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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축구 골키퍼로 이름을 날리다

먼 옛날이 되었지만 학창 시절에 난 만능 운동선수였다.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래서 팔방미인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시골의 신설고등학교 2회 생으로, 학생 수가 적었기 때문에 교내 체육대회를 할 때는 여러 개 종목의 선수로 뛰어야 했다. 그것은 학교 대항 군내(郡內) 체육대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주 종목은 축구였다. 중학생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뛰었다. 처음에는 공격수로 뛰었는데, 중3 시절에 골키퍼로 발탁되어 고교 시절은 물론이고 군대 시절에도 골키퍼로 뛰었다. 고교생 시절부터 서산군(당시) 성인축구팀 골키퍼였고, 군대 시절에는 논산훈련소 축구팀 골키퍼로 제2군사령부 창설 15주년 기념 관구단위 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고교 시절 충남도 고교축구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당시 축구명문고였던 대전상고와 맞붙었던 기억이 아련하면서도 또렷하다. 기량 차이가 많이 나서 거의 일방적인 경기였다. 실점 위기를 수없이 모면했다. 우리 팀은 공격다운 공격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시종 수세에 몰렸다. 나는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며 선방을 거듭하다가 후반 종료 5분을 남긴 시점에서 페널티 킥으로 한 골을 내주고 말았다.

축구선수(골키퍼)였던 고교 시절 모습 서산군 고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여 서산군 대표로 충남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1966년이었지 싶다.
▲ 축구선수(골키퍼)였던 고교 시절 모습 서산군 고교 축구대회에서 우승하여 서산군 대표로 충남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기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이다. 1966년이었지 싶다.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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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비로 운동장이 젖어 있었던 탓에 경기가 끝났을 때 내 몸은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대전상고 골키퍼는 새신랑 같은 모습이었다. 대전상고 선수들이 모두 내게로 와서 악수를 하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도 했다.

당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축구선수로 출세할 것으로 알았다. 운이 좋으면 태극마크를 달게 될 거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시골학교 운동선수였고, 가난한 집 아이였다. 대전상고로 적을 옮기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서울 J대학의 체육특기생으로 뽑히기도 했지만 막상은 대학 진학도 할 수 없었다.

군 제대 후에는 두어 해 초등학교 축구팀 코치 생활도 했지만, 1975년 객지 유랑생활로 접어든 후로는 운동과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5년 동안 객지 생활을 하고 1980년 고향으로 돌아온 후 고장의 체육단체들이 내게 접촉을 해왔지만, 나는 스포츠 쪽으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문학수업과 활동 쪽으로만 전력투구했다.

과거 운동선수였던 내가 1980년대 초부터 스포츠와 완전히 담을 쌓은 것은 당시 5공 군사정권이 '우민화정책'으로 시행했던 '3S정책(스포츠·스크린·섹스)'의 실체를 파악한 것으로부터 연유한다.

내 학창 시절 골키퍼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

나는 1987년 마흔의 나이로 결혼했다. 나는 아내에게 오랫동안 스포츠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학창 시절과 군대 시절 운동선수였다는 얘기도 일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내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내가 학창 시절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축구 골키퍼였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게 됐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고교 시절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데, 십중팔구는 축구 골키퍼 모습이었다. 내 폼과 기량에 매혹을 느꼈던 사람들, 내가 순간 다이빙으로 결정적인 공을 막아내던 모습 등을 잘 기억하고 있는 후배들이었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후배들은(내가 고교생일 때 중학생이었던 사람들도) 으레 내 축구선수 시절 얘기를 하곤 했다.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경이롭게 보는 후배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보다도 과거 축구 골키퍼였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기억 속에 명료하게 남아 있는 내 골키퍼 모습이 더 중요한 듯했다.

아내는 가끔 내게 궁금증을 표하곤 했다. 내가 학창 시절에 축구 골키퍼를 얼마나 멋지게 잘 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내 옛날 모습을 기억하느냐는 말을 하면서 그 시절의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동영상 기기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니 과거의 내 골키퍼 모습을 재생시켜 아내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인생 오후 시절에 다시금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모습을 아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저 속절없이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세월 덧없음을 헤아릴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오마이뉴스>로부터 운동회 소식을 듣게 됐다. 창간 13주년을 맞이해서 상근기자들과 시민기자들이 함께 어울려 처음으로 운동회를 갖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소식을 접하는 순간 나는 대뜸 축구경기를 떠올렸다. 축구경기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고, 그러면 나도 골키퍼를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처음으로 내 골키퍼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아내에게 내 골키퍼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를 물었다. 옛날 젊은 시절의 멋진 폼과 기량은 가뭇없게 되었지만, 만 65세 노인연령으로 접어든 시기의 남편 골키퍼 모습을 한 번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로 유혹했다. 아내는 군소리 없이 동의했다.

