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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헤집어 갈수록 미지를 향한 본능적인 불안감이 증폭된다. 웃통 벗어젖힌 여물어가는 아해들의 날카로운 시선,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성긴 대화, 훅 끼치는 모래바람의 열기. 의지할 상대는 오로지 초대해 준 알리뿐이었다. 하지만 녀석의 집을 보는 순간, 꼴깍 침을 삼키다 사레들 뻔했다. 친절한 초대로 방문한 곳이 빈민가 한복판이라니. 그것도 치안은 눈 씻고 찾아봐도 기대할 수 없는….

하늘이 아득해지고, 세상은 뱅글뱅글 돌며,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데도 시야는 캄캄해졌다. 당장 돌아가고 싶었으나 빠져나올 마땅한 핑계가 없었다. 침착한 태도로 하루만 있다 가겠다고 넌지시 둘렀더니 알리가 눈을 부릅뜨며 정색한다. 일주일 있다 가지 않으면 몹시 서운하다는 격한 반응. 울퉁불퉁 근육질의 그 녀석 앞에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나, 잘못 걸려든 걸까.

"문, 모로코에 온 걸 환영해. 우리 집에 오면 재워줄 수 있어. 연락 기다릴게."

 카우치서핑 누리집
 카우치서핑 누리집
ⓒ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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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은 참 매력적인 누리집이다. 이곳에는 호스피탈리티에 기반한 여행자들을 위한 현지인 무료 숙소 제공과 여행지에서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친구 사귀기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 목록이 있다.

여행자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대한 일정을 게시해 놓으면 해당 지역 회원들이 초대 메일을 보내오고, 반대로 환영할 만반의 준비를 마친 여행지의 호스트에게 여행자가 직접 메일을 보내 숙박 문의를 할 수 있다. 초대하고 싶은 사람과 초대받고 싶은 사람은 서로의 확실한 정보를 확인하고 만나며 그 과정에 다른 이들의 추천사도 볼 수 있어 신뢰가 높은 편이다.

넷북 모니터에 바짝 붙어 메일을 들여다본 나는 입가에 슬쩍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스물한 살 피 끓는 아프리카 청년에게 "당장 너희 집으로 가겠다"라는 답장을 남겼다. 카우치 서핑을 통해 또 한 번 속 깊은 쾌남을 만날 수 있겠다는 들뜬 기대와 함께.

"혼자 돌아다니지 말게... 조심해"

 케니트라 성.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군기지는 영화 블랙호크다운의 배경지다.
 케니트라 성.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군기지는 영화 블랙호크다운의 배경지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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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모로코의 열악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물어물어 이용해 케니트라(Kenitra)에 힘겹게 도착했다. 영화 <블랙호크다운>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테러리스트들이 감옥에서 영화 같은 탈출을 해 더욱 화제가 됐던 이곳은 수도 라바트에서 차로 1시간 반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도시 자체가 번잡하고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차량과 매연으로 뒤범벅된 도심을 빠져나와 한적한 모스크에다 일단 짐을 풀었다. 여행자가 오지 않는 이곳에 낯선 이방인이 방문하니 마을 노인들의 관심은 내게 쏠렸고, 마침 기도하러 온 한 중년 남성은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조언했다.

"대낮이어도 혼자 돌아다니지는 말게나. 조금만 길 잘못 들어도 자네 가방쯤이야 빼앗아 가는 건 일도 아니야. 조심해."

순간 긴장도 됐지만 나의 듬직한 가이드가 돼 줄 알리만을 기다리며 MP3플레이어를 꺼내 올드 팝을 들었다. 전화를 건 지 30여 분 만에 심하게 밝은 표정을 짓는 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 배낭을 둘러매며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케니트라의 멀쩡한 건물들을 뒤로하고 '어라?' 하는 사이 당도한 곳이 다 쓰러져 가는 흙집 중 한 곳. 군데군데 천장이 뚫려있는 양철 지붕과 철사로 걸어 잠근 문이 영 미덥지 않은 동네였다.

