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만남과 적당한 음주로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침을 준비하며 하루 더 묵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의는 고맙지만 가야할 길이 남았기에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주머니는 창(네팔 전통술) 한 병과 안주거리를 배낭에 넣어 주었습니다. 마치 친정에 온 딸을 보내는 어머님처럼 이것저것 챙겨 주시는 모습에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쉬운 이별아주머니 가족과 기념사진을 찍고 이메일을 주고받았습니다.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은 네팔에서 다시 인연이 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이 그것뿐이기에 작은 아들 '지미'에게 몇 번씩 당부했습니다. "카트만두에 돌아가면 잊지 말고 꼭 연락하라"고….
트레킹 기간 동안 로지에서 숙박을 하고 난 후 마무리는 항상 "계산"이었습니다. 출발 전 포터가 계산서를 가져 옵니다. 계산서를 확인하고 비용을 정산하고 출발하는 것이 매일 아침 일상입니다. 오늘은 계산서도 요금도 묻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조금 넉넉한 용돈을 주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트레킹에서 랑탕 히말라야의 아름다운 풍광보다 어젯밤 인연이 소중합니다. 사물보다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겠지요. 하룻밤의 인연인데도 저도 아주머니 가족도 모두 아쉬운 마음입니다.
오늘은 쿠툼상(2410m)을 출발하여 이번 트레킹의 마지막 숙박지인 치소파니(2215m)까지 갈 것입니다. 아랫마을 굴반장(2130m)에 학교가 보입니다. 마을 규모는 크지 않지만 학교 때문에 주변 지역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윗마을과 아랫마을에서 등교하는 모습이 옛날 제 고향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복을 단정히 입은 학생, 지각임에도 여유를 가지고 걷는 학생, 머리에 무스를 발라 멋을 낸 학생 등 다양한 아이들 모습이 보입니다. 등교하는 학생 모두는 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자 희망이기에 부모와 아이들의 바람이 교육을 통해 성취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다랑이 논의 정경해발이 점점 낮아지면서 마을을 자주 만납니다. 마을 주위에는 히말라야 설산 대신 삶의 터전인 다랑이 논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 정상까지 까마득하게 걸려있는 손바닥 크기의 논과 밭에는 수백 년의 삶의 역사가 엉켜있습니다. 트레커인 저는 환상적인 다랑이 논에 감탄을 보내지만 주민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을 극복한 인간 승리의 장일 것 같습니다.
다랑이 논 사이에는 핏줄 같은 가느다란 길이 마을과 마을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눈에 띄지도 않는 작고 불편한 길을 따라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부모들은 저자거리를 왕래합니다. 힘들고 불편한 길 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팍팍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산 중턱에 걸려있는 다랑이 논과 가느다란 선처럼 연결되어 있는 작은 길은 그들의 삶이자 희망이기에 오늘도 열심히 산을 오르고 길을 걷습니다.
치플링(2170m)의 찻집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초르텐(불탑) 아래 얌전히 자리 잡은 로지는 사방이 트여 있습니다. 제가 걸어온 설산 모습부터 능선을 가득 채운 다랑이 논까지 한 눈에 들어옵니다. 허술한 로지와 달리 주위는 예쁜 화분으로 장식했으며 주방은 그릇과 컵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볕 좋은 야외에서 그릇을 소독하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히말라야를 닮은 그들의 마음과 청결이 제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버스의 유혹파티파양(1830m)에 도착하니 버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버스는 문명의 상징이자 소통입니다. 다시 세상에 온 것 같습니다. 순간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버스를 타면 오늘 중에 카트만두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착한 포터 인드라에게 의견을 묻자 목적지인 치소파니까지 걷자고 합니다. 그제 만난 독일 처녀도 치소파니의 아름다운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기에 버스 곁을 지나쳐 걷습니다.
파티파양(1830m)부터 치소파니(2215m)까지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더구나 로지가 없어 아침을 먹은 후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배고픔을 참으며 오후 2시께에 치소파니에 도착하였습니다. 치소파니는 핼람푸 히말라야 전경과 내가 걸은 고사인쿤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전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트만두와 가까워서인지 로지에 전기가 들어오고 온수도 나옵니다. 이제 문명 세계에 온 것 같습니다. 트레커 대신 여행자들이 숙소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지프차가 카트만두를 왕래하고 있으며 깨끗한 숙소와 빼어난 전망 때문에 나이가 있는 여행자들이 많이 찾는 곳 같습니다. 저는 여행자들이 없는 한적한 숙소에 자리를 잡습니다.
마지막 밤세상에 가까울수록 인심은 사나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저녁식사를 끝내자마자 주인은 식당 난로를 꺼버리고 텔레비전 전원을 내렸습니다. 더구나 포터에게 식사도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각박한 주인의 모습에 화가 납니다. 늦은 밤, 입이 궁금해 맥주와 콜라 한 병씩을 주문했습니다. 뚜껑에 녹이 가득한 콜라를 오픈하여 줍니다. 항의를 하자 마지못해 플라스틱에 든 것으로 바꾸어 주며 비굴하게 웃는 모습에서 히말라야가 아닌 장거리 모습이 보입니다.
트레킹의 마지막 밤입니다. 혼자 12일을 걸었습니다. 고소와 감기 때문에 고생하였으며 콧물은 코를 헐게 만들어 지금도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매일 밤 불면과 추위로 힘든 밤을 보냈으며 고사인쿤드에서는 로지가 열려 있지 않아 정말 힘든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