 "말리다 비가 오면 무조건 냉장고에 넣어야 해요" 한다. 말리다 만 것을 냉장고에 넣어도 된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 것이다. 말리다 만 것을 냉장고에 넣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나방까지 생겼다는 말에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번 고추 말리기는 건조기가 있어 버린 것이 없이 아주 성공적으로 끝난 셈이다.

남편이 돌아왔다.

"고추 빻아 왔거든. 좀 봐."
"빛깔 참 곱다. 얼마나 나왔지?"
"14근(8,4kg)."
"그럼 빻기 전에는 얼마나 되나?"
"거의 20근은 되지. 씨하고 꼭지가 생각보다 많이 나가던데. 김장은 실컷 하겠어."

"마누라 고생했다. 집에서 이렇게 말리기 힘든데" 하며 남편이 고추가루를 어루만진다. 남편이 가족을 위해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데 나도 열심히 말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늘(7일) 더 이상 널 고추는  없지만 쨍쨍한 햇볕이 새삼 고맙다. 내년에 고추 말리기는 올해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같다.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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