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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총·대선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본지는 망자의 사진을 싣지 않는다. 하지만 처참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 위해 이 사진을 공개하기로 했고, 컬러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조선일보>가 10월 11일자 1면에 뜬금없이 커다란 흑백사진 1장을 내보냈다. 29년 전 이국땅에서 발생한 처참한 사건 장면을 대문짝만하게 실은 이유가 뭘까. 흑백사진을 자세히 보니 시체들의 얼굴과 몸통이 군데군데 찢겨져 나갔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장면들을 지면에 그것도 신문의 얼굴인 1면에 커다랗게 올린 이유가 뭘까?

사진과 함께 "이 장면, 가슴 아프지만 국민은 알아야 합니다", '29년만에 서랍에서 나온 아웅산 사진의 외침' 이란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는 1980년대 초반 암울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시절, 정부 각료와 수행원 16명이 미얀마 양곤(버마 랭군)의 아웅산 국립묘소를 찾았다가 느닷없는 폭탄 테러로 참변 당한 사실을 부각시켰다.

<조선일보>·TV조선, 29년 전 처참한 '북 테러' 대대적으로 보도 

아웅산 테러 사진을 공개한 <조선일보> 10월 11일자 1면.
 아웅산 테러 사진을 공개한 <조선일보> 10월 11일자 1면.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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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흑백과 컬러사진으로 당시의 참혹한 광경들을 1면도 모자라 3면에 공개했다. "아웅산 희생자들의 추모비 건립 모급운동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 주된 이유지만 저의가 의심스럽다. 더욱이 TV조선은 전날부터 '아웅산의 처참한 사진들을 소개한다'면서 특종인 양 이 사진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북한의 소행", "북한의 폭탄 테러"임을 강조한 기사와 사진 설명, 그리고 29년 전 <조선일보>가 1면에 대서특필했던 '북괴특수기관 범행', '전두환 대통령 귀국 후 북괴에 경고' 등의 큼지막한 활자들이 나부낀 기사까지 소개한 <조선일보>와 TV조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뭘까. <조선일보>가 이날 3면에 실은 1983년 10월 9일자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강렬하다. 당시 <조선>은 '살인·폭력집단은 자멸뿐...북괴에 경고'란 섬뜩한 제목으로 안보 위기론에 군불을 지폈다.  

<조선>은 이틀 후인 13일에도 1면에 '천안함' 이슈를 큼지막하게 부각시켰다. '민주당 대선후보, 천안함 앞에 서다'란 1면 머리기사에서다. '문재인, 야 대표급 인사 처음으로 찾아 헌화·묵념 "안보 무능 다시는 없게"… 책임 소재는 언급 안 해'란 부제가 눈에 띈다. 기사는 "문 후보는 그러나 천안함 폭침 사건의 책임 소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며 방점을 찍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을 시종일관 '폭침'이라고 주장하는 신문의 집요함이 대단하다.

왜 이 시점일까. <조선>은 감추어 두었던 비장의 무기를 꺼내든 것처럼 방송과 신문, 인터넷 등 자사가 지닌 매체를 총 동원해 포문을 열었다. 대선을 2개월여 앞두고 뒤숭숭한 정국을 전환해 보려는 것일까. 수상하다. 선거 때마다 고개를 내밀었던 '안보 위기', 이른바 '북풍'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아닌 게 아니라 앞뒤 맥락을 살펴보면 '북풍' 카드를 끄집어든 것은 <조선>뿐만이 아니다.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의 단독회담 비공개 대화록이 있다"며 이른바 '북풍'성 의혹을 연달아 제기한 것과 비슷한 시점이다.

정 의원은 지난 8일 국회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 단독 정상회담을 갖고 '북방한계선(NLL) 때문에 골치 아프다'. '미국이 땅 따먹기 하려고 제멋대로 그은 선이니까 남측은 앞으로 NLL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3일 뒤인 11일에는 "해당 대화록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수도권에서 주한미군을 다 내보내겠다'고 한 발언이 들어 있다"고 추가 의혹을 제기했다. 한번 터진 의혹은 연일 또 다른 의혹들을 쏟아내고 있다.  

정문헌 NLL의혹 제기와 <조선> '북풍' 보도 

<조선일보>가 아웅산 테러 사진을 머리기사로 공개한 10월 11일자 1면에 정문헌 의원의 '노무현 NLL 포기 의혹' 제기 기사도 함께 실었다.
 <조선일보>가 아웅산 테러 사진을 머리기사로 공개한 10월 11일자 1면에 정문헌 의원의 '노무현 NLL 포기 의혹' 제기 기사도 함께 실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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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위기론'을 내세운 <조선일보>의 '북풍' 보도와 정문헌 의원의 의혹 제기는 어찌된 일인지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는 정 의원의 'NLL의혹' 제기를 연일 큼지막하게 보도하고 있다. 11일자 신문에서는 29년전 테러 사진과 정 의원의 NLL의혹 기사를 1면에 나란히 배치했다. 그러나 정문헌 의원의 의혹 제기는 의혹뿐, 기자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팩트'와는 거리가 있다. 

