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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석유화학공단에 있는 석유저장탱크와 굴뚝, 배관. 셧다운 공사는 공장 가동을 멈추고 이 장치들을 보수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울산석유화학공단에 있는 석유저장탱크와 굴뚝, 배관. 셧다운 공사는 공장 가동을 멈추고 이 장치들을 보수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 울산제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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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진이 아버지, 돈 벌러 안 갈래요? 한 달만 일하면 목돈 쥘 수 있어요."

1999년 5월쯤으로 기억한다. 다니던 지역신문사에서 해고돼 집에서 두 달째 쉬고 있던 내게 이웃 아저씨가 울산석유화학공단 '셧다운' 일을 제안했다. 셧다운 일이란, 365일 쉼 없이 가동하는 석유화학 공장에서 1년에 한 차례 가동을 중단하고 석유저장탱크와 주변 장치를 정기적으로 보수하는 일을 말한다.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단지 지정 이후 울주군 온산, 남구 용연동 등지에 SK, S-OIL 등 석유화학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셧다운 일은 석유화학공장의 정상 가동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일이다.

셧다운 때 하는 일은 석유 탱크나 석유를 운반하는 배관 등 관련장치를 용접해 보강하는 일, 탱크 안이나 높은 굴뚝 내부를 청소하는 일, 이처럼 용접이나 청소를 하기 위해 탱크 내부와 굴뚝에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를 설치하는 일 등으로 나뉜다. 필자같이 용접, 비계 등 특정기술이 없는 사람들은 탱크 청소하는 일을 하는데, 셧다운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품만 팔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당시 울산에서는 "셧다운 일을 하면 큰 돈을 번다. 셧다운 한 철 하면 일 년을 먹고 산다"는 말들이 있었다. 이웃 아저씨는 "한 달 일하면 30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다"고 했다. 당시는 지역언론 기자들의 월급이 100만 원도 채 안 되는 때였고, 해고 후 두 달 가량 놀고 있어 생활비가 절실했다. 때문에 셧다운 일을 흔쾌히 승락했다.

아저씨는 필자 이외도 동네 청년, 50대 아저씨 등 직업이 없거나 해고되어 집에서 쉬고 있는 이웃사람 대여섯 명을 더 모은 후 한 팀을 만들었다. 하루 일당을 알지 못했지만 한 달에 300만 원 이상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기대가 컸다. 필자와 일행 6명은 아저씨가 운행하는 승합차를 타고 한 석유화학공장 정문 앞으로 갔다. 드디어 돈을 많이 번다는 셧다운 일이 시작된 것이다.

한 달에 300만 원! '혹해서' 따라나섰는데...

오전 6시 40분쯤 도착하니 필자 일행 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보통 셧다운 일은 오전 7시 30분부터 시작되는데, 공단지역 교통 상황을 고려해 6시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일 시작하기 전 1시간이나 앞서 공장에 도착했으나, 출입증 관계로 20분 가량을 공장 앞에서 대기해야 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각 팀을 이뤄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렸다.

드디어 정문에서 소정의 신분확인 절차를 거치고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은 매우 넓고 탱크와 배관, 굴뚝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탱크들이 연이어 있는 넒은 공터에 사람들이 모였다. 원청 직원들은 보이지 않고 셧다운 일을 받은 한 하청업체 관계자가 사람들을 줄 세우고 각자 일할 곳을 배분하고 있었다.

며칠 뒤에야 상황을 파악했지만, 우리는 하청업체에서 일을 받은 재하청업체에서 모은 사람들이었다. 이웃 아저씨는 재하청업체 내의 여러 '오야지(작업할 사람을 모으는 직책)' 중 한 명이었고, 우리는 아저씨 밑에서 일하는 작업자였다.

셧다운 일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석유화학공장 대기업이 원청이 아니라, 대기업에서 일을 받은 전문건설업체가 원청이 된다. 전문건설업체는 여러 곳의 하청업체에 일을 나눠 주고, 이 하청업체들은 또 하부 하청업체에 일을 나눠줬다. 이 하청업체는 다시 오야지로 불리는 사람들을 통해 작업자를 모으는 것이다.

작업 배치를 받기 위해 줄을 선 후에야 아저씨는 우리에게 "하루 일당이 8시간 기준 7만 5000원이고, 12시간 일할 경우 12만 원"이라는 사실을 설명했다. 또한 일주일 후 야간 12시간을 하면 14만 원 정도의 일당을 받는 조건이었다. 결국 휴일 없이 한 달을 주야간 12시간씩 일해야 300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이 섞여 일하다 다른 팀 사람들에게 확인하니 그쪽은 우리보다 일당이 1만 원 가량 더 높았다. 결국 하는 일은 똑같았지만, 어느 선을 타고 일하러 오느냐에 따라 임금이 달랐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동네 아저씨가 우리 임금 중 얼마를 자기 몫으로 가져갔다. 사람을 모은 대가인 셈이다.

석유탱크 안에는 용접 연기가 자욱... 점심은 공터에서

 2006년 7월 총파업을 벌인 울산건설플랜트노조가 "불법다단계 임금 구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시가지에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2006년 7월 총파업을 벌인 울산건설플랜트노조가 "불법다단계 임금 구조 개선" 등을 요구하며 시가지에서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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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일은 커다란 석유탱크 안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탱크는 높이가 20m도 넘어 보였다. 미리 비계를 설치해 놓았고 백열등 전구 수십 개가 어두운 탱크 안을 비추고 있었다. 이날 일을 하기 전 어떠한 안전교육이나 지침을 받지도 못했다. 원청인 공장 정규직 직원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단지 하청업체 관리자로부터 "조심해서 일하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작업자에게는 일회용 방진복(일명 깔깔이)과 방진마스크, 장갑이 지급됐고, 청소를 하기 위한 걸레와 세척용 시너 등이 준비됐다.

