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인 2010년 7월. 이탈리아 볼로냐 거리는 뜨거웠다. 말그대로 아스팔트는 지글거렸고 당시 특별기획 취재 차 이탈리아에 갔던 현장취재팀은 연신 땀을 훔쳐 닦았다. 당시 우리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 등 잇따른 경제위기 이후 새로운 대안을 찾는데 골몰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이탈리아 애밀리아로마냐주(州)의 볼로냐였다. 경제위기 속에도 해고 없이 높은 성장을 이끌어온 도시였다. 내로라는 대기업도 없지만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도시 중 하나였다(관련기사 :
잘나가는 대기업도 없는데, 왜 세계가 주목하지?).
이곳을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장이다. 일주일여 동안 우리는 볼로냐 곳곳을 누볐다. 취재가 끝나갈 즈음에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뜬금없었다. "경제학 책 봤어?"라고 말이다. 기자는 "대학 교양수업시간에 (경제학) 원론 정도요"라고 답했다. 이어 다시 "그나마 다행이네"라며 "이제 경제학 교과서를 버려야 해"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협동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경제가 어떻게 실제로 구현되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봤다. 당시만해도 우리에게 '사회적 경제'는 여전히 낯선 단어였다. '협동조합'은 농협·수협을 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협동조합'과 '기업'을 갈라놓고 볼 뿐이었다. '협동조합도 기업'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와의 '사회적경제' 취재 여정은 지난해 캐나타 퀘벡 주(州)로 이어졌다(관련기사 :
퀘벡의 조용한 혁명이 세상을 바꾸고 있다).
퀘벡 모델 역시 경제위기에서 빛을 낸 사례다. 협동조합과 정부·시민사회 등이 어떻게 사회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위기를 극복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그는 "퀘벡의 몇 가지 네트워크와 지원 사례 등은 당장 서울시에서도 벤치마킹해 볼 만하다"고 평했다.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는 이미 새로운 사회적 경제의 실험장이 되고 있다.
경제학 싫어하는 까칠한 경제학자가 말하는 사회적 경제그의 사회적경제에 대한 고민이 최근 책으로 나왔다. <협동의 경제학>(레디앙)이다. 기자에게 '경제학 책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그가 내놓은 '경제학' 책이었다. 물론 이 책은 그 혼자 낸 게 아니었다. 정 원장은 "이수연 연구원이 없었으면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 연구원은 지난해 퀘벡 취재 때도 함께했다. 그들과 오랜 만에 마주앉았다.
- 책 첫장에 아예 대놓고 '경제학이 싫다'고 쓰셨던데."(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예전부터 그래왔다. 막상 써놓고 보니까, 좀 그렇지만…."
- 서울대 경제학과 78학번이시니까, 경제학 공부만 햇수로 꽤나 된 것 같다. "35년이네. 그런데 아마 제대로 (경제학을) 공부한 시간은 4년이 채 안될 수도 있다."
그는 '제대로' 무엇을 공부했는지, 아니면 공부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다. 박현채 민족경제론에 빠져 공부하던 때를 일컫는지, 아니면 최근 몇년새 부쩍 주창해온 '사회적 경제'를 말하는지…. 하지만 그 스스로 변명했듯이, 기존 주류경제학의 사고를 깨는 것은 분명했다. 이미 그의 책상에 수북이 쌓여있는 행동경제학을 비롯한 각종 사회적경제를 둘러싼 논문들이 이를 보여준다.
- 책을 보니까 '경제학은 이미 죽었다'고 했다. 그리곤 다른 경제학이 필요하다고."현재의 주류 경제학의 논리 자체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비현실적이라는 이야기다. 세계에서 내로라는 잘난 학자들이 수학적 증명에만 매달려있다. 누구하나 제대로 금융위기를 말한 적이 없다. 우리 주변의 실업이나 부동산 거품 등 민생문제를 딱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경제는 시장이 아니다"라고 했다. 게다가 경제학에 시장경제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정 원장의 이야기다. 그의 냉소적인 말투는 여전하다.
"현실과 상식에도 맞지않는 이야기들이 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들의 약탈적인 대출이 금융위기를 가져오고, 사교육 경쟁은 우리 아이들을 사지(死地)로 내몰고 있잖아요. 지구온난화는 이대로 가면 인류가 다 죽는다는데…. (웃음) 이것을 말이예요. 우리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시장이 다 알아서 해준다는 게 요즘 경제학이예요. 이게 맞을까?""개성공단 해법? 재벌 소비재산업 유치하면 해결"그의 이같은 합리적(?) 의심이 '협동의 경제학'을 이끌어냈다.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지 않고 서로 배려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실제 우연히 손에 쥔 1만 원이라는 돈을 두 사람이 어떻게 나눠 갖는지를 관찰한 실험(최후통첩게임)을 통해서 입증된다(자세한 내용은 책을 보면 된다, 어렵지 않다).
정 원장은 "시장도 돈 있는 사람들의 수요만 생각할 뿐"이라며 "돈 없는 사람들의 필요는 무시하는 근본적인 한계와 시행착오 등 때문에 (시장의) 실패가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개인과 사회의 이익 추구과정에서 벌어지는 딜레마도 마찬가지다.
- 진보든 보수든 어떤 정권이든 사회적인 갈등이 계속 있었던 것 같다."그럴 수밖에 없다. 시장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다. (기존 경제학에선)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곧 사회전체의 이익 극대화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부동산 투기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성공단 문제도 그렇다."
