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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수업/이혁규/교육공동체 벗
▲ 책표지 수업/이혁규/교육공동체 벗
ⓒ 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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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학교 풍경은 신산스럽기 짝이 없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을씨년스런 날씨 탓도 있지만, 학생들을 맞이하는 교사들의 냉랭한 태도가 더 문제다. '3월에 아이들을 잡아야 1년이 편하다'는 말은 학교사회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러다보니, 3월의 학교는 마치 '아이들에게 친절한 교사 되지 않기' 캠페인이라도 벌이는 듯하다. 물론 그런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는 교사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불행하게도 극소수다. 게다가 그 물정모르는 소수의 교사들은 학교 관리자에게 무능교사로 찍히기 십상이다. 

왜 학생들에게 친절한 교사가 학교에서 외려 푸대접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교육의 한 주체이기도 한 학생들은 왜 교사가 잡아야할 대상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해마다 이런 일들이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일까?

이혁규의 <수업>(교육공동체 벗)을 읽다 보면 그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습속이 지니는 무서운 보수성' 때문이라고 저자는  일갈한다.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보는 시선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시선이 왜 필요하고 중요할까? 우리들 대부분이 낡은 습속의 늪에 안주하면서 구질서를 재생산하고 있음을 간파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행동은 반성과 성찰보다는 어릴 때부터 몸에 내면화된 습속의 지배를 너무 많이 받는다. 문제는 습속의 힘이 너무 근본적이어서 그런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9쪽)

낡은 습속을 넘어서-우리 교실 들여다 보기

그의 '낯설게 보기'의 첫 대상은 교실이다. "교사들은 수업을 하면서 자신의 수업 행위에 대해서 이런저런 반성을 한다. 하지만 이런 반성이 교실의 시공간의 문제에까지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학생들의 요구나 동기와는 상관없이 40~50분 단위로 교과를 배우도록 설계된 시간 운영의 문제가 반성의 소재로 등장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것은 교사의 현실로 간주된다"라고 지적한다.        

'네모난 교실' 혹은 '네모난 시간표'는 교사들에게나 학생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닐 터다. 결국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서 고안해낸 것일 뿐. 저자는 시간표에 의해서 관할되는 학교의 리듬 또한 근대적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얘기다. 그럼에도 교사들에게 그것이 불변의 현실로 간주되어온 것은 앞에서 언급한 '습속의 힘' 때문이다. 무섭지 아니한가? 그는 이렇게 권면한다.        

왜 교실에서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학생들을 제자리에 앉혀두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 왜 교실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고 경험했는지를 묻는 대신에 정해진 시간 내에 수업을 마쳤는지를 더 중시하는지를 성찰해보는 것. 질서와 통제와 훈육과 표준화 대신에 학습과 소통과 성장과 다양성을 더 중시하는 교실의 시공간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 그런 물음과 성찰과 고민들이 배움과 학습의 위기를 노정하고 있는 근대 교육을 전복할 수 있는, 파괴적인 동시에 창조적인 열림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28쪽)

수업의 출현과 교사의 탄생...교사, 가르치는 존재로서의 성찰

이 책에는 수업의 기원에 관한 흥미 있는 일화가 소개된다. 독일의 교육학자 쉰켈의 <수업 현상학>에 나오는 이야기를 저자가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신석기시대쯤일까? 거기에 활 만드는 기술을 거의 예술의 경기까지 심화시킨 활 제작자가 한 사람 살고 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활 제작 기술을 배우고 싶어서 찾아온다. 처음에는 귀찮아서 소년을 쫓아버렸던 활 제작자는 계속 찾아오는 소년의 열정에 감동받아 어느 순간 활 제작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수업 현상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활 제작자는 활을 제작하는 동안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새로운 고민과 관심거리에 직면하게 된다. 이제 그는 활 만드는 기술의 진보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소년을 더 잘 가르칠 것인가 하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된다.(33쪽)

이 일화에서 저자는 수업이 발생하는 최초의 상황에서 활 제작 기술을 배우려고 먼저 시도한 쪽이 아동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오늘날 학생들은 교사를 스스로 선택하지 않는다. 배워야 할 내용이 가르치는 존재 속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에서 인격성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점들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로만 간주될 때 교육의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를 다른 전문직과 같이 기능적으로 분화된 역할 수행자로 자리매김하는 바로 그 순간에 교육의 위기가 배태된다. 가르치는 행위를 가르치는 존재의 인격성과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이제 교사의 몸과 품성으로부터 배우는 교육의 전통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근대교육의 위기는 본질적으로 여기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38쪽)

스승에서 교사로, 교사에서 로봇으로 이어지는 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근대 교육의 불안한 묵시록을 접하게 된다. (40쪽)

이에 대한 해법의 하나로, 그가 프랑스 교육학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서 소개한  조세프 자코트의 예를 든 것은 퍽 인상적이다. 정치적인 상황으로 네덜란드로 망명한 자코트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런데 자코트 자신은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한 권의 프랑스-네덜란드 대역판만으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무지한 스승은 도대체 어떻게 학생들에게 성공적인 학습이 일어나도록 만들었을까?     

