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눈 속에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유?"
"진도까지 갑니다."
"아, 거시기 진도개 유명한 디 말이유?"

왜 사람들은 진도에 사람도 산다는 생각은 않고 개 안부만 묻는 걸까? 개만도 못한 사람이 넘쳐 나서 사람 안부는 물을 것도 없는 걸까? 그럼 개만도 못한 사람들은 모두 쥐일까, 아님 고양이일까? 이러다가 사람만도 못한 개가 넘쳐 나면 어쩌려고 그러나. - '작가의 말' 몇 토막


시, 소설, 동화, 희곡 등 여러 문학장르를 자유스럽게 넘나들고 있는 '전천후' 작가 박상률. 그가 판소리 아니리조 사설체 형식을 빌린 동화 같은 장편소설 <개님전>(시공사)을 펴냈다. 이 소설은 전남 진도에 있는 '노랭이' 황씨 할아버지와 그 집에 사는 진도개 황구, 황구 새끼 노랑이와 누렁이 이야기이다.

사람과 개 이야기지만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개가 나오는 이 장편소설은 모두 10부로 나뉘어져 있다. '나, 누렁이…', '쥐 잡는 개 새끼', '똥개! 똥개! 똥개!', '국밥 사 인분', '물에 빠진 생쥐 꼴 되어', '개장국이 뭔 말이단가?', '상복 입은 개', '사람의 길, 개의 길', '개 학교', '나, 누렁이…'가 그것.

작가 박상률은 '작가의 말'에서 "때로 진돗개는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기도 한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그건 개가 사람보다 나은 노릇을 하기 때문"이라며 "지금부터 가족 같기도 하고, 때론 사람보다 나은 노릇을 하는 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개놈이 아니라 개님의 이야기…"라고 적었다.

박상률은 1958년 개띠 해에 태어나 사람보다 개가 더 유명한 진도에서 진돗개와 함께 어린 날을 보냈다. 그런 그가 고향 진도를 밑그림으로 진돗개를 주춧돌로 삼아 장편소설을 썼으니 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개님전>이란 제목도 참 재미있다. 흔히 '개새끼, 개자식, 개놈, 개수작' 등 웬만한 쌍말과 얕잡아 이르는 말에 꼭 들어가는 '개'에게 작가는 왜 '개님'이라 우러러 떠받치고 있을까. 

그 진돗개 모녀는 왜 '개놈'이 아니라 '개님'으로 모셔졌을까?

박상률 장편소설 <개님전> 이 소설은 전남 진도에 있는 ‘노랭이’ 황씨 할아버지와 그 집에 사는 진도개 황구, 황구 새끼 노랑이와 누렁이 이야기이다
박상률 장편소설 <개님전>이 소설은 전남 진도에 있는 ‘노랭이’ 황씨 할아버지와 그 집에 사는 진도개 황구, 황구 새끼 노랑이와 누렁이 이야기이다 ⓒ 시공사
"뭔 소리다냐."

헛간 문을 박박 긁는 소리에 황구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지, 새끼를 여러 배 낳았으면서도 제대로 산후조리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건지, 여름 지나면서 기력이 쇠해지며 저녁밥을 먹으면 바로 곯아떨어지고 말았것다. 젊었을 적에는 지나칠 정도로 밝아 걱정이던 잠귀가 이젠 되레 어두워 탈이었으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사람에게나 개에게나 똑 진리렸다. - 9쪽, '나 누렁이…' 몇 토막

이 장편소설은 '노랭이' 황씨 할아버지 집에 사는 황구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문을 연다. 황씨 할아버지 집에는 진돗개 세 마리가 있다. 어미개 황구와 황구 새끼 노랑이와 누렁이가 그 개들이다. 황씨 할아버지는 진돗개들을 마치 한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며 '개놈'이 아니라 '개님'으로 모신다.

황씨 할아버지가 진돗개 세 마리(황구네 세 모녀)를 '개님'으로 모시는 까닭은 따로 있다. 이 개들은 곳간에 놓인 가마니를 여기저기 쏠아놓는 쥐를 몽땅 잡아다 놓기도 하고, 아기 똥도 핥아준다. 그뿐이 아니다. 술 취해 잠든 황씨 할아버지가 담뱃불에 번진 불길에 타 죽을 뻔했을 때에도 이 개들이 그를 구한다.

이처럼 '밥값' 제대로 하는 황구네 세 모녀에게 황씨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먹는 식당에서 국밥도 사 먹이고, 손수레도 태워준다. 황씨 할아버지와 황구네 세 모녀는 그렇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애틋한 정을 쌓아간다. 그런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기력이 점점 떨어지는 황씨 할아버지에게 살려면 황구를 고아 먹으라고 말하는데….

