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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의 앞부분이다. 우리는 이 시를 불의한 시대에 저항하는 시라고 했다. 시위 현장에서, 뒷골목 막걸리 집에서, 그리고 축제 때도 우리는 이 시를 노래로 만들어 신명 나게 불렀다. 나는 지금도 옛 동지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목청껏 불러 본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돼서인지는 몰라도 30여 년 전과 같은 감정으로 부르지는 못하지만.

김지하는 1970~80년대 의식 있는 청년 학도들의 우상이었다. 그의 삶이 그랬다. 그는 <오적>(五敵)이라는 시를 월간 <사상계>에 발표해 영어의 몸이 됐다. 감옥에서도 그의 저항은 그칠 줄 몰랐다. 군사독재의 철권이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의 양심을 붙들 수는 없었다. 그의 구속에 세계의 양심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시 그는 시국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따라서 사회 운동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진보운동의 우상이었던 그, 변했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김지하 선생 초청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지난 26일 오후 서울 명동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김지하 선생 초청 시국강연회'가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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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 군사 정권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뜻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의 군사 정권을 용인할 수 없다며 직선제를 외치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즈음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이 분신과 투신으로 불의한 정권에 항의하고 있었다. 그때 김지하는 뜬금없이, 예상과는 전혀 달리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때려치워라'라는 글을 기고해 분신 시국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를 잊고 지냈다. 정말 김지하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됐다. 하지만 26일 인터넷으로 접한 뉴스에 적잖아 실망했다. 김지하가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보수단체 강연에서 '여자가 대통령이 될 때가 됐다'며 지지 의사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누굴 지지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사회에 일정 부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대개 이런 이들은 자신이 과거 걸어온 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택으로 대중을 마주하게 된다. 김지하는 한 때 진보운동에 있어서 우상이 됐던 이 아니었는가. 그런 그가 어떻게 극우 보수 정당의 대선후보를 지지할 수 있는 것인가.

내 서재에는 아직도 김지하의 책 몇 권이 꽂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 비평사)를 비롯해 일본에서 출판된 <不歸(불귀)>와 <김지하는 누구인가>가 바로 그것들이다. 국내에서는 그의 책 출판을 허락하지 않아 이웃 일본에서 몰래 출간한 서적이 앞에 언급한 두 책이다. 두 권 모두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가 펴낸 것으로 돼 있다.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나온 게 아니라 종교단체에서 비공식적으로 출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항시인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간 것일까

엄혹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 국내에서는 김지하의 책을 출판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종교단체에서 그의 글을 모아 <不歸>(불귀)라는 제목을 달아 출판해 준 책이다(왼쪽). 한편, 책 <김지하는 누구인가>는 1979년에 일본에서 풀판된 김지하의 옥중 투쟁의 기록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민중을 위한 그의 고뇌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노년 변절할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쉽다.
 엄혹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 국내에서는 김지하의 책을 출판할 수가 없었다. 일본의 종교단체에서 그의 글을 모아 <不歸>(불귀)라는 제목을 달아 출판해 준 책이다(왼쪽). 한편, 책 <김지하는 누구인가>는 1979년에 일본에서 풀판된 김지하의 옥중 투쟁의 기록이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민중을 위한 그의 고뇌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노년 변절할 그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다. 아쉽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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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세상에 나온 <불귀>에는 '김지하 작품집'이라는 부제(副題)가 달려 있다. 이 책에는 그 유명한 김지하의 양심선언, 출옥 직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苦行(고행)... 1974' 외에 저항시로 회자되던 <오적> <비어> 등의 작품이 실려있다. 그리고 일본 평론가들이 김지하의 시에 대해 해설해 놓은 글들이 첨부돼 있다.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위원회 회장은 김지하에 대해서 이런 평을 내린 바 있다. "이러한 시인의 정의를 위한 영웅적인 증명에 대해 전 세계에서 공감과 지원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이 당시 그를 보는 일반적 시각이었다.

나는 이 책에 실려 있는 그의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사람의 의식이라는 게 이렇게도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거의 김지하는 무엇인가, 내게도 이런 속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지목한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말한다. 재벌을 오적의 하나로 지목했으면서도 재벌을 비호하는 대통령 후보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지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행동이 아닐까.

<김지하는 누구인가>에는 '그 옥중 투쟁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오랜 기간에 걸친 그의 재판 기록이 투쟁적 언어로 영글어져 있다. 그리고 검찰 측에서 증인으로 신청한 손정박과 신상초의 증언이 있고,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김승옥과 문정현·함세웅 신부 등의 증언도 첨부돼 있다. 시인 구상과 소설가 선우휘의 소견서는 추구하는 세계관과 삶의 방식은 다르지만 한 시인을 석방시키려는 간곡한 호소가 들어있는 글이어서 눈시울이 붉힐 만했다.

김지하, 그는 한때 올곧은 행동주의자였다

이 책에는 저항 시인 김지하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시뿐만 아니라 그의 철학과 삶의 태도, 그리고 그가 지향하는 미래까지 담겨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참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일신을 던진 투사의 면모를 충실히 보여줬다. 그런 김지하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과거의 김지하와 지금의 김지하가 왜 이렇게도 다른 것일까. 글을 읽는 내내 보수 여당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출마한 독재자의 딸을 지지하고 나선 김지하를 생각하면서 그의 과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사람은 변해도 시는 그대로 남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는 사람의 생각과 삶의 총체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또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따라 시의 내용과 방향이 다르게 조명돼야 한다. 그렇다면 변절한 김지하의 시는 없다. 다 날아가 버렸다. 이젠 노회한 시인을 참칭하는 사람만 있되 그가 과거에 쓴 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 김지하. 참으로 애석하고 가련하다. 시대의 풍운아여.


태그:#김지하, #저항시인, #박근혜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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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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