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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에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집에 다녀왔다. 어머니를 뵙기 위해서다. 해거름이 마당에 깔리는 시간, 어머니는 개에게 줄 죽을 끓이고 있었다.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개죽을 끓이는 어머니의 가슴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난 여태껏 그 흔한 카네이션 하나 가슴에 달아드린 적이 없다. 쑥스러워서다. 평상시 잘 해드리지도 못하면서 어버이날이라는 핑계 하에 꽃 한 송이 가슴에 달아드리는 걸로 1년 효도 다 했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창피하고 쑥스러웠다. 아마 그래서일 거다. 꽃을 달아드리지 못한 이유가.

 이정록의 시집 <어머니학교>
 이정록의 시집 <어머니학교>
ⓒ 열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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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곱씹으면서 읽는 책이 있다. 시집이다. 이정록의 <어머니 학교>다. 제목만 봐서는 어머니들이 배우는 학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시집 느낌도 안 든다. 처음 시집을 폈을 때도 그랬다. 투박한 시골 촌로 한 분이 턱을 바치고 있는 흑백 사진도 그랬고, 첫 시의 내용도 그랬다. 그래서 며칠 묵혀두었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의 맛이 맹맹한 맛이었다면 다음에 먹는 맛은 감칠맛이 낫다. 한 번에 꿀꺽 삼키는 맛이 아니라 입속에서 한참을 음미하면서 먹는 맛이 낫다.

갑자기 시를 이야기하면서 무슨 음식 타령이냐 하겠지만 이정록의 <어머니 학교>는 구수한 청국장 맛이 가득하다. 어머니의 손 냄새, 몸 냄새, 얼큰하고 구수한 마음 냄새까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속에 세상살이가 들어있다. 자식 생각하는 어미의 속깊음도 숭늉처럼 들어있다.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몸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케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겠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한다.

- 사그랑주머니(어머니 학교1) -

사그랑주머니는 다 삭은 주머니를 말한다. 늙은 호박처럼 속은 다 삭고 겉모양만 남은 물건이다. 자식들 키우느라 모든 걸 주다보니 속이 텅 비어버린 우리들 어머니가 사그랑주머니다.

늙고 병들면 내팽개치는 세상이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흐물건한 거죽만 남기고 속은 텅 빈 부모들은 자식들의 무관심 속에 외롭게 살아간다. 그래도 부모는 자식들에게 뭔가 주려고 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한다.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섬겨야 한다'고. 늙은 어미가 젊은 자식에게 주는 또 다른 가르침이다. 늙으면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는 은근한 메시지다.

인생을 살다 보면 맑은 날도 있고 궂은 날도 있다. 보름달이 뜨기도 하고 그믐달이 뜨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믐달을 견디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의 눈물을 흘리기 일쑤다. 언젠가는 환한 보름달이 내 삶을 비춘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둠 속에 있을 땐 그것을 망각하곤 한다. 그런 자식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가로등 밑 들깨는
올해도 쑥정이란다.
쉴 틈이 없었던 게지.
너도 곧 좋은 날이 올 거여.
지나고 봐라. 사람도
밤낮 밝기만 하다고 좋은 것 아니다.
보름 아녔던 그믐달 없고
그믐 없었던 보름달 없지.
어둠은 지나가는 거란다.
어떤 세상이 맨날
보름달만 있겄냐?
몸만 성하면 쓴다.

- 그믐달(어머니학교 18) -

밤이 없는 낮이란 끔찍하다. 가로등 밑의 들깨는 낮이나 밤이나 밝아 쉴 틈이 없다. 쉬지 못하고 열매를 여물게 하기 위해 애를 쓰나 결국 쑥정이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밝은 것만 찾는다. 쉬면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살이에 애태우는 자식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한 마디 한다. '몸만 성하면 쓴다'고. 몸만 성하면 언젠가는 보름달이 뜰 거라고. 그리곤 세상살이의 힘듦을 넋두리처럼 자식에게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당부한다.

허물없는 사람 어디 있겄냐?
내 잘못이라고 혼잣말 되뇌며 살아야 한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 번 더 보는 게 나은 거다.
저 혼자 웬 산 다 넘으려 나대지 말고 말이여.

                      - 가슴 우물(어머니학교 48) 중에서 -

시의 화자는 어머니다. 시인이 쓴 것이겠지만 일흔두 꼭지의 시편들은 모두 어머니의 입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가슴에 와 닿는다. 그래서 시인은 말머리에서 '내가 분명했으나 분명 내가 아니었다. 체 어머니로 변하지 않은 오른손이 쏟아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이 시의 제목은 <어머니학교>다. 그러나 난 내내 시편들을 눈으로 마음으로 담으면서 학교가 아니라 <어머니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흙냄새, 된장냄새 나는 어머니의 노래 말이다.

시를 읽다보면 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내게 말을 걸듯이 걸어옴을 느낄 수 있다. 혹 어머니가 그립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이가 있으면 이 시편들을 담아봐라. 가슴 우물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어머니학교> /이정록 시집 / 열림원/ 11,000원



어머니학교 - 이정록 시집

이정록 지음, 열림원(2012)


#어머니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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