상복 입은 진돗개 모녀, 마침내 갈림길에 서다

"황구랑 노랑이, 누렁이 모다 우리랑 똑 같이 상복 입고 있으믄 할아부지도 좋아하실 거구만요."

이런저런 의견이 나오는 가족회의 끝에 황씨네 식구들은 마침내 황구네 가족에게도 상복을 입히기로 결정했것다.

황씨 할아버지 아들이 식구들 의견을 좇아 이 일을 매듭지엇것다. - 108쪽, '상복 입은 개' 몇 토막

황구를 고아먹으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버럭 화를 낸 황씨 할아버지는 황구네 모녀가 잡은 노루뼈를 고아 마시지만 결국 이 세상을 떠나고. 황씨 할아버지 식구들은 황구네 세 모녀가 진정한 가족이었기에 개들에게도 상복을 입힌다. 황씨 할아버지 식구들은 초상을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황구네 세 모녀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황구를 뺀 노랑이와 누렁이를 선소리꾼과 서울 옷장수에게 팔고 만다.

노랑이는 그나마 가까운 곳으로 팔려갔기에 어미 개 황구가 오며 가며 볼 수 있었지만 서울로 팔려 간 누렁이는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황구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간 누렁이는 '개 학교'라 불리는 개 훈련소에 들어가 여러 가지 훈련도 받고, 옷 파는 개로 데뷔까지 한다.

누렁이는 낯선 서울생활에 힘이 되어 준 길남이에게 기대고, 둘은 마침내 사랑을 싹 틔운다. 그렇게 긴 시간이 흘러간 어느 날, 누렁이는 주인을 따라 잠시 진도로 돌아온다. 황구네 모녀는 다시 만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다. 누렁이 배 속에 길남이와 맺은 사랑의 열매인 새 생명이 꿈틀대고 있었으니….

위태로운 세상 살아가는 청소년 다독이는 메시지

누렁이는 젖 빨던 힘까지 짜내며 최대한 빨리 달렸것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머니를 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오래 어머니랑 있고 싶어서였으니.

마을로 들어서자 모든 것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두어 달 사이에 계절만 가을을 지나 초겨울이 되었다. 자신도 어느새 예비 엄마가 되었다. 누렁이는 익숙한 발길로 자신이 살던 황씨 집으로 내달렸것다. -156쪽, '나, 누렁이…' 몇 토막

작가 박상률이 펴낸 장편소설 <개님전>은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 툭 하면 학원폭력, 십대 임신, 자살, 성폭력 등이 일어나는 이 세상을 위태롭게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다독이는 메시지다. 작가는 사람보다 더 나은 진돗개를 통해 이 세상 곳곳에 '개보다 못한 사람들'이 드리우는 짙은 그늘을 하나둘 걷어낸다.  

문학평론가 박경장은 책 끄트머리의 '작품해설'에 "소리의 고장 진도, 진돗개 이야기를 하는데 판소리 아니리조로 사설을 늘어놓는 이야기 형식은 더없이 적절한 선택"이라고 말문을 연다. 그는 "작품은 개(님)의 이야기지만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인생사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며 "소리로 맺고 푸는 진도 여인의 삶이 진돗개 황구로 투사된, 사람의 길과 개의 길이 결코 다르지 않은 동화 같은 이야기, 바로 <개님전>"이라고 썼다.

작가 박상률은 1958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나 1990년 <한길문학>에 시를, <동양문학>에 희곡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청소년 문학에 관심이 많아 계간 <청소년문학> 편집주간을 오랫동안 맡았으며, 우리나라 '청소년 문학의 물꼬를 튼 작가', '청소년 문학의 대가', '청소년 문학의 원조' 등으로 불리고 있다.

시집으로 <진도 아리랑> <배고픈 웃음> <하늘산 땅골 이야기>가 있으며, 희곡집 <풍경 소리>, 산문집 <청소년문학의 자리>, 장편소설 <봄바람> <나는 아름답다> <밥이 끓는 시간> <방자 왈왈> <불량청춘목록>을 펴냈다. 동화로는 <까치학교> <미리 쓰는 방학 일기> <구멍 속 나라> <내 고추는 천연기념물> <개밥상과 시인 아저씨>가 있으며, 나관중 <삼국지>와 연암 박지원 <요술 구경>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덧붙이는 글 | * <개님전> 박상률 씀, 시공사 펴냄, 2012년 5월, 176쪽, 9000원
* 이 기사는 <문학in>에도 보냅니다



개님전

박상률 지음, 시공사(2012)


#박상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