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이 대선을 48일 앞두고 인적 쇄신을 둘러싼 계파간 신경전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문재인 대선 후보 캠프의 새로운정치위원회가 당 쇄신 방안으로 지도부 총사퇴를 요구하기로 하고 김한길 최고위원이 1일 사퇴하면서 수면 아래서 잠복하고 있던 '이해찬-박지원 퇴진론'이 다시 전면에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찬-박지원 퇴진' 등 지도부 사퇴론은 당내 비주류 측에서 끊임없이 주장해왔다는 점에서 민주당이 대선을 앞두고 내분에 휩싸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조기에 내부 갈등을 수습하지 못할 경우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단일화는 물론 본선 준비까지 차질을 빚을 수 있어 문재인 후보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최고위원 사퇴, 압박수위 높인 김한길... 새정치위, 기자회견 취소
비주류 좌장격인 김한길 최고위원이 사퇴 뜻을 밝힌 후 민주당의 분위기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박영선 공동선대위원장, 우윤근·김현미 의원 등 문 후보 캠프 핵심 관계자들은 김 최고위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찾았다. 민주당 쇄신 방안 등에 의견을 나눈 이들은 김 최고위원의 사퇴를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선 위원장은 이후 한 차례 더 김 의원의 사무실을 찾아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김 최고위원은 "안철수 후보나 그 지지자들이 봤을 때 '와' 하고 놀랄 정도로 민주당의 강력한 쇄신 의지를 보여줘야 단일화 경쟁은 물론 대선 본선에서도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며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에 대한 압박 수위를 더 높혔다. 김 최고위원은 6·9 전당대회 당시 '이해찬-박지원 담합론'을 제기하며 이해찬 대표와 강하게 대립한 바 있다.
새정치위원회는 이날 오후 지도부 퇴진론을 공식 제기할 계획이었지만 논란이 커지자 기자회견을 취소하기도 했다.
김 최고위원이나 새정치위원회는 문 후보가 추진하고 있는 정치쇄신과 민주당 혁신이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지도부 퇴진 등 인물 교체로 뒷받침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난 21일 친노 핵심 참모 9명의 선대위 퇴진으로는 민주당의 변화 의지를 보여주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인적 쇄신을 핵심은 실무자급이 아니라 결국 당 대표 등 지도부가 대상이 돼야한다는 지적도 당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퇴진 압박에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해찬 대표는 이날 오후 열린 의원총회에서 "모든 힘을 다 합쳐야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 무엇을 탓하고 그럴 상황이 아니다"라며 사퇴를 거부했다. 이 대표는 "김한길 최고위원의 사퇴 보도가 있는데 정말 그러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사퇴 철회를 주문하기도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도 "지금은 대선 승리에 전념할 때이지 내분의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다"라며 "저는 이미 선대위에 개입하지 않고 원내대책에 전념하고 있다, 내일부터 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지방 순회 일정을 마련하고 지원활동에 나설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물러나라니 비참"... 당 내부와 외부 인적쇄신론 온도차
지도부 총사퇴론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 지도부가 이미 최고위원회의 권한을 문 후보에게 넘기고 사실상 2선으로 후퇴한 상황인데다 이해찬 대표는 충청에서 박지원 원내대표는 호남에서 후방 지원 역할을 하겠다고 한 이상 지도부 총사퇴론은 당내 분란만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강기정 최고위원은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모든 권한을 선대위에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서 바닥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데 또 물러나라고 하니 비참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뭘 어떻게 더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문 후보도 이날 강원도 고성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연 기자간담회에서 "민주당 쇄신이라는 게 지도부의 퇴진만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라며 "지금 이해찬-박지원 대표는 선대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최고위원회 권한도 전부 후보인 나에게 위임됐다"고 지도부 퇴진론에 선을 그었다. 앞서 문 후보는 "인적 쇄신은 본질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문 후보 선대위 핵심인사는 "대선을 40여일 앞둔 지금 당장 지역으로 내려가서 총력을 다해 열심히 뛸 때"라며 "여의도에서 소모적인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다"고 인적쇄신론을 일축했다.
하지만 당내 비주류 측뿐 아니라 당 외부인사들의 인식은 다르다. 일반 국민들, 특히 호남에서 민주당의 강력한 인적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당 외부 인사로 문 후보의 시민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한 핵심인사는 "지역을 돌아다녀보면 대선 후보 문재인과 참여정부 실세 총리였던 이해찬의 조합은 좋은 그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며 "친노 인사들이 모인 캠프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분위기가 싸늘해지더라"고 말했다.
새로운정치위원회 내부에서도 당내 인사보다는 당 외부에서 참여한 위원들이 지도부 총사퇴론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주류 측의 한 중진의원은 "문 후보가 온정주의를 넘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은 비상상황"이라며 "당 화합을 위해 문 후보가 과감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시험대 오른 문재인 리더십... 당 분란 조기 수습 과제
친노 핵심 참모 퇴진 이후 임시 봉합됐던 추가 인적 쇄신 논란은 새로운정치위원회, 국민대토론회를 통해 민주당 쇄신방안을 마련했던 시민캠프의 지도부 총사퇴 요구와 김한길 최고위원의 선도 퇴진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됐다.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당 안팎의 인적쇄신 요구를 마냥 뭉개고 가기에는 문 후보가 져야할 부담이 만만치 않다. 인적 쇄신의 핵심인 이해찬-박지원 대표의 자진 사퇴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 후보는 이날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맡겨 주고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적 쇄신 논란이 소모적인 당내 논쟁이나 권력 다툼으로 비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전달한 것이다.
우상호 공보단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문 후보가 새로운정치위, 시민캠프 등 당의 쇄신 의지를 과감하게 보여달라는 요청의 취지를 잘 알겠다고 한 것"이라며 "당 내부에서 단일화와 대선 본선을 앞두고 더 이상의 논쟁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 단장은 "후보가 시간을 달라, 맡겨달라고 했으니 조만간 후보가 입장을 정리해 내놓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박 원내대표는 사퇴를 거부하면서 "모든 것은 후보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문 후보도 자신에게 맡겨달라는 입장을 밝힌 터라 이제 선택은 문 후보의 몫으로 온전히 남게 됐다. 문 후보로서는 전당대회 당시부터 불거진 '이-박 담합론'에 대한 뿌리깊은 비주류의 불신 해소 및 당 분란의 조기 수습이라는 쉽지 않은 과제를 안게 된 셈이다.
장고에 들어간 문 후보의 선택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