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남기춘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자료사진)
 남기춘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자료사진)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정치하는 사람들에겐 침묵조차 함의(含意)의 언어다. 그래서 정치는 8할이 말과 글로 이뤄진다. 의회 의장의 영어 표현이 '스피커'(the Speaker)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경솔하고 빈약한 정치언어는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꽂힌다.

남기춘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이 14일 가진 오찬간담회에서 했던 '말'이 큰 기삿거리가 되고 있다. 남 위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 김지태씨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문제가 되고 있는 정수장학회와 관련 "후진국 같았으면 (독재자가) 자기 이름으로 하고 자기가 먹어버리면 그만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개인이 먹지 않고 공익재단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될 것 없다는 식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강도가 금은방을 털어 공익단체 하나 만들면 아무 죄가 없다. 남 위원은 법원조차 인정한 재산 강탈이라는 범죄를 문제없다는 식으로 버무린다. 기소가 전문인 검사출신답지 않다.

남 위원은 또 정수장학회의 사회환원 방안 등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총을 들이대는 자세를 취하며 "총이 있으면 옛날처럼 다시 뺏어오면 되는데"라고 했다. 이를 보도한 기자들은 '농담'이라고 감싸줬다. 군사독재가 한국 사회에 어떤 트라우마를 남겼는지 최소한의 이해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경박한 '농담'이다.

정수장학회는 널리 알려진 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 부인 육영수씨의 '수'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 때문에 박근혜 후보와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 나올 것 같다고 기자가 지적하자 남 위원은 "이름을 바꿔야죠, (안철수 후보를 연상시키는) '찰스 재단'이라고 하면 어떠냐?"고 말했다. 피의자에게조차 삼가야할 비아냥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것은 '정치쇄신'이 아니다. 

남 위원이 이 같은 막말과 비아냥 소릴 이어가자 옆에 있던 안대희 위원장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자제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안 위원장 역시 남의 옆구리 찌를 처지는 아니다. 남 위원을 새누리당에 스카우트한 이가 바로 안대희 위원장이다. 안 위원장은 2003년 대검 중앙수사부장으로 일할 때 남 위원을 중수 1과장으로 발탁했으니 누가 봐도 남 위원은 '안대희맨'이다.

지금은 '박근혜의 남자'가 된 안대희 위원장은 노무현의 참여정부에서 가장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2003년 3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을 시작으로 2004년 6월 부산고검장, 2005년 4월 서울고검장, 2006년 7월 대법관 등 노무현 정권 내내 거의 일년 단위로 영전을 했다.

정치인에게 설화(舌禍)는 낙마의 지름길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원장(자료사진)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원장(자료사진)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수사 잘하는 능력 있는 검사가 승진하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 하지만 안 위원장에게도 큰 흠결이 있다. 현대비자금 사건으로 그가 야심차게 기소했던 박지원-박주선-박광태 등 '김대중의 남자' 세 명 모두가 무죄를 받은 것이다. 현대비자금 사건은 대북송금 특검과 함께 노무현 정권이 김대중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빼어든 칼이었다. 그런데 대북송금 특검은 지지자들의 이탈 등 역풍을 맞았고, 현대비자금 사건은 주요 피의자 세 명이 모두 무죄를 받아 '정치적 기소'였다는 비판이 거셌다.

이 때문에 주임검사였던 이아무개 검사가 변호사로 전업하자 속된 표현으로 '책임지고 옷을 벗었다'는 얘기가 바로 나왔다. 또 남기춘 당시 중수 1과장이 서산지청장으로 발령난 것을 '좌천성 인사'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유독 안대희 위원장만이 일년 단위로 승승장구했다. '사시 동기(17회)이자 동향(PK)인 노무현 대통령의 편애'라는 평가가 나돌았다.

이렇게 누가 봐도 '노무현의 남자'였던 안 위원장이 대법관에서 퇴진한 지 불과 48일 만에 '박근혜의 남자'가 되었다. 안 위원장은 "정치하러 온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좌판 벌려 놓고 장사 안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누추한 발언이었다.

안 위원장은 박 후보가 국민대통합위원장으로 한광옥 전 김대중 대통령 비서실장을 임명하려하자 기자회견까지 열며 반대했다. 그는 "전향과 배신은 커다란 차이"라며 "이념적 차이에 의하여 당을 옮기는 것은 생각이 바뀌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남자'였던 안대희가 노무현의 정적이었던 '박근혜의 남자'로 간 것은 '전향'일까, '배신'일까. 새누리당과 한광옥씨가 주도했던 정통민주당과 이념적 차이는 '전향'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로 큰 것일까.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가 안 위원장을 두고 "참여정부 때 승승장구했는데, 인간적인 의리가 없다고 본다"고 한 말은 차라리 적확하다. '의리'에 관한 문제로 치부했으니 말이다.

안 위원장은 "언제나 원칙은 힘들고 어려울 때 지키라고 있는 것"이라며 "정치도 원칙을 지키는 것이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한 나라의 대법관을 지낸 이가 임기가 끝나자마자 특정 후보 캠프에 바로 합류하는 것이 어떤 '원칙'과 '기본'에 기초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삶과 함께 투영될 단어들을 정적을 제압하기 위한 즉자적 수단으로 쓰다 보니 언어의 빈곤함이 드러난다.

다만 정치하는 사람들은 내가 뱉은 말이 거꾸로 내게 '입증'의 문제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많으니 각별하게 '말 조심하라'는 당부를 드린다. 문사(文士)에게 필화(筆禍)는 영광이다. 하지만 정치인에게 설화(舌禍)는 낙마의 지름길이다. 그것이 정치다.


태그:#안대희, #남기춘, #박근혜, #문재인, #정수장학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