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660년에 백제가 신라·당나라 연합군(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는 사실 때문에 '7세기 초중반의 백제는 어차피 망할 수밖에 없는 약소국이었을 것'이란 느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 점과 관련하여, 지난 2월 23일 방영된 KBS <대왕의 꿈> 제38부를 음미해볼 만하다. 제38부에서는, 백제군의 침공으로 딸과 사위를 사별한 김춘추가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찾아가서 군사동맹을 제의하는 장면이 나왔다. 드라마 속의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기를 꺾고자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네 놈이 고구려 군사를 청해 백제를 쳐서… 여식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으려는 속내를 (갖고 있음을) 내 모를 줄 알았느냐?"드라마 속의 김춘추는 호탕하게 한바탕 웃은 뒤,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여식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기 위해 백제를 치려고 마음먹었다면, 김유신 휘하의 철기병만으로도 충분히 사비성(백제 수도)을 무너뜨릴 수 있었을 것이오. 고구려의 군사를 빌려 당나라 황제를 치면 모를까, 내 고작 백제 따위를 치려고 목숨을 걸고 고구려 땅을 밟았겠습니까?"드라마 속 김춘추의 답변은 한마디로 "당나라를 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하면 모를까,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는 백제를 치기 위해 고구려와 동맹하려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편에 따르면, 실제의 김춘추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지금 백제가 도리를 어기고 뱀과 돼지처럼 우리 영토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저희 임금은 대국의 군대를 얻어 이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이에 따르면, 실제의 김춘추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백제를 치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 혼자서는 백제를 상대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외교관의 발언에는 허장성세가 어느 정도 들어가기 마련이지만, 만약 김춘추가 <대왕의 꿈> 제38부에서처럼 발언했다면 그는 국제적으로 '허풍쟁이'가 됐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국제적으로 신용을 잃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가 신라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 누가 보더라도 신라는 백제한테 '한 주먹 거리'도 안 됐기 때문이다.
멸망 직전까지 '절대적 우위' 보인 백제의 군사력
백제의 절대적 우위는 백제 역사의 초·중기뿐만 아니라 말기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백제 최후의 왕인 의자왕은 집권 이듬해인 642년에 신라의 40여 성(城)을 불과 한 달 만에 점령했다. 멸망 5년 전인 655년에도 그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하여 고작 한 달 만에 신라의 성을 30여 개나 점령했다. 그가 19년간 빼앗은 신라의 성은 근 100개나 된다.
일반적으로 읍 단위에 세워지는 성 하나를 빼앗으면, 읍 주변의 지역들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주변의 면(面)들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근 100개의 성을 빼앗았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근 100개의 읍에 더해 300~400개의 면까지 얻었다는 뜻이 된다. 이처럼 멸망 직전까지도 백제 군사력은 절대적 우위를 과시했다.
특이한 것은 이 시기에 신라 김유신 부대만큼은 승승장구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백제가 우세를 유지하는 속에서도 유독 이 부대만큼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 본기'나 '김유신 열전'을 살펴보면, 김유신의 승리가 전투력이나 무기 체계의 승리라기보다는 심리전의 승리였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유신은 부하들의 사기를 극대화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백제·고구려를 무서워하는 장병들의 용기를 북돋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죽기 살기로 싸웠고, 이것이 신라군의 승리를 이끈 핵심 요인이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하면, 신라군은 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백제 군사력이 우세했다는 점은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도 확인된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가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벌어진 사실 자체가 이 점을 반영한다. 멸망 직전에 백제 조정의 야당인 성충파는 동부전선 최전방인 탄현(대전 동부 식장산 고개)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자고 제안했지만, 여당인 임자파는 신라군을 후방으로 끌어들여 한 번에 일망타진하자고 제안했다.
의자왕은 '최전방에서 방어하면 전쟁이 장기화될 위험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임자파의 의견대로 신라군을 안쪽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탄현보다 훨씬 더 후방인 황산벌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백제는 자기 집 담에서 신라군을 방어하지 않고 일부러 마당까지 신라군을 끌어들인 셈이다. 신라군을 마당에 가둬 놓고 한 번에 일망타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백제가 신라군을 얼마나 가벼이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산벌 전투의 전개 양상에서도 이 점을 포착할 수 있다. 당시 백제군은 고작 5000명이고 신라군은 무려 5만 명이었다. 그런데도 백제군은 제1라운드에서 제4라운드까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5000명이 5만 명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둔 것은, 신라군 속에 비전투 병력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백제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가 역전승을 거둔 것은 군사력 때문이 아니었다. 소년 화랑인 반굴과 관창의 영웅적인 죽음을 목격한 김유신 부대가 죽기 살기로 달려든 것이 분위기 역전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런 돌발 변수가 없었다면, 제5라운드에서도 백제군이 승리하고 신라군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부전선의 당나라 군대 역시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졌을 것이다.
김춘추의 호언장담, 그야말로 대왕의 '꿈'일 뿐
"백제군 5000명이 신라군 5만 명을 4번이나 격파한 것은, 백제군이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든 결사대였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사사(死士) 즉 '결사대'란 표현은 너무나도 생뚱맞은 표현이다.
신라군을 무시한 백제군은 일부러 최전방을 열어주고 신라군을 황산벌까지 끌어들였다. 따라서 백제가 멸망을 예감하고 결사대를 파견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결사대란 용어는 백제 멸망의 당위성을 주입하고자 <삼국사기> 필진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도 신라에 대해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나당연합군의 협공을 받는 중에 황산벌 전투에서 의외의 돌발변수가 나타났기 때문에 백제가 멸망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만약 백제와 신라가 단둘이 맞붙었다면, 설령 황산벌에서 백제가 패했더라도 나머지 전투에서는 백제가 분위기를 뒤집었을 공산이 크다. 황산벌에 파견된 5000명이 백제군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협공을 받지 않았다면 백제군은 황산벌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을 파견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제2·제3의 반굴·관창이 신라군의 사기를 높인다 해도 신라군이 승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대왕의 꿈>의 김춘추는 '백제는 한 주먹 거리도 안 되므로, 신라 혼자서도 충분히 멸망시킬 수 있다'는 식으로 호언장담했지만,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두 주먹 아니 세 주먹으로도 백제를 이길 수 없었다. 신라 혼자서도 백제를 상대할 수 있다는 김춘추의 호언장담은 그야말로 대왕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