 혼잡한 바자르(시장) 모습. 현지인으로부터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동물 시장과 같은 일부 바자르는 절대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찍게 되면 외국인에 배타적인 상인들로부터 카메라를 뺏길 수도 있단다.
 혼잡한 바자르(시장) 모습. 현지인으로부터 소매치기를 주의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동물 시장과 같은 일부 바자르는 절대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으며, 찍게 되면 외국인에 배타적인 상인들로부터 카메라를 뺏길 수도 있단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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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뜻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조그만 확신을 준 건 그의 어머니였다. 선한 미소로 손님을 맞더니 어서 방에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가족을 보면 구성원이 보인다. 그녀의 눈빛에서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그간 강도와 도난을 여러 차례 당한 나로서는 알리보단 이 지역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그래도 집 안이라면 피난처는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에게는 하루 종일 차이를 마시고, 동네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병약한 아버지와 시장에서 품을 파는 어머니 그리고 시내 휴대전화 가게로 일을 나가는 여동생이 있었다. 알리는 변변한 직업 없이 대서양의 거센 파도에서 서핑을 하는 게 하루 일과였다. 벽에 세워진 서핑 보드는 그의 보물 1호다. 일을 하곤 싶지만 주위 친구들 모두 그렇듯이 모로코에서는 파트타임 잡도 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알리는 두바이 행에 대한 막연한 꿈만 꾸고 있었다. 그곳은 일단 가기만 하면 인생 역전을 보장해 준다고 굳게 믿고 있는 아랍 청년들의 꿈의 미답지다.

그의 집은 방과 거실 하나, 대문과 거실 사이에 실내나 야외로 딱히 구분하기 애매한 부엌 하나로 단출하게 구성돼 있다. 아버지는 난로를 때워 부엌에서 혼자 자고, 모녀는 방에서, 나와 알리는 좁은 거실 소파에서 함께 자기로 했다. 가진 것 없이도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뭐든 빌려달라던 알리... 난 그를 경계했다

 모로코 전통 음식 쿠스쿠스. 밥과 야채, 고기 등을 손으로 한데 눌러 먹는다.
 모로코 전통 음식 쿠스쿠스. 밥과 야채, 고기 등을 손으로 한데 눌러 먹는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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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의 어머니는 첫날 저녁, 모로코 전통 음식인 쿠스쿠스를 대접했다. 널은 조리용 목각 쟁반에는 찐 밥과 야채·고기가 가득하다. 모로코의 전통 방식대로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두런두런 대화하면서 손으로 밥을 꼭꼭 눌러 반찬과 함께 집어먹는다. 혹시 손으로 먹는 게 불편할까봐 내게는 미리 수저 하나를 준비해준다. 나는 몇 번 수저로 밥과 반찬을 떠먹다가 분위기에 동화되고 싶어 손을 사용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었는지 가족들은 깔깔깔 웃고, 거실엔 행복의 온기로 가득하다.

머무는 내내 그녀는 바닥이 보이는 가세에도 끼니때마다 맛있는 음식과 모로코인들이 즐겨 마시는 꿀 탄 민트차를 제공했다. 초반 이틀 동안 나는 정성어린 음식과 차를 대접받으며 모로코의 찌는 더위를 피해 실내에서 알리의 지인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알리에게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시장에서 고기와 생선·과일을 사겠다고 했다. 전날 밤부터 미리 고지해 놓은 내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대신 내 넷북을 빌려달란다. 동네 친구들과 함께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고, 카우치 서핑도 확인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의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고, 알리는 동네 PC방을 이용해 외부 세계와 소통하고 있었다.

 사진 찍는다며 한껏 멋을 낸 알리. 왼팔에 내가 가르쳐 준 어머니 이름을 본인이 펜으로 한글을 적었다.
 사진 찍는다며 한껏 멋을 낸 알리. 왼팔에 내가 가르쳐 준 어머니 이름을 본인이 펜으로 한글을 적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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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에서 만난 아이들. 페트병 뚜껑을 가지고 하는 놀이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은 그나마 어려서 괜찮지만 10대 후반만 되어도 몸이 좋고, 태도가 거칠어 모여 있는 경우엔 카메라를 들고 접근할 수가 없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아이들. 페트병 뚜껑을 가지고 하는 놀이를 종종 볼 수 있다. 이 아이들은 그나마 어려서 괜찮지만 10대 후반만 되어도 몸이 좋고, 태도가 거칠어 모여 있는 경우엔 카메라를 들고 접근할 수가 없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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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내가 돈을 줄 테니 PC방을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네 노트북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조금만 사용하고 바로 돌려줄게. 한 번만 빌려주면 안 될까?"
"안 돼. 전에 많이 잃어버려서 함부로 빌려줄 수가 없어. 미안해."

