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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두부가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두부이야기나 들으러 갔다가 만난 인생스토리. 역경드라마가 있다면 이 사람이 주인공일 테고, 기적이 있다면 이 일이 아닐까.

사업은 실패하고, 희귀병은 찾아오고

20년 전 이광복씨에게 중증근무력증이 찾아왔다. 이 병은 신경의 자극이 근육으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여 근육이 쉽게 피로해지는 희귀질병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엔 이 병은 거의 사망에 이르는 병이었고, 치료율이 5% 정도의 병이다.

이광복씨 그는 20년 전 중증근무력증을 앓았다. 사업도 실패했다. 일주일에 250만 원이라는 병원비를 감당해야했다. 이런 역경을 딛고 그는 이제 두부달인으로 우뚝 서 있다.
이광복씨그는 20년 전 중증근무력증을 앓았다. 사업도 실패했다. 일주일에 250만 원이라는 병원비를 감당해야했다. 이런 역경을 딛고 그는 이제 두부달인으로 우뚝 서 있다. ⓒ 송상호

아픈 일은 겹쳐서 온다했던가. 잘 다니던 직장을 접어두고 시작한 사업이 안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 외환위기라는 악재가 겹쳤다. 어린 딸 둘과 아내를 책임져야 하는 광복씨에겐 앞이 보이지 않았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병을 불러온 게다.

희귀병이라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20여 년 전 당시, 1주일에 250만 원이나 병원비로 나갔다. 자신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해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처절하리만큼 힘들 때 내밀어준 그 나눔의 손길이 그나마 그 가정을 붙들었다.

광복씨는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살아야 한다, 아니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나 하나가 아니라 나의 가정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중고가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게 두부 가게다. 대학 기계과 출신, 기계계통 품질관리과 직장, 유사 계통의 사업 등을 하던 그에겐 전혀 생소한 분야다. 하지만,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니 감히 문제 삼을 수 없었다.

"여기서 반드시 일어서리라"

"처음엔 노점을 1년 했어요.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두부와 묵을 만들었죠. 낮엔 노점을 통해 팔았고요. 그건 순전히 나 나름의 홍보방식이었어요.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을 입소문으로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었죠."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입이 절로 벌어진다. 아까 근무력증이라 하지 않았는가. 쉽게 피로해지는 병이라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약을 먹어도 사망에 이른다는데, 아마도 그는 죽을 각오를 했나보다. "여기서 일어서리라. 반드시 성공하리라" 이렇게 하루에 열두 번도 그는 되뇌었다.

노점 1년을 하니 생소해 하던 사람들도 점차 두부를 사갔다. 입소문이 퍼졌다. 그 후부터 본 가게로 돌아와 10년을 더 그렇게 고생했다. 기상시간 오전 3시 30분, 취침시간 오후 10시 30분. 하루 19시간을 쉬지 않고 일만 했다. 명절 빼고 거의 매일 그렇게 했다. 친구도 안 만났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 오로지 그 일에만 매달렸다.

손두부 그가 오늘 아침에 만든 따끈따끈한 손두부다. 친절한 서비스가 약하니 제품만큼은 확실하게 만들자던 그의 철학이 만들어낸 두부. 이젠 이 두부 마니아가 안성에 많다.
손두부그가 오늘 아침에 만든 따끈따끈한 손두부다. 친절한 서비스가 약하니 제품만큼은 확실하게 만들자던 그의 철학이 만들어낸 두부. 이젠 이 두부 마니아가 안성에 많다. ⓒ 송상호

20평 공간에 공장과 점포가 공존하는 스타일

그의 전략은 "몸으로 뛰자. 내 몸으로 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였다. 또 하나의 전략이 있었다면 "나는 친절한 서비스가 약하니, 물건 만큼은 확실하게 만들자"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건 항상 물건의 질이었다. 물론 재료부터 제조까지 그의 손길이 닿았다.

요즘 대형마트가 들어서 소규모 상인들이 죽어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광복씨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틈새시장을 계속 노려왔다. 직접 만든 따끈따끈한 두부를 주부 손에 들려주니 신선했다. 물건 만큼 확실하게 만드니 단골이 단골을 만들어 나갔다.

무리한 사세 확장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제 장사가 웬만큼 되니 사람을 고용해 편하게 살아라"고 충고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쓴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점포 확장에 따른 위험부담도 떨쳐버렸다. 실패와 좌절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이 만든 만큼만 판다는 방식을 고집해왔다.

사실 그 시절, 이런 형태의 사업은 신개념이었다. 일종의 공장형 점포스타일이다. 20평 내부에서 두부공장도 있고, 판매점포도 있는 방식이다. 그 옛날 가내 수공업 방식에다가 판매까지. 당시에도 경쟁력 있는 신개념 방식이지만, 1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경쟁력 있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두부를 직접 생산한다. 생산한 두부를 소매로 판다. 식당이나 기관에 납품한다. 다른 가게에 도매로도 납품한다. 기관 등에서 부르면 달려가 프리젠테이션도 한다. 영업도 하고 홍보도 한다. 진짜 멀티플레이어가 따로 없다. 하기야 이런 방식이 아니고서 어찌 살아 남았을까. 당신은 진정 공장형 점포스타일이다.

"나 모르면 간첩이래유"

사람들이 종종 그런다. 이제 안성시장통에서, 아니 안성 아줌마들 사이에서 광복씨를 모르
면 간첩이라고. 아니 그를 몰라도 '두부사랑'집은 다 안다고.

공장형 점포 그가 서 있는 곳은 두부 매장, 그 뒤로 두부 공장이 있다. 매일 그가 직접 두부를 만들고, 직접 판다. 때론 도매로, 학교로, 식당으로 판다. 그는 멀티플레이어였다.
공장형 점포그가 서 있는 곳은 두부 매장, 그 뒤로 두부 공장이 있다. 매일 그가 직접 두부를 만들고, 직접 판다. 때론 도매로, 학교로, 식당으로 판다. 그는 멀티플레이어였다. ⓒ 송상호

"우리 가게는 95%가 단골이에유. 뜨내기손님은 거의 없고 마니아들만 찾아유. 이 가게 주변에 살다가 이사 간 사람들은 이 맛을 못 잊어 택배를 시킨다니께유."

광복씨는 6년 전부터 살살 친구도 만나기 시작했다. 자신 만의 시간도 가끔 가지기 시작했다. 딸들에게도 대학졸업과 살길을 찾게 해줬다. 아내에게도 자신이 원하는 가게를 차리게 해줬다.

요즘 그는 왠지 우울해지기도 한단다. 그 시절 열정이 나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자신을 돌아보니 "나는 무언가"라는 마음이 든다고. 일종의 주부우울증과 같은 거다. 이제 자기 자신에게 "그동안 열심히 살았다. 이젠 좀 쉬어라.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고 보상해주고 싶다고.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만감이 교차한다. 우선 악조건을 딛고 한 가정을 살린 그가 고맙고 고맙다. 하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야 겨우 살아남는 대한민국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어쨌거나 광복씨는 요즘도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두부를 만들고 판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20일, '두부사랑' 가게(안성시장통 옆)에서 이광복씨와 이루어졌다.



#즉석 손두부#두부#이광복#두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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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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