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소울 메이트(Soulmate)란 말이 유행했다. '태어나 오직 한 번 운명이 맺어준 사람' '마음이 통하는 친구' '당신은 내 영혼의 동반자'라고 멋있게 표현할 때 이를 쓰곤 했다. 하지만 살기 팍팍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새 마음마저 메말라버려 소울 메이트를 만나기란 천생연분을 만나는 것 만큼이나 어렵게 돼버렸다.
서울 메이트만 있고 정작 소울 메이트는 전무한 내게 책 <소울 플레이스>(Soul Place)는 그래서 눈길을 끌었다. 소울 플레이스도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책의 표지에 나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죽어도 좋을 만큼 가슴 뛰게 하는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죽고 싶은 곳'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죽어도 좋을 만큼 살아보고 싶은 곳일 터이고, 어떤 이에게는 글자 그대로 생의 끝자락을 차곡차곡 정리하기에 적합한 장소일 것이다. 혹은 닿아보지 못한 곳에 대한 미지의 동경일 수도, 그저 추억어린 고향집을 향한 지친 자의 향수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작가·요리사·영화감독·의사·사진가·건축가 등 다양한 저자 9명이 모여 '죽어도 좋을 만한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는 일 만큼이나 그들만의 소울 플레이스도 여러 가지여서 멀리는 인도의 어느 마을에서부터 종로의 부암동 동네까지 저자들의 내적이고 사적인 풍경과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들이 묘사력 때문에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동시에 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떠올려 보게 되기도 한다.
저자는 공히 우리에게 '자기만의 소울 플레이스 찾기'를 권하며, 그곳이 두 발로 디디고 설 수 있는 물리적 세계의 장소이거나, 다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미지의 공간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곳을 찾기 위해서는 지나친 부지런함 대신 때로 느직하고 게으른 마음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단다.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곳, 소울 플레이스는 또한 우리가 언제고 마음을 누일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기도 하다.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을 마음속에 두는 일, 그리고 가끔씩 그 마음속을 오가는 일은 숨 돌릴 틈 없이 돌아가는 속에서도 돌연 공허해지는 우리들 일상에 속 깊은 위로가 혹은 구원이 될 것이다. 나의 소울 플레이스는 어디일까?
내 삶을 바꿔버린 단 하나의 풍경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후회 없이 숨 쉬게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풍경을 간직했으니, 그 사나이의 탈옥은 비록 무모했으되 무용(無用)하지는 않았던 셈이다."(본문 가운데)책은 구름에 가린 산의 풍경이 보고 싶어 목숨을 걸고 탈옥을 한 아프리카 어느 교도소에서 있었던 실화로 첫 장을 시작한다. 추억 속의 영화 <부시맨>에서 주인공이 높은 절벽 위에 올라 구름을 향해 콜라병을 내던지던 마지막 장면이 그랬을까. 그 무모한 사나이가 봉우리에서 봤다는 광경이 너무도 궁금하다.
이렇게 단지 아름답고 멋진 경치를 넘어 삶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풍경이 있다. 그런 풍경과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요구하는 가짜 질서에 의문을 품게 된다. 욕망의 바벨탑으로 이뤄진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성공의 논리'와 '승리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고, 모두들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참 존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갑옷으로 무장한 채 살아간다.
이 세상이 온통 생존과 성공을 위한 싸움터라고만 여겨왔던 전사는 어느 한가롭고, 허허롭고, 그윽한 들판에서 비로소 자신이 오래도록 속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풍경 앞에서 전사는 싸움터를 등진 채 이전과는 다른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풍경이 운명을 바꾼 것이다.
아마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그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바다와 초원의 풍경을 목도하고서 학교와 사회가 심어 놓은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꾼 나 같은 이도 있겠고, 아예 그곳으로 이주를 한 사람들도 있다. 그런 풍경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참 존재와 만나게 되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반드시 만나야 할 것들을 못 만난 채 살아왔으니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정말 어떤 풍경은 보는 이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은 어디일까
"자기 앞의 삶을 다르게 보기 위한 단 하나의 질문 '나는 왜 이 행성에 왔는가?'를 던지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풍경들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 풍경들을 만나야 한다. 풍경은 자연이 준비해 놓은 만남의 표지판이며,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다."(본문 가운데)요새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가고, 또 가고 싶어한다. 멋진 여행지 사진을 보거나 영상을 보면 '와! 좋다, 가고 싶다' '이런 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 이렇듯 어떤 장소는 그곳만의 느낌이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 자신의 일생을 천천히 마무리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곳은 어떤 곳일까. 저자는 먼저 잊지 말아야 할 것으로 '우리 모두 여행자로서 이곳 지구에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풍경을 보고 일상의 삶을 대할 때 드는 뭔가 관조적이고 새로운 느낌. 경험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자기 증식을 위해 우리에게 더 많이 소유할 필요성을 끊임없이 세뇌시키고 있지만, 생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 생로병사의 순환 속에 우리는 잠시 들어왔다 나갈 뿐이라는 걸...
그런 시선을 지닌 사람만이 인생의 마무리와 성찰, 그리고 그것에 꼭 어울릴 만한 장소를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나는 왜 이 행성에 왔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무척 새로운 것이었다.
내게 책에 나오는 가장 인상적인 소울 플레이스를 꼽으라면 '마지막 나의 작은 방'이라고 답할 것이다. 책상 하나와 노트북, 꼭 읽고 싶은 책 서너 권이 놓인 내 작은 방. 영혼을 붙들어 세우는 풍경을 예상하고 한장 한장 책장을 넘기는 와중에 나타난 허를 찌르는 소울 플레이스다. 자유와 진정한 자존의 원동력이기도 한 지상의 방 한 칸을 갖기 위해 저자는 오랫동안 뒤척이고 부대꼈다 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렵게 마련된 소중한 그 방에서 평화로웠다고. '내 삶의 자리는 어떤 풍경 앞이 아니라 나만의 밀실이자 광장이었던 바로 이곳, 내 작은 방'이라는 말을 곱씹게 된다.
최종적으로 낙점된 곳이 어디든, 죽고 싶은 곳,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자신이 살아온 궤적을 거울로 비춰보고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것일까'를 반추하게 된다. <소울 플레이스>, 의미있는 고민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덧붙이는 글 | <소울 플레이스> (김별아·오소희 등 씀 | 강 | 2012.02 |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