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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고등학교 3학년은 '벼슬아치'다. 고3 수험생을 둔 집에서는 가족들이 몸조심하는 게 기본이다. 오죽하면 가족들이 거실에서 고3 수험생을 위해 발뒤꿈치까지 들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까.

학교는 이보다 더한다. 고등학교의 주요 학사 일정이나 교육 과정 운영은 대체로 3학년에 맞춰진다. 학교에 이런저런 일이 일이 있어도 3학년은 책상 앞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다. 체육대회와 같은 날에도 자율학습을 강제하는 학교가 제법 있을 것이다. 설령 학교 건물이 무너지더라도 천막 아래에서 문제풀이를 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고3이다.

지난해였다. 나는 지금 가르치는 아이들이 2학년이었을 때 수업 시간에 몇 번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한 적이 있다. 고3 생활을 '벼슬아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에서였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고3 생활이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걸 '무기'로 가족과 친구, 선생님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내 말을 들은 아이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며칠 전이었다. 3학년 부장 선생님으로부터 3학년 담임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긴급하게 들어온 어떤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학년부장의 말을 들어보니, 쉬는 시간 중에 아이들이 다른 반으로 가는 것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고3 교실에는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싶은데 떠드는 아이들이 있으면 여의치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학교에서 조금 관리를 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울컥 하는 느낌밖에 없었다. 도대체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면서 노는 것까지 막아달라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고3생이라지만 이건 너무하는 짓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3학년 담임 회의 후 일부 교실 출입문에 붙여 놓은 '출입 금지' 안내문. 이날 회의에서는 이 안내문을 '경고' 차원에서 붙이고, 쉬는 시간에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은 특별 교실로 가게 해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며칠 전 3학년 담임 회의 후 일부 교실 출입문에 붙여 놓은 '출입 금지' 안내문. 이날 회의에서는 이 안내문을 '경고' 차원에서 붙이고, 쉬는 시간에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은 특별 교실로 가게 해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자고 결정하였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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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다른 반 출입을 자제하라는 내용을 적은 안내문을 교실 출입문에 일괄적으로 붙이는 게 어떻겠느냐는 안을 제시하였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별다른 이견이 없는 듯했다. 그렇게 하려면 모두 같이 해야 효율적이라는 의견을 한 선생님이 내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들은 이미 충분히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하고 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학급 간 출입을 금하느니 자제하라느니 하는 내용의 경고문을 교사들이 앞장서서 붙이는 게 과연 교육적으로 올바른 일일까. 나는 울컥 하는 마음으로 우리 반에는 붙이지 말아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들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다. 더군다나 고3 교실 아닌가.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마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경고성 내용이 담긴 종잇장으로 아이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이끌어내는 일은 서로 간의 관계만 나쁘게 만들 뿐이다.

고3 아이들의 예민함과 불안감을 모르는 게 아니다. '시험 테러'라는 말이 오갈 정도로 아이들의 내면은 온통 시험에 대한 강박적인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웬만한 회사는 그나마 대학 졸업장이 최소한의 '지원 자격 증명서'가 되어 있으니, 고3 아이들이 막연히 '좋은 대학'에 목을 매지 않을 도리도 없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아이들을 '벼슬아치'로 대접했는데도, 그들이 종국에는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때 아이들이 느끼는 좌절과 절망을 우리는 과연 조금이라도 어루만져줄 수 있는가.

고등학교 3학년은 '벼슬아치'가 아니다. 그들이 '벼슬아치' 같은 대접을 받아서도 안 된다. 고3 아이들을 '벼슬아치'처럼 대하는 일이 그들을 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것이 오히려 아이들을 망치는 길이다. '모든 방해물은 우리가 제거해줄 테니 너희는 공부에만 집중하라'는 게 과연 올바른 교육인지 정말 차분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3#벼슬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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