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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내 식물원에서. 저 너머로 필자가 수업 듣고 있는 자연과학대학이 보인다.
 대학 내 식물원에서. 저 너머로 필자가 수업 듣고 있는 자연과학대학이 보인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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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말 잘못 했다가 욕만 가득 먹고, 겨우 구한 집. 머물 곳을 찾았다고 한시름 놓은 것도 잠시였다. 언어의 장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가령, 시내 중심에서 급한 신호가 왔다고 치자. 한국이었다면 가는 사람 붙잡고 도와달라고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난 스페인어와 인연이 없었다. 사람 많은 곳에서 'Aseo(화장실·아쎄오)' 한 단어를 몰라서 손으로 '그곳'을 가리키고 방방 뛰어야 할 판이다. 집 중개업자에게 욕을 먹은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시험인데 문제는커녕 감독관 말도 못 알아들으니...

어학원 대강의실 옆 세계 각국의 문장들. 한국인 뿐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거쳐갔다는 걸 안 나는 순간 긴장을 놓아버렸다.
 어학원 대강의실 옆 세계 각국의 문장들. 한국인 뿐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들이 거쳐갔다는 걸 안 나는 순간 긴장을 놓아버렸다.
ⓒ 어학원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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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반에 배치돼 구입한 교재와 사전,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단어장
 가장 낮은 반에 배치돼 구입한 교재와 사전, 그리고 한국에서 가져온 단어장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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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에 도착한 다음날이었던 2월 4일, 한국에서 함께 온 누나와 어학원에 레벨테스트를 보러 갔다. 우리는 센트로(Centro)에서 버스로 30분 거리 엘 팔로(El palo)에 있는 대학교 부설 어학원에 도착했다. 한국 대학의 소강당 수준의 대강의실은 몇백 명은 돼 보이는 외국인들로 바글바글했다. 나는 옆 사람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그래, 여기서는 그래도 영어로 설명해주겠지'라고 생각했다.

곧이어 감독관 셋이 들어왔다. 앞에서 무슨 말을 하긴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해보려는 사이 시험지가 뿌려졌다. 옆 자리 미국인 남성에게 물어보니 시험지에 이름을 쓰라고 스페인어로 말해줬단다.

시험지를 봤다. 문제부터 보기까지 모두 스페인어로 적혀 있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로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 헛웃음만 났다. 지금까지 온갖 시험을 치른 나였지만, 이건 도대체 버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보기를 찍을 자신도 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들었고, 감독관에게 백지 상태로 시험지를 제출했다. 교실 밖, 아무도 없었다. '그래! 내가 수백 명을 꺾었다!'라며 웃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사실, 씁쓸했다. 나는 며칠 뒤 어학원에서 제일 낮은 반에 배치됐다.

"이 수업, 토론 평가가 중요하다"는 말에 좌절

생물학 전공수업은 들을 만 했다. 물론 교수의 말을 당장은 못알아들어서, 나를 보지만 말아주길 바랬을 뿐.
 생물학 전공수업은 들을 만 했다. 물론 교수의 말을 당장은 못알아들어서, 나를 보지만 말아주길 바랬을 뿐.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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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학원 시험이 연습 경기였다면 대학 수강신청은 실전 그 이상이었다. 수강신청을 마치고 학생증을 받을 때까지 약 한 달 동안 나를 괴롭혔다.

한국과는 상이했던 스페인 대학 교육제도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들에게 설명서를 배부했지만, 애매하게 해석된 영어·한국어 설명은 되레 나를 더 헷갈리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는 한국어로 쓰인 스페인 교육제도 연구논문을 우연히 찾게 돼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논문 덕택에 대략 감을 잡고, 이제 듣고 싶은 과목을 고를 차례. 나는 이곳에서 언론학 수업을 꼭 듣고 싶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언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국에서도 언론이 논란의 도마에 오르듯이 이곳에서도 환경이 비슷할까?' 등 평소 관심사에 대해 이곳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순전히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친구를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2월 20일 오후 7시 30분께, 언론학 관련 수업을 들으러 들뜬 마음을 안고 말라가대학 떼아띠노(Teatinos) 교정의 커뮤니케이션과학 단과대학(Facultad de ciencias de la comunicación)을 찾았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전날 들었던 생물학 전공 수업이 생각보다 견딜만했던 게 영향을 줬다. 물론 스페인어를 못 알아듣긴 했지만, 일부 생물학 용어가 영어로 나와 강의를 이해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강의 시작 후 10분 정도 지났던가. 교수가 농담을 던졌다. 다들 웃음보가 터졌지만, 나 홀로 웃지 않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남들은 즐겁게 웃는데 말을 모르는 내게는 웃는 연기를 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유인물이나 PPT 자료도 없었다. 사전을 챙겨 갔지만, 들리지 않으니 보고 해석할 수도 없었다. 전공 영역이 아니라 강의 시간 내내 사용됐던 용어는 생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멍하니 지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을 사귀고 도움을 받으면 될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수업이 끝나고 교수를 찾아갔다. 대학 전산시스템에서 과목 정보를 보려면 암호가 필요한데, 교환학생들은 수강신청이 아직 끝나지 않아 암호를 받지 못했다. 나는 서툰 스페인어를 한 문장 한 문장 이어가며 암호를 물어보는데, 교수가 물었다. "스페인어를 잘하세요?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조금 불안해졌다. "음… 조금 합니다"고 스페인어로 답했다. 그러자 교수는 영어로 말했다.