방진복과 방진마스크를 착용하고 비계를 타고 탱크 위로 올라갔다. 탱크 입구는 넓이가 사람 서너 명이 들어갈 정도였다. 탱크 안은 텅 비어 있었는데, 미리 설치해 놓은 백열등 전구가 비치는 탱크 내부는 기름 찌꺼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일회용 방진마스크를 썼지만 매캐한 냄새가 마스크 속으로 들어왔다.

탱크 위 입구에서 한 사람씩 설치된 비계를 타고 탱크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작업자들은 걸레에 시너를 묻혀 탱크 내부를 닦기 시작했다. 환기구는 입구뿐이니 냄새가 진동을 했다. 용접작업을 했는지 화약 냄새가 났고, 백열등 불빛으로 연기가 가물가물 보였다.

한 시간 일하고 십 분 정도 쉰 후 다시 일하기를 반복했다. 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됐다. 방진복에 묻은 기름 찌꺼기는 안으로 파고들어 집에서 입고 간 옷 여기저기에 묻었다. 하지만 '오늘 12만 원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걸레질을 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됐다.

점심으로 도시락이 배달됐다. 작업자들은 탱크 밑의 공터 여기저기 모여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그러고는 그 자리서 벌렁 뒤로 누워 달콤한 오침을 즐겼다. 점심시간 한 시간은 야속하게도 빨리 지나갔다. 다시 오후 일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오후 7시가 되고야 주간 12시간 일이 끝났다.

원청에서 지급한 일당의 반의 반만 내 손에... 분통 터져  

며칠 뒤에는 높이가 50m는 족히 될 것 같은 높은 굴뚝으로 올라갔다. 입구를 열기 위해 필요한 큰 망치와 스패너 등 짊어진 짐의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굴뚝에 설치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발이 후들후들 떨렸다. 밑을 내려 보지 않고 위만 쳐다보고 오르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도착했다.

굴뚝 안은 탱크처럼 기름 찌꺼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군데군데 난 출입구를 열고 굴뚝에 들어간 후 다시 굴뚝 내에 촘촘히 있는 뚜껑을 여닫는 일이 힘들었다. 입구를 열기 위해서는 잠긴 볼트에 스패너를 댄 후 망치질을 여러 차례 해야만 했다. 하지만 뚜껑을 닫는 일은 철저히 해야 했다. 나중에 원청에서 확인해서 불합격되면 재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야간 일은 주로 탱크 청소를 하는 일에 치중했다. 야간에 굴뚝에 오르는 일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야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옷과 얼굴은 검은 기름자국으로 엉망이 됐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 검은 자국의 얼굴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루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셧다운 일은 공사기간(공기)이 가장 중요하다. 석유화학업체는 정해진 기간 내에 일을 마무리해야 다시 공장을 가동하기 때문에 일정을 족치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셧다운 기간 막판에는 청소하는 옆에서 용접일을 하는 사람들과 뒤섞여 일하기도 했다.

훗날 다시 언론사로 복귀해 취재를 하던 중 석유화학 대기업 관리자에게 들은 바로는, 대기업에서는 당시 셨다운을 하며 필자가 받은 하루 일당의 3배 정도는 예산으로 책정돼 하청업체에 지급한다는 것이다. 결국 여러 차례의 다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받는 돈은 형편없이 줄어든 것이다. 마당에 앉아 밥을 먹고, 하루종일 매캐한 냄새를 맡으며 일한 대가를 누군가가 날로 챙겨갔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다단계 하도급' 사라지지 않는다면 사고는 언제든지... 

 2006년 7월 5일 울산시청 후문앞에서 열린 울산건설플랜트노조 총파업 결의대회. 일용직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 후 열악한 노동환경을 세상에 알리자 인권단체 등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이 이들과 연대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2006년 7월 5일 울산시청 후문앞에서 열린 울산건설플랜트노조 총파업 결의대회. 일용직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 후 열악한 노동환경을 세상에 알리자 인권단체 등 시민사회와 진보정당이 이들과 연대해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했다
ⓒ 박석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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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일 가량 그 공장에서 일한 후 다시 다른 대기업의 셧다운 현장에서도 같은 팀원들과 함께 15일 가량 일했다. 그 작업도 앞서의 일과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석유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밀폐된 현장에서 용접일을 하는 사람들과 뒤섞여 청소일을 했다. 용접 불꽃이 언제 가스폭발을 불러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에 아찔한 생각마저 든다.

지난 14일 여수산단 대림산업 현장에서 대형폭발사고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사고는 이미 예견돼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 중에는 30대의 젊은이들이 많았다. 필자가 셧다운 일을 한 때도 30대 중반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청노동자로 일하다 아까운 목숨을 잃은 그들에게 동병상련마저 느낀다.

필자가 셧다운 일을 경험한 지 몇 년이 지난 지난 2004년, 셧다운 공사를 주업으로 하는 배관·용접·토목 등 건설일용직 노동자들이 울산건설플랜트노조를 설립해 다단계 구조의 실상과, 공터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 등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세상에 알렸다. 노조 설립 9년이 지난 현재, 셧다운 현장에서는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 여수산단 폭발사고에서 보듯, 셧다운 작업현장의 환경은 아직도 더 개선되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불행 중 다행으로 18일 희생자에 대한 보상 합의는 비교적 빠르게 이뤄졌지만, 사고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고 현장의 작업제도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이런 참사는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른다. 다시 한번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사울산>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울산석유화학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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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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