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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변에 2층 짜리 컨테이너 집을 짓고 귀농한 어느 할머니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사진과 이름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혀 기사의 주인공을 단순히 '할머니'로 표기했다. - 기자말  

 2층 구조의 컨테이너 주택, 이 집에 사는 어느 할머니의 슬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2층 구조의 컨테이너 주택, 이 집에 사는 어느 할머니의 슬픈 이야기를 소개한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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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원천리 호수길 276번지에 있는 2층 구조의 작은집. 내가 이 집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년 전이다. 컨테이너를 쌓아서 주택공사를 하는 현장을 우연히 봤기 때문이다.

지난 3월 3일 "어떤 형태의 컨테이너 주택이 완성 되었을까"라는 생각으로 그곳을 다시 찾았다.

"강원도 화천이 원래 좀 추운 곳이잖아요. 또 컨테이너는 철재다 보니 난방이 필요할 것 같아 벽면에는 스치로폼 대신 왕겨를 넣었어요. 원래 볏짚이 온기가 있습니다."

컨테이너 집의 외벽은 목재로 마감해서인지 어디를 봐도 철재 컨테이너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구조다.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는 내게 주인인 듯한 한 할머니가 설명을 해 준다.

2층짜리 컨테이너,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버려진 컨테이너가 아름다운 주택으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데 놀랐다.
 이렇게 버려진 컨테이너가 아름다운 주택으로 탈바꿈 할 수 있다는데 놀랐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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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죠? 귀농 하셨나 봐요?"
"귀농?... 그런 셈이죠."

요즘 귀농이 트랜드다. 초보 귀농인들에게 귀농을 하게 된 이유를 물으면 멋진 전원생활과 시골에서의 희망찬 설계를 말한다. 그런데 할머니에겐 사연이 있었다.

"어쩌면 평생을 살 집인데, 다른 사람에게 공사를 맡기는 것보다 직접 집을 지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손쉬운 방법으로 컨테이너 3층집을 짓기로 하고 내부 구조는 어떤 식으로 꾸며야 할지 수십 장의 종이에 그림도 숱하게 그렸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이곳 화천으로 이사를 오기 전, 할머니는 3층짜리 컨테이너 집을 짓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컨테이너 집은 건축법상 2층 이상은 불가능하단다. 급작스럽게 2층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말이 좋아 설계지, 정해진 규격의 컨테이너 내부를 어떻게 꾸밀지에 대한 그림을 말하는 거다.

컨테이너 4개를 2층 구조로 쌓아 1층에는 원룸과 주방을 만들고 강이 내려다보이는 2층은 거실과 안방으로 꾸몄다. 서울에 사는 아들과 딸이 손자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았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근사한 강변풍경을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컨테이너 주택 2층의 거실. 북한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구조다.
 컨테이너 주택 2층의 거실. 북한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한 구조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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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가을엔 비가 참 많이 내렸다. 거동이 불편하신 영감님(67)을 임시로 설치한 텐트에 모셔두고 할머니는 인부들과 설계도(그림)를 펼쳐 놓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 컨테이너 집을 구상했던 것은 '건축이 빠르고, 바깥 외벽 마감제 작업도 손수 할 수 있고 건축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면서 내부 인터리어를 자처하고 나선 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덕분에 공사는 빨리 끝났는데, 그놈의 전기나 건축허가가 늦게 떨어져 2011년 11월까지 몸이 불편한 남편을 모시고 텐트생활을 해야 했어요."

"그래도 어쨌든 집을 직접 지은 보람은 있으셨잖습니까! 컨테이너 집을 계획하고 계신 귀농 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말씀 좀 해 주시죠?"

순간 할머니 표정을 보고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시골에 기와집을 짓고 사는 게 꿈이었습니다

"15년 전만 해도 우리 내외는 부부교사였어요. 나는 도심지 어느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우리 영감님은 철원 민통선 내에 있는 어느 작은 초등학교 교사로 있었지요."

그러나 어느날 영감님이 현기증에 혈압이 오르는 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은 초등학교에서 근무를 하다보니,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병원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 영감님은 때때로 온몸이 저려오는 통증이 느껴져도 '별것 아니겠거니' 하면서 참았단다. 몇 달만 있으면 방학인데, 그때에 대도시에 나가 진료를 받으면 쉽게 나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학을 맞아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는 기억력까지 쇠퇴하는 증세도 나타났다. 개학한 뒤에도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약국에서 지어온 약에 의지해 전방 산골마을 아이들과의 학교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급기야 아이들의 이름과 초롱초롱하던 눈망울도 기억이 나지 않기 시작하더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심한 손 떨림으로 글을 쓸 수 없는 형편이 되어서야 남편은 다시 병원을 찾았다.

"진즉에 손을 썼으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실 완치라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미련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집착한 결과 중병을 얻은 것이다. 결국 할머니의 남편은 50대 중반도 되지 않은 나이에 명예퇴직을 해야 했다. 두 부부는 평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꿈이었다. 남편이 그렇게 된 뒤 병수발을 해야 하는 할머니의 퇴직도 불가피했다. 두 부부가 평생을 벌어 아이들 교육시키고, 노후를 위해 마련해 놓은 재산은 한달에 100만 원이 넘는 병원비로 모두 다 탕진했다.

"혹시 고엽제 원인이 아닌지 진단해 보셨어요?"

남편과 친분이 있었던 어느 분이 느닷없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남편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은 이미 40년이 지난일이다. 그리고 남편은 월남전에서 전투병이 아닌 사무병으로 근무를 했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고엽제라니... 할머니는 돈이 다 떨어진 터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보훈처를 찾았고 고엽제 후유증이란 판정을 받았다. 진즉에 알았으면 그 많은 돈을 병원비로 날리진 않았을 텐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지금에 와서라도 (국가에서 지원해 주기 때문에)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때 문득 할머니는 "공기 좋은 산골마을에 집을 짓고, 손수 간호를 하다보면 남편이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시골에 집을 짓는 구상을 하고 도심에서의 생활을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녀의 남편 회복에 대한 강한 신념 때문이었을까. 이곳으로 오고나서 할아버지는 윗마을까지 아주 천천히 다녀올 정도로 회복을 했단다.

"기자님의 말처럼 여기 찾아오는 다수의 사람들이 컨테이너를 이용해 손수 집을 짓는 낭만을 말하는데, 솔직히 (컨테이너가 아닌) 멋진 기와집을 짓고 전원생활을 하는 게 꿈이었어요.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사실 내가 이 집을 취재하기로 한 것은 컨테이너 집을 짓게 되면 그에 따른 재정적 부담이 덜어지게 될 테고, 그 배경을 귀농을 꿈꾸는 도시민들에게 이야기 하고 싶었다. 또 그에 따른 장단점도 듣고 싶었다.

그런데 괜한 여러 가지 질문으로 할머니의 심기만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 나오는데, 할머님께서 한 말씀 하신다.

"남편과 내 이름을 밝히지 않아서 미안해요.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이 사실 너무 많아요. 그분들에게 또 다른 부담을 안기게 될까봐..."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기자는 강원도 화천군청 관광기획 담당입니다.



#컨테이너주택#북한강변#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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