"다른 과목을 듣는 게 어떨까요? 이 과목은 토론 평가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죄송합니다."

말라가대학 커뮤니케이션 대학 앞. 언어의 장벽 앞에서 밤만큼 내 심정도 검게 타들어갔다.
 말라가대학 커뮤니케이션 대학 앞. 언어의 장벽 앞에서 밤만큼 내 심정도 검게 타들어갔다.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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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말라가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는 경우, 스페인어 능력은 제한 조건이 아니다. 이는 강의를 듣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언론학 관련 수업은 달랐다. 이 강의는 토론수업이 평가에 들어갔기에 교수가 먼저 양해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난 정말 이곳에서 언론을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다. 용기 내 "그래도 듣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조차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이곳 말라가에 닿기 전 세웠던 목표 중 하나가 실패로 끝났다. 서러워 눈물이 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단과대학을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밤이라 하늘은 칠흑 같이 어두웠고, 사람 없는 교정은 스산했다. 그저 속으로 되뇄던 말은 '친구를 만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것뿐이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나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한글 번역본. 처음엔 그저 고맙고 신기했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한글 번역본. 처음엔 그저 고맙고 신기했지만...
ⓒ 김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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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가대학(Universidad de Málaga)에서는 교환학생 학사 업무가 오프라인으로 이뤄진다. 모든 업무가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한국과는 달리 부담스럽고 귀찮았다. 수강신청을 위해 일일이 대학 곳곳을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나라 교환학생이 입을 모아 "귀찮고 짜증난다"고 말할 지경. 하지만 여기에 언어의 장벽이 더해지면 귀찮은 게 섬뜩한 것으로 바뀔 수 있다.

처음 수강신청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은 2월 6일, 떼아띠노 교정 국제교류처에서 연 한국 학생 대상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였다. 담당자가 한국어로 된 설명서를 보여주며 "전산 시스템의 'Cita Matriculacion(수강신청 신청·시타 마뜨리꿀라시온)'에서 시간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부분을 학과 주임교수와 약속을 잡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수강신청 절차상 학과 주임교수를 만나 수강신청서에 사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설명서에도 단순히 '학업 담당자 만나는 예약 시스템'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결국 언론 관련 과목 수강을 포기하고 전공 수업 두 개만 듣기로 결정했다. 'Cita Matriculacion'을 통해 주임교수를 만나고 싶은 시간을 예약했다. 그런데 당일 찾아가니 주임교수는 자리에 없었다. '뭐지?' 결국 이메일로 직접 약속을 잡고 다른 날을 잡아 주임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단순한 전산오류였나' 생각했다. 주임교수의 사인이 담긴 문서를 받아든 나는 지난 8일 수강신청 마지막 날에 대학 국제처를 찾았다. '못 알아들어도 빠지지 말고 열심히 들어봐야지'라며 한 학기의 시작을 다짐하면서.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국제처 직원들은 "당신 수강신청을 받아주질 못하겠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오늘이 마지막 날인데….' 수강신청 못하면 제때 졸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연장학기 등록 때 등록금 전액을 내가 내야 할 판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국에서 당장 귀국하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짐은 온데간데 없고 당혹감만이 그 자리를 메웠다. '여기서 무릎 꿇고 울며불며 사정해야 하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언어의 장벽을 뚫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다음 기사에 뒷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 '또바기미디어(http://ddobagimedia.tistory.com)'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말라가, #언어의 장벽, #스페인어, #교환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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