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구멍만한 예지(叡智)를 바라면서 사는 자의 설움이여너는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오늘이 헐벗은 거리에 가슴을 대고뒤집어진 부정이 정의가 되지 않더라도그러면 너의 벗들과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이바늘구멍 저쪽에 떠오르리라축소와 확대의 중간에 선 그들의 얼굴강력과 기도가 일체가 되는 거리에서너는 비로소 겸허를 배운다바늘구멍만한 예지의 저쪽에서 사는 사람들이여나의 현실의 메트르여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이여강력한 사람들이여……(1957)우리는 앞에서 '절제'를 노래한 <봄 밤>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듭 되풀이되는 "서둘지 말라"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수영이 <봄 밤> 직후에 쓴, 총 10행의 <채소밭 가에서>는 살아가는 힘을 노래합니다. 그 시상은 "기운을 주라 더 기운을 주라"에서 점층과 반복을 통해 강조됩니다. 이 시구는 모두 열 번이나 되풀이됩니다.
이들 작품을 잇는 <예지>는 '이웃'을 노래합니다. 화자 '나'(1, 2연에서 2인칭으로 대상화한 '너'도 화자가 아닐까 합니다)는 지금 "바늘구멍만한 예지를 바라면서 사는 자"(1연 1행)입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 그는 '설움'에 빠져 있습니다.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1연 2행)며 자포자기하듯 선언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자 "바늘구멍 저쪽에 떠오르"(2연 3행)는 이들, 곧 '예지'를 가진 이들이 보입니다. "너의 벗들과 / 너의 이웃사람들의 얼굴"(2연 1, 2행)이 그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은 화자에게 현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자에게 "현실의 메트르('주인, 지배자, 선생'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3연 2행)"가 됩니다.
수영이 스스로를 낮춰가면서 벗과 이웃들에 눈길을 돌린 이유는 그들의 강인한 삶 때문이었을 겁니다. 수영이 관심을 기울였던, 아주 인상적인 어느 이웃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강의 언덕동네에서 50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함께 산 떡집 식구들이 그 주인공들입니다. 수영의 산문 <멋>에 그들의 이야기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그 글의 주인공은 떡집 며느리입니다. 그녀는 저녁마다 워커힐로 출근을 하는 댄서였습니다. 그러니 수영의 표현대로, 평생을 인절미를 만드느라 손가락 끝이 바둑돌처럼 반들반들해진 그 시아버지가 그녀를 곱게 볼 리가 없었겠지요. 그런데 시아버지가 이렇게 된 데에는 동네 사람들의 몫이 컸던 모양입니다.
아들(떡집 며느리의 남편)은 한때는 챙이 좁다란, 장동휘가 갱 영화에 쓰고 나오는 모자에 깃털까지 달고 다녔고, 키가 작다고 해서 구두 뒤꿈치를 반 힐처럼 돋우어서 신고 다녔다. 두 내외가 우리 집 앞길을 지나갈 때면, 한때는 우리 내외까지 밥을 먹다 말고 마루로 뛰어나가서 내다보고는 했다. 그들의 필사적인 메이크업과 분장에는 처절한 비장미까지 있다. 마포의 새우젓골로 이름난 완고하고 무식한 동네사람들이 시아버지한테 그 며느리의 칭찬을 할 리가 없는 것은 뻔한 일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쪽)수영은 호시탐탐(?) 그 집안의 두 사람, 정확히 말하면 시아버지와 며느리에게 눈길을 줍니다. 수영이 보기에 그들 사이는 "완전한 방관자와 방관자의 관계"였습니다. 그래도 수영의 아내가 떡집 시아버지 앞에서 며느리 칭찬을 하면 그 시아버지가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를 보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백수같은 아들을 대신해 생활의 일선에서, 그것도 댄서로 일하는 며느리에 대한 미묘한 이중 심리를 그렇게 드러낸 것이었겠지요.
수영이 떡집 노부부에 관심을 두고, 그 집의 며느리에게 필요 이상의(?) 눈길을 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수영은 "떡집 며느리는 떡집 며느리"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필사적으로 화장을 하고 분장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밥벌이'에서 찾고 있습니다. 수영이 생각한 진짜 '멋' 또한 그런 살아 있는 생활 속의 '멋'이 아니었을런지요.
설움의 밀실에서 나온 수영에게, '밥'을 위해 하루하루 끈질기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수영이 "비로소 겸허를 배"(2연 6행)우는 것도 바로 그런 이웃들이 '밥벌이'를 하며 고군분투하는 일상의 현장이었습니다. 수영이 보기에 진짜 멋진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생활의 향기가 생활인이었던 셈이지요.
닭을 기르고 채소를 가꾸며 땀을 흘리는 노동의 기쁨을 맛본 수영에게 '밥'은 그 어느 것보다 숭고했습니다. 그 '밥'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들이 수영에게 "어제와 함께 내일에 사는 사람들"(3연 3행), 곧 시간을 초월해 살아가는 현자(賢者)의 모습으로 다가온 이유도 여기에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강력한 사람들"(3연 4행)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롭고 밝은 마음인 '예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지의 힘으로 수영은 1957년의 한복판을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