분명 알리는 착한 아이다. 그런데 종종 내 물건에 집착을 보일 때가 있었다. 하루 한 번은 꼭 무언가를 빌려달라 조르곤 했다. 

"그럼, 네 카메라 좀 빌려주면 안 될까? 우리 동네 위험해서 너는 사진을 못 찍지만 내가 대신 찍어서 네게 주면 되잖아, 어때?"

실제로 녀석의 집 주변은 워낙 척박한 동네였던 터라 카메라를 들고 나갈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이 역시도 거절했다. 다행히 알리의 요청은 매번 짧게 끝나곤 했다. 혼란스러운 동네 분위기에 하루만 있다 가려던 것을 "내가 싫지 않으면 더 머물고 가라"는 끈질긴 요청 때문에 사흘이나 머물렀다.

되돌아온 MP3플레이어

 각종 곡물과 향신료 등을 파는 시장. 색이 참 곱다.
 각종 곡물과 향신료 등을 파는 시장. 색이 참 곱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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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꼭 떠나겠다고 말한 저녁 식사 자리, 어김없이 성대한 식탁이 마련됐고, 그의 삼촌까지 방문했다. 나는 그간의 고마운 마음을 대접하고자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알리가 친구 만나러 간 틈에 집에서 가장 가까운 노점상에 가서 씨알 굵은 노란 멜론과 포도·복숭아를 넉넉하게 구입하고, 지인 부모님이 한국에서 손수 긴급으로 공수해 준 포장된 김 두 세트와 볶음고추장, 간편한 즉석 음식들을 꺼내 어머니께 드렸다. 알리에겐 집에서 식구 및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인화해줬더니 함박웃음이다.

다른 것보다 김의 인기는 대단했다. '어떻게 이렇게 고소한 음식이 있냐' '대관절 재료는 뭐냐' 야단이다. 나는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영양 만점의 바다 채소라고 대충 설명한 뒤, 쿠스쿠스를 김에 싸서 먹는 방법을 가르쳐 줬다.

소금 간이 돼 있는 김을 각 맞춰 잘게 찢은 다음, 손으로 꾹꾹 눌러 모은 밥과 반찬을 얹어 먹는 방식은 그들에게도 무척 흥미로운 것이었다. 서아프리카 여행 때 힘들 때마다 가끔씩 꺼내 먹으려던 비상식량이었지만 알리 가족의 정성스런 대접에 감동해 꾸러미를 아낌없이 푼 것이다.

 알리의 가족들. 왼쪽부터 알리, 어머니, 아버지, 삼촌. 여동생은 밤늦게 일이 끝난단다.
 알리의 가족들. 왼쪽부터 알리, 어머니, 아버지, 삼촌. 여동생은 밤늦게 일이 끝난단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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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알리는 내 MP3플레이어에 호기심이 있었는지 음악을 들으면서 자면 안 되겠냐고 물어왔다. 세 번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첫날부터 켜켜이 내려앉았던 어두운 불신에 믿음을 점등시켰다. 나는 그에게 MP3플레이어를 건넸고, 다음 날 아침 그는 잘 들었다며 그대로 되돌려줘다.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알리는 버스 타는 곳까지 짐 하나를 들어다 주며 배웅했고, 그렇게 케니트라 빈민가에서의 3박 4일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알리가 가진 내 물건들에 대한 호기심은 순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비록 내 입장에서 보는 빈민가의 치안은 부재했지만 그들의 가식 없는 베풂은 행복으로 충만하지 않았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성마르게 불신의 싹을 틔웠어야만 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리고 삶의 모든 경험이 축적된 케니트라에서, 대서양의 거센 파도를 타고 윈드서핑을 즐기는 것이 유일한 삶의 낙인 알리의 가슴에 나는 무엇을 남기고 왔는지 고민해 본다. 잠시 머물다 간 나, 그 시간만큼은 그에게 진짜 친구였었는지 말이다.

 모로코 위치.
 모로코 위치.
ⓒ 구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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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miracle_mate)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 이 여행기는 2012년 10월께의 기록입니다.



#서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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