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소설의 주인공은 대부분 형사 또는 탐정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수사관의 입장에서 범인을 추적하는 방식으로 사건이 묘사되는 것이다.
반면에 흔하지는 않지만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도 있다. 고전추리소설 중에서는 크로프츠의 <크로이든발 12시 30분>, 리처드 힐의 <백모 살인사건>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일본작가 기시 유스케의 <푸른 불꽃>도 같은 범주에 해당한다.
이런 작품들의 특징 중 하나는 범죄를 구상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세밀하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어떤 이유로 사람을 살해하려고 하는지, 살인의 수단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는지 등이 꼼꼼하게 서술된다.
마찬가지로 그 과정에서 범죄자의 내면도 함께 묘사하고 있다. 범죄를 구상할 수밖에 없을만큼 궁지에 몰린 사람의 심리, 범죄 이후에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의 모습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 이런 소설의 매력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이런 작품을 읽다보면 범죄자의 입장에 공감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가 묘사하는 절도의 세계마이클 코넬리의 2000년 작품 <보이드 문>에도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잔인한 연쇄살인범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에서 활약하는 전문 도둑이다. 절도는 살인에 비해서 비교적 덜 심각한 범죄로 취급되지만, 전문 절도범이 가지고 있는 기술은 살인에 필요한 기술보다 훨씬 정교하고 특수할 가능성도 있다.
<보이드 문>에도 절도범이 사용하는 다양한 장비가 등장한다. 야간투시경을 포함해서 핀홀 카메라, 마이크로파 전송기 등. 일반 가정집이나 호텔의 보안 및 감시장비들이 점점 첨단화되기 때문에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 장비들도 그만큼 발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은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인 캐시 블랙이다. 그녀는 몇 년 전에 크게 한 건을 노리다가 연인이자 절도 파트너인 맥스를 잃고 5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가석방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자동차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을 하지만 여전히 범죄의 꿈을 버리지 못한다.
캐시는 예전의 동료에게 다시 연락을 하게되고 그 동료는 캐시에게 라스베이거스에서 크게 현금을 챙길 수 있는 건수를 알려준다. 다만 그 장소가 예전에 맥스를 잃었던 그 장소라는 점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하지만 캐시는 이런 불길한 요소를 애써 무시하고 현장으로 향한다. 이번에 성공을 거두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절도범들이 가지고 있는 징크스'보이드 문(Void Moon)'이란 것은 다른 말로 '보이드 오브 코스(Void Of Course)' 상태를 의미한다. 하늘에 떠있는 달의 움직임과 관련된 이야기다. 달의 움직임을 도표로 그려보면 대부분 달은 어떤 별자리에 속해 있다. 하지만 달이 한 별자리에서 다른 별자리로 옮겨갈 때, 어떤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때가 생긴다. 그때가 바로 '보이드 문' 상태인 것이다.
어찌보면 별로 신경쓸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점성학에 집착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현상이 언제 발생하는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보이드 문>에서 캐시의 동료는 이와 관련해서 캐시에게 강력하게 조언을 해준다. 보이드 문이 발생하는 몇 분 동안에는 절대로 어떤 행동들을 하지 말라고.
절도를 포함한 모든 범죄를 성공시키려면 범죄자의 실력도 있어야겠지만, 거기에 더해서 운도 따라야 한다. 점성학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운을 달의 움직임과 연관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자기만의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달의 움직임도 하나의 징크스가 되는 것이다.
<보이드 문>을 읽다보면 절도라는 범죄도 연쇄살인 못지않게 어렵고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첨단장비들을 다뤄야하는데다 자기만의 징크스까지 관리해야 한다. 이런 어려움 때문에 작품 속에서 캐시는 한탕 크게 터뜨리고 잠적하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절도범들도 '한탕'에 대한 희망이 있기에 살벌한 범죄의 세계에서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보이드 문> 마이클 코넬리 지음 / 한정아 옮김. 랜덤하우스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