그가 가르친 것은 구체적인 학습 내용이 아니다. 그가 유일하게 무엇인가를 가르쳤다면 그것은 누구나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환기시키고, 배우는 것이 가치 있다고 학습자의 의지를 각성시킨 것이다. 이 무지한 스승의 모습에서 필자는 미래 교육의 출구를 본다. 교사가 학생보다 많은 것을 알고 지적인 우위에 서서 계몽적인 가르침을 할 수 있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역할에서 휴먼로이드 로봇은 인간의 능력을 곧 뛰어넘을 지도 모른다.(42쪽)

학생, 배우는 존재에 대한 성찰

학생이란 어떤 존재일까? 솔직히 이런 물음은 좀 생뚱맞다. 물음을 던지기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그 무엇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교육의 위기는 그런 물음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교사도 학생도 어떤 역사적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아동의 탄생은 학교라는 제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학교의 성립은 성장기 아이들의 감금(!) 과정이 제도화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견 과격한 주장 같지만 다음 글을 읽어보면 십분 수긍이 간다.  

학교 교육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교육은 아이들이 성인과 함께 살고 더불어 배우고  생산 활동에도 부분적으로 참여하였던 현재적 시제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데 비해 근대 학교는 아이들을 사회에서 분리하여 학교에 수용함으로써 교육의 의미를 성인기를 위한 준비 과정, 즉 '미래'를 위한 것으로 변모시켰다.(46쪽)

학생 개개인의 입장에서도 학생기의 지속적인 연장은 점점 감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고 있다. 욕망을 억제해야하는 기간이 길어지는데도 유예를 통해서 얻는 이익이 점점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52쪽)

이혁규의 교실 이야기 <수업>은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게 하는 데 있다.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답을 아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하여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미덕은 물음을 던지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는 결코 몽상가가 아니다. 다분히 진보적이지만 사유의 결이 온유한 편이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해야 할 일도 꼼꼼히 챙겨서 제시한다.  

학습은 미래를 위한 준비일까 현재를 충실하게 영위하기 위한 것일까?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성장하여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동물보다 오랜 시간 동안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인간 종의 특성을 고려할 때 교육의 '미래를 위한 준비'라는 특성을 지우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정도이다. (…) 현재 한국 학교의 학생들은 미래의 욕망을 위해서 현재를 거의 100%로 유보하기를 강요받는다.(58쪽)

학생들이 지닌 각자의 생각이 무시되지 않고 교실에서 다양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아름답게 퍼져 나가는 그런 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닫힌 상호작용 패턴에 대하여 성찰하는 것! 학생들이 먼저 발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그런 능동적인 탐구적 대화가 가능하다도록 하는 것! 교사와 학생의 불평등한 관계를 변화시켜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상호 간에 대화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92쪽)

이혁규의 <수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 2부 '가까이서 멀리서'는 행동적 수업 목표', '수업 지도안', '수업연구대회', '수업 방식과 입시의 관계', '교실 테크놀로지'를 다룬다. 이런 요소들도 반성의 소재로 잘 부각되지 않을 만큼 교사 사회의 익숙한 일상 혹은 관행들과 관계 맺고 있다. 이런 요소를 때론 밀착해서 때론 원거리에서 살펴봄으로써 교사 문화의 낡은 습속에 대해 문제 제기를 시도한다. 

3부 <새로운 성찰과 실천을 위하여>에서는 '교과를 넘어서는 상상력', '가르치는 활동의 예술성', '학습자 중심 교육의 의미', '교원양성체제의 문제', '혁신학교로 상징되는 학교개혁 문제'를 다룬다. 1부와 2부에서 다룬 주제들과 비교해 볼 때 교실이나 단위 학교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미래의 학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들을 모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지만 우리 교육의 난맥상은 풀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 심화될 조짐이다. 교육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 아마도 그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 세계 너머를 상상하거나 사유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자기 성찰과 상상력의 빈곤은 우정의 연대와 협동의 노력으로 넉넉히 넘어설 수도 있는 현실의 장벽을 소름끼치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둔갑시켜놓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소망한다. 내가 혹시라도 빠져 있을 지도 모를 낡은 습속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를. 이를 위해 내게 익숙해진 것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되기를. 무엇보다도 내일이면 만날 아이들을 위해 가르치는 존재로서의 성찰을 통해 새로이 태어날 수 있기를. 

중요한 것은 자기 성찰이나 상상력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인,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모르는 이혁규의 <수업> 이야기를 독자들께 강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교육공동체 벗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수업 -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 이혁규의 교실수업 이야기

이혁규 지음, 교육공동체벗(2013)


#이혁규#교육공동체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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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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