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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금산 정상에서 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풍경
▲ 남해 금산 정상에서 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풍경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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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만 되면 더욱 심해지는 이놈의 지랄맞은 역마살이 또 시작인 모양이다. '연말에 설악산도 갈 텐데 참아 보자 조금만 더 참아 보자' 그래본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나는 안다. 책꽂이를 훑다가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친정엄마에게 일주일만 다녀오겠다 부탁을 하고 금산 보리암으로 가는 대략의 교통편을 알아보고 배낭을 꾸렸다. 보리암에서는 템플스테이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에 산 아래의 민박을 알아보기로 했다.

추위를 유독 심하게 타면서도 알싸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나서는 길이 싫지만은 않다. 금산 보리암까지의 길이 먼 줄은 알지만 차편마저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일주일의 시간이 있는데 좀 멀면 어떠랴 괜찮다. 진주를 경유해 남해에 도착했다. 금산 보리암으로 가는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하루 세 번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늦은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기로 했다.

식당의 앉은 자리 뒤편에 홀로 식사를 하던 노신사분이 보리암으로 가는 차편을 알아보는 모양이다. 보리암까지 다음 버스 시간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택시비를 알아보니 2만 원이면 절 입구까지 간다고 한다. 택시비 부담도 덜어낼 겸 동행하자 제안을 하니 흔쾌히 수락한다. 식사를 마친 노신사는 잠시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하고 자리를 떴다. 복장을 갈아입고 나타난 노신사는 스님이다. 택시비는 내 몫이구나 싶어 반반부담의 횡재에 대한 기대는 조용히 접었다.

이동하는 택시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니 절에서 머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기도하기 위해 머물기를 요청하면 1박 2일에 만 원으로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보다 큰 횡재가 없다.

하지만 절대로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보통의 사찰들은 하루 네 번의 예불시간을 준수한다. 이른 새벽에 진행하는 새벽예불과 오전의 사시예불 그리고 오후예불 저녁 공양 후의 저녁예불이 끝이지만 보리암은 밤 열한 시에 진행하는 철야기도까지 다섯 번의 예불이 진행된다. 예불시간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되도록 저녁예불까지는 지켜야 한다. 또한 공양간의 일손이 부족한 경우엔 거들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절에 도착해 종무소에 등록을 마치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숙소는 공양간 건물에 있어 방문을 열면 공양간의 식사를 하는 공간과 연결된다. 하필 절에 도착한 날이 동지(冬至) 전날이다. 공양간은 팥죽에 넣을 새알심을 만드는 일로 분주하다.

"보살님 와서 좀 거드세요."

따뜻한 잠자리와 세끼의 식사를 제공받기로 했으니 밥값은 해야 한다. 연세가 지긋하신 비구니스님부터 파르라니 깎은 머리가 눈물겹도록 젊은 비구니스님까지 여러 분의 스님이 계셨다. 중년의 나이로 보이시는 한 분의 스님은 묵언중인지 손짓으로만 의사전달을 하셨다. 신도들로 보이는 여자 분들도 제법 모여 앉아있다.

팥죽에 넣을 새알심은 쌀가루를 반죽해 구슬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만든다. 두세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사람은 적당한 크기로 뚝뚝 떼어놓으면 나머지 사람이 그것을 동그랗게 굴려 새알심을 만든다. 나는 반죽을 떼어놓는 일을 맡고 두 분의 스님은 동그랗게 만드는 일을 하셨다.

한 분의 스님이 오셔서 곁에 앉으시자 난 손이 빨라져야 했고, 다시 한 분의 스님이 더 오시자 나는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다른 분들을 둘러보니 다들 조용하고 여유롭다. 나만 바쁘고 급하다. 그렇다고 다른 자리로 가시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쟁반가득 새알심을 만들어 몇 번이고 주방으로 보내도 흰쌀가루 반죽은 끝도 없이 날라져온다. 이쯤 되면 오히려 내가 만원을 받아야 할 판이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잠시 절을 둘러보려 밖으로 나갔다. 산 전체가 바위산으로 불리는 금산에 위치한 보리암은 벼랑 위에 자리 잡은 탓에 해풍을 그대로 받는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먹구름이 함께 하늘을 가린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더니 비가 오기는 올 모양이다. 저녁예불이 진행 중인 법당에 잠시 들러 간단히 예의만을 갖춘 후 잠시 눈이라도 붙일 생각으로 방에 누웠다.