치킨게임과 사슴사냥게임 |
치킨게임: 치킨은 겁쟁이를 뜻한다. 매-비둘기 게임(Hawk-Dove Game)으로도 불린다. 매는 돌진하는 미친놈이고, 비둘기는 도망가는 겁쟁이다. 매와 비둘기만 만나면 언제나 매가 이긴다. 하지만 매와 매가 만나면 서로 멸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초래된다.
사슴사냥게임: 사슴과 토끼를 사냥하러간 사냥꾼들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들에게 더 큰 이득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게임. 토끼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한명의 사냥꾼으로도 충분하다. 대신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두명의 사냥꾼은 힘을 합쳐 자신이 맡은 길목을 지켜야 한다. 혼자 토끼를 사냥해서 얻는 고기보다 사슴을 사냥해 반으로 나눈 고기가 훨씬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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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공단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곧장) 원래 남북관계가 치킨게임이다. 여기서 미친 놈은 북한이다. 물론 요즘 남한 정부도 크게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북한이 남한보다는 앞뒤 안가리고 돌진할 수 있다."
- 현 정부들어서 외국에선 남북간 전쟁까지 언급할 정도였으니."(고개를 흔들며) 전쟁나면 남한이 이길 것이다. 경제력에서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데…. 하지만 남한은 가진 게 많아서 잃을 것도 많다. 이 때문에 쉽게 미친 놈이 될 수 없다. 만약 북한이 질 때 지더라도 서울 향해 미사일을 쏘면, 남한은 겁쟁이나 바보가 될 수밖에 없다."
그의 개성공단 해법은 단순했다. 남북이 서로 협력하거나 협동하면 갈등 국면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이득이 크다는 것을 만들어주면 된다. 이 과정에서 서로 간의 신뢰가 중요하다. 정 원장은 이를 게임이론으로 이렇게 설명한다. "남북간의 대립을 치킨게임에서 사슴사냥게임으로 바꾸면 된다"고…. 그의 말을 옮겨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은 이거예요. '우리는 협동할 것이고, 이때 너희도 협동하는 것이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는 거예요.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사업 등이 그렇죠. 근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 상호주의 전략을 들고 나왔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데, 한마디로 '네가 잘하면 나도 잘하고, 네가 잘못하면 나도 잘못한다'는 거죠. 협동과 응징인데, 문제는 응징에 방점이 찍힌 거예요. 서로 잘못하니 응징만 반복되고, 북한 입장에서는 협동보다는 배반할 때 이득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는 결국 "미친 놈을 상대하면서 게임을 이렇게 바꿔놓는 사람이 바보"라고 말했다. 정 원장은 "여유있는 쪽에서 한 번은 협동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했다. 한 번은 관대한 입장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그것이 현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첫걸음'이라는 것. 그는 "개성공단에 삼성같은 재벌의 소비재 산업을 유치하면, 북한도 남한 정부의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근혜 창조경제? 수첩에서 어떻게 창의 나올까"그와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박근혜 정부의 평가로 이어졌다. 특히 '창조경제'로 일컬어지는 박근혜노믹스에 대해 묻자, 곧장 고개를 흔든다. 특유의 냉소적인 웃음도 이어졌다.
- 현 정부의 창조경제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하시나."(창조경제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상상력과 창의력이 곧 경쟁력'이라고 하던데…, 말은 맞다. 그런데 지금 구조가 그런가."
- 지금 경제부처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부처의 정책에 '창조'란 말이 들어간다."(웃으면서) 그러니까…. 공무원들은 아마 책상머리에서 땀 좀 흘렸을 것이다.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게 어디서 나올까. 빈 공간(니치)이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숨 막히는 경쟁구도와 꽉 막힌 구조에서 창의성이 나올까."
그는 "창조경제가 제대로만 되면 좋다"고 말했다. 대신 현재의 재벌 경제시스템을 그대로 놔두고서 제대로 이뤄질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박근혜 대통령까지 앞장서 외쳤던 '경제민주화'도 창조경제를 위해서 먼저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지금같은 입시경쟁 시스템에서 창의성을 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거죠. 당장 내일부터 일제고사부터 없애보세요. 그리고 정부 스스로 빈 공간을 만들어보도록 해보세요. 정보를 공개하고 시민과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보세요. 물론 별로 가능성이 안 보이지만…. '박근혜 수첩속의 대한민국'으로는 경제를 제대로 살리기 어렵죠."그래도 그에겐 아직 희망의 끈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서울의 실험이다. 박원순 시장이 추진중인 공동체 중심의 사회적 경제정책이 그것이다. 또 역설적으로 지난 이명박 정부 때 만들어진 협동조합기본법에 따라 전국적으로 다양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상에도 주목한다.
그는 "사회적 경제는 신뢰와 협동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며 "물론 신뢰와 협동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전국적인 협동조합 열기에 대해 걱정도 앞선다. 한꺼번에 수천여 협동조합이 만들어진 만큼 파산하는 곳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협동조합에 대한 기본 원리부터 시작해서 주변 사람들과 충분히 소통하라는 당부도 이어졌다.
얼추 그와의 이야기가 두 시간을 넘어섰다. 이수연 연구원도 인터뷰 내내 옆자리를 지켰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그 역시 요즘 사회적 경제에 푹 빠져있다. 정 원장의 각종 강연과 원고 등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생각도 다듬어갔다고 했다. 이 연구원은 "사회적 경제를 통해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상상이 현실이 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