꼭 10년 전인 2003년 가을, 수원 KBS연수원에서 있었던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1박2일 연수회에 참가했을 때도 마지막 행사로 축구경기를 했다. 그때도 나는 골키퍼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실내 핸드볼 경기장을 이용하는 축구였고, 아내도 동반하지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번의 첫 운동회 행사가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서 취업준비 공부를 하고 있는 딸아이를 집에 내려오게 했다. 암 투병도 하셨던 올해 연세 구순이신 모친을 혼자 집에 두고 우리 부부만 빠져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딸아이에게 할머니를 맡기고 우리 부부는 모처럼만에 먼 길 나들이를 할 수 있었다. '대전인재개발원'을 처음 구경하는 것도 행운이었다.

38년 만에 축구경기를 해보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운동회 때 축구경기를 하는 모습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운동회 때 축구경기를 하는 모습
ⓒ 김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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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운동회에는 오연호 대표를 비롯하여 150명가량이 참가했다. 날과 장소를 잘 택했지만, 날을 잘 잡은 것에는 득과 실이 공존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즐겁고 풍성한 분위기 속에서 모든 행사가 잘 진행됐다.

내 예상과 바람대로 축구 경기도 있었다. 4개 조로 나누어 맨 먼저 축구 예선경기부터 했다. 나는 4조에 속해 3조와 예선을 치러 3:1로 이겼다. 몇 번의 실점 위기를 잘 막아내다가 후반전에 한 골을 먹었는데 골문 구석으로 파고드는 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축구 결승은 오후에 있었다. 2조를 이기고 올라온 1조와 맞붙었다. 경기 내용은 전반적으로 우리 4조가 우세했다. 볼 점유율이 월등 높았다. 전반전에 1골을 넣은 후 나는 우리 팀의 낙승을 예상했다.

하지만 몇 번의 좋은 찬스를 살리지 못하더니 후반 중반에 위기를 맞이하고 말았다. 1조에는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한 명 있었다. 인천에서 온 시민기자였다. 키도 크고 체력도 좋고 개인기가 뛰어났다. 그 선수에게 노마크 찬스가 주어지는 순간 나는 그에게 돌진했다.

내 순간적인 판단은 정석이었고, 반사작용에 의한 동작이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거리였다. 1조의 그 선수가 논스톱 슈팅을 하지 않고 일단 볼을 잡을 것으로 예상해서 순간적으로 돌진을 한 것인데, 내 발이 그렇게 빠르지를 못했다.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거리였지만 내 몸이 민첩하지를 못한 탓에 그 선수의 발이 빨라서 공은 골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1:1 무승부로 경기가 끝나 승부차기로 우승을 가려야 했다. 1조는 그 기량 좋은 친구가 골키퍼를 했다. 우리 4조는 내가 골키퍼를 했는데, 우리 4조 선수들은 모두 내게 기대를 걸었다. 내가 왕년에 축구선수요 골키퍼였다는 사실을 모두 알게 된 탓이었다. 왕년도 왕년 나름이지, 65세 노인연령으로 접어든 내가 승부차기에서도 골키퍼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운동회 때, 승부차기를 하던 모습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운동회 때, 승부차기를 하던 모습
ⓒ 김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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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씩 차기로 하고 우리 팀이 선축을 했는데, 3명이 차례로 실축을 한 반면 나는 세 골을 계속 먹어서 결국 3:0으로 지고 말았다. 두 번째 골은 초등학생 어린이가 찼는데 골대를 맞고 들어간 경우여서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골이었다. 하지만 첫 번째 골과 세 번째 골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이었다. 내 몸 가까이 날아오는 공이어서 나는 반사작용으로 몸을 움직이긴 했지만, 막을 수 있겠다 싶은 순간에 공은 골문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우승을 놓쳐 아쉽긴 했지만, 실로 수십 년 만에 처음 축구경기를 해보았으니 그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결혼생활 25년 만에, 그것도 노인 연령으로 접어든 시기에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 골키퍼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지난 2007년이던가, 천주교 대전교구에서 지구대항 축구대회를 대전 갑천변 운동장에서 했었다. 그때 우리 태안성당은 서산지구 대표로 출전을 하게 됐다. 그때 나는 유니폼을 한 번 입어보고 싶어서 나름대로 아침마다 연습을 꽤 많이 했다. 하지만 내게는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이 탓이었다. 그때 얼마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그때로부터 6년 만에 운동장 안에서 축구경기를 해보았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헤아려보니 38년만이었고, 아내에게 처음으로 내 몸에 남아 있는 골키퍼 폼을 보여준 셈이었다. 행사를 끝까지 지켜보고 5시 50분쯤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동행해준 아내에게 감사하며 이런 말을 했다.

"만 65세, 노인 연령으로 접어든 시기에 오늘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을 했네. 내가 축구경기를 했다는 거, 보기에 따라선 경이적인 일이기도 할 거야."

(편집부 기자님께. 미처 카메라를 준비하지 못해 13일 대전인재개발원에서 있었던 <오마이뉴스> 운동회 장면들을 찍지 못했습니다. 적당한 사진을 두어 장 할애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축구경기#골키퍼#<오마이뉴스>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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