정 의원이 '2007 남북정상회담 비밀녹취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자마자 새누리당이 국정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타이밍이 절묘하다. 이른바 '녹취록 파문'을 대선 중심 이슈로 끌고 가고가 하는 의도가 짙게 묻어난다. 하지만 '녹취록' 실체는 여전히 미궁이다. 더욱이 '공개될 경우 국가안보, 국민경제 등의 안전을 저해하거나 정치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전직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최대 15년 동안 공개 또는 열람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영장 제시나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찬성 의결, 대통령 기록관의 기록관리 업무수행의 경우에만 열람할 수 있도록 한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정 의원에게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보여 주었을까. 설사 정 의원의 말대로 대화록이 존재한다고 해도 이런 물음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국정조사만을 들고 나선 새누리당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국정조사를 하려면 정 의원을 비롯한 현 정부의 불법행위부터 우선 조사해야 하는 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접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다 접근경로 등이 의문투성이인데도 이미 고인이 된 전직 대통령의 기록물이라며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누가 봐도 대선을 염두에 둔 국면 전환용이라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해묵은 '북풍' 카드라는 지적이 나올 법하다. 더구나 정문헌 의원은 의혹을 제기하고 나서 계속 말을 바꾸고 있다. 전형적인 '아니면 말고'식의 의혹제기가 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과거 정권유지 수단 또는 선거이슈 전환을 위한 구태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북풍' 카드, 과연 먹힐까?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12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최근 국정감사에서 밝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 NLL 관련 '영토주권 포기' 발언(남측은 앞으로 NLL 주장하지 않을 것)은 사실"이라며 '이것에 본인의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밝힌 뒤 복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정문헌 새누리당 의원이 12일 오후 국회 정론관에서 "최근 국정감사에서 밝힌 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해 NLL 관련 '영토주권 포기' 발언(남측은 앞으로 NLL 주장하지 않을 것)은 사실"이라며 '이것에 본인의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밝힌 뒤 복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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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러한 의혹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지지율이 안철수·문재인 두 후보의 상승세에 밀려 답보상태인 시점에서 나왔다. 그래서 더욱 의구심이 든다. 게다가 새누리당이 극심한 내부 갈등을 겪고 있는 와중에 나왔다. 이는 무얼 의미할까? 

'북풍'은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선거철만 되면 '지역감정'과 함께 어김 없이 등장했던 단골메뉴 중 하나다. 대부분은 보수정당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냈다. 그후 1987년 13대 대선을 불과 13일 남겨두고 터진 '대한항공 858기 공중 폭파 사건'은 대표적 케이스다. 하필 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사건은 '북한의 테러'로 결론이 나면서 보수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민주화 운동이 정국을 뒤흔든 가운데 타올랐던 수평적 정권교체 불씨도 금세 사그라지게 만든 거대한 '북풍'은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큰 승리를 안겨줬다.

14대 대선에서도 선거기간 내내 야당인 김대중 후보는 이른바 '빨갱이' 공격에 시달렸다.
1996년 15대 총선에선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다시 북풍이 불거졌다. 박격포를 동원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등 북한의 판문점 무력시위가 하필 선거를 앞두고 발생해 '안보위기'가 급부상했다. 당시에도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때마다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들은 '북풍'을 주요의제로 부각시키는데 주저하지 않고 앞장섰다.  

그러나 1997년 '총풍 사건'을 계기로 안보문제가 '조작됐을 수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북풍'은 위력을 잃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 이후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북풍'의 위력은 예전만 못해졌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북핵 위기'가 불거졌지만 야당인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당선됐다. 이어 2010년에는 '천안함 사건'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생했지만 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6·2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북풍을 이긴 역풍이 불었다"는 평가가 나왔을 정도다.

지난 4·11 총선을 앞두고도 '북한의 광명성 3호 발사'와 '서울 불바다'가 포털 검색어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북풍'이 거세게 불었지만 선거에 영향을 크게 미치지는 못했다.

더욱이 분명한 것은 새누리당과 보수신문의 'NLL 녹취록 의혹' 제기와 '북풍' 공세는 앞뒤가 뒤바뀌었다는 점이다. 새누리당과 정 의원은 의혹제기에 앞서 주장의 근거를 먼저 밝히는 게 도리다. 정 의원의 녹취록 주장에 대해 정부 관계자도 존재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전 통일부 장관, 전 국정원장, 전 청와대 안보실장도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비밀 녹취록의 존재를 전면 부인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된다. 상식적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쪽이 입증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마땅하다. 특히 폭로 당사자인 정 의원은 언제, 어디서, 누구를 통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를 봤는지 구체적으로 밝힐 책임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거짓 공세', '억지 논리'를 앞세운 해묵은 '북풍' 카드란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태그:#북풍, #안보 위기론, #정문헌의원, #조선일보,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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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패배하고, 거짓이 이겼다고 해서 정의가 불의가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의 빛과 공기가 존재하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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