"보살님 저녁예불 안 하시면 새알심 좀 와서 만드세요."

도대체 팥죽을 얼마나 많이 만들 길래 또란 말인가.

밤이 깊어지면서 잠자리가 바뀐 탓도 있겠지만 바람이 센지 미닫이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얼마나 잤으려나 새벽예불 시간에 맞춰 법당으로 가려니 비바람에 진눈개비까지 내린다. 보리암의 일출과 일몰을 보기는 힘들 모양이다.

아무리 동지라지만 아침 점심 저녁 하물며 중간 간식도 팥죽이다. 공양간의 안쪽을 보니 욕조만한 다라에 팥죽이 가득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기온이 내려가면서 밤새 내린 진눈개비로 길이 얼어붙어 차량통행이 어렵게 됐다고 한다. 대중교통과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겨 팥죽은 고스란히 절 안의 사람들 몫이 되었다.

기도가 목적이 아니었으니 그만 절을 내려가고 싶어졌다. 절을 내려가려면 한 시간 이상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내려 가야하는데 내겐 우산도 없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비바람은 멈출 줄 모르고 돌 속에 나를 가뒀다. 나는 꼼짝없이 남해 금산의 돌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 첫 구절이 떠올랐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금산 보리암에서 본 일출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바라본 다도해의 일출
▲ 금산 보리암에서 본 일출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바라본 다도해의 일출
ⓒ 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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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이 되자 사방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 안에서 지내는 일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절에 머물 때면 108배를 하곤 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천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번에 나눠서 250번씩 하면 절을 벗어나는 네 번째 날 새벽예불 시간까지 천배를 모두 마칠 수 있으리라 계산을 했다.

500번이 넘고서야 무모함에 홀로 웃었다. 600번이 넘어가면서부터 두통이 오고 구토가 나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서 850번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기절하듯 누웠지만 잠은커녕 다리의 통증으로 새벽까지 앓았다.

네 번째 날을 맞고 밖으로 나와 하늘을 보니 검은 새벽하늘에 유난히 새벽별이 밝다.

'오늘은 보리암의 일출을 볼 수 있겠구나.'

강제노역장이라도 끌려가는 사람마냥 아픈 다리를 끌며 법당으로 가서 천배를 마쳤다. 벌을 모두 마친 것 마냥 다리만 아플 뿐 아무런 감흥이 없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잠시 누워 쉰다는 것이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해는 이미 바다를 붉게 내리비추고 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인 다도해의 풍경은 붉은 빛을 받아 더욱 빛나고 있다. 다도해의 아름다움도 잠시 '오늘은 여기를 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비바람으로 꼼짝없이 절에 갇혔던 나흘 동안 식사시간마다 밥통 옆에는 동지에 먹다 남은 팥죽이 늘 함께 자리했다. 오래도록 가보고 싶던 금산의 보리암이 벗어나고 싶은 곳이 되리라 생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돌 속에 갇혀 지낸 며칠의 시간을 뒤로 하고 순천의 선암사로 향했다. 절로 가는 동안 신검당에 홀로 누워 편히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러 공양간으로 갔다. 몇 년째 자주 절을 찾는 덕분에 친분이 두터운 스님들이 제법 계신다. 공양간 일을 보시던 스님이 내게만 특별히 보너스로 뭘 더 주신다며 그릇을 하나 내미신다. 팥죽이다. 동지 날에 먹고 조금 남았는데 내게만 특별히 주신단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머묾이 있는 풍경> http://blog.daum.net/imusici12/15126902



#보리암#동지팥죽#남해금산#금산보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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