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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 전철 양수역에서 출발하여 국수역으로 간 뒤 걸음을 계속하면 양평까지 갈 수 있는 걷기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16일 하늘은 '그 길로 한 번 나서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속삭인다. 하늘은 아주 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진한 초록은 푸른 하늘과 경계를 맞댈 때 그 풍경이 더 돋보인다. 흐린 날씨는 안개가 슬쩍 풍경을 숨기 듯이 가려줄 때라면 모를까 풍경을 가라앉히게 하기 마련이다. 푸른빛 하늘에 구름이라도 몇 점 협조를 하면 풍경의 아름다움은 훨씬 더 매혹적이다. 때문에 맑은 하늘은 사람들의 걸음을 집밖으로 끌어내는 강력한 유혹이 된다.

양평의 걷기길은 물소리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변으로 거닐 수 있기에 그런 이름이 붙은 듯했다. 한 번 가본 사람들이 대체로 후한 점수를 주었고 특히 양수역에서 국수역까지의 1코스에 대한 평가가 좋았다.

어딘가 마음에 두었던 곳이 있으면 맑은 날의 하늘은 집 밖에 있어도 어느새 집안으로 들어와 바깥으로 나가보라며 사람의 등을 떠민다. 결국 못이기는 척 날씨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많은 것들을 만났다.

포옹이라도 하려는 듯 다가오는 버스

하팔당 버스 정류장
 하팔당 버스 정류장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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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버스 정류장을 만났다. 전철을 버리고 버스를 탔기 때문이었다. 전철을 버린 것은 순전히 날씨탓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상당수의 구간을 어둠속을 기듯이 가야 하는 전철에 가는 동안의 시간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양수리를 가려면 짧게 짧게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버스는 팔당대교를 건너자 마자 사람들을 내려주고 그러면 그곳의 하팔당 마을 정류장에서 양수리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요즘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에는 버스 정류장에도 전광판이 설치되어 버스 시간을 알려준다. 하지만 사람이 뜸한 이곳 버스 정류장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아무런 정보가 없는 세상에서의 기다림은 막막하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자로 잰듯 살아야 하는 빡빡한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을 풀어놓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오히려 마냥 좋을 때가 많았다. 이번에도 같았다.

게다가 이곳의 버스 정류장은 오는 버스를 멀리서부터 마중할 수 있었다. 아득하도록 길게 일직선으로 뻗어있기 때문이다. 버스는 마치 신파조의 영화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꼭 어느 정도 거리를 달린 뒤에 서로 부둥켜 안고, 몇 바퀴를 돌 듯이 그렇게 아득한 거리를 달려와 포옹이라도 하듯이 승객을 싣는다.

양수리 풍경
 양수리 풍경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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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을 만났다. 양수리에서 내려 양수역으로 올라가자 역앞에 물소리길의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그 길로 들어서자 마자 연밭을 앞에 두고 산책로 하나가 그림 한 장을 내민다. 나무가 잎을 부풀려 그늘을 만들고 하늘에선 마치 나무를 도와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구름을 부풀려 함께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에 자전거를 타던 사람들이 잠시 쉬면서 휴식을 취한다. 사람들은 그 풍경 속을 수다로 잔뜩 채운다. 풍경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양수리 풍경
 양수리 풍경
ⓒ 김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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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변의 배 두 척을 만났다. 연잎이 둥둥 떠 있는 양수역 앞쪽의 호수 풍경이 좋아 물소리길을 따라가야할 걸음이 잘 진척되질 않았다. 마침 수련도 많이 피어 꽃에게 빼앗긴 시선을 거두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돌다보니 호수 한켠에 묶어둔 배 두 척이 눈에 들어온다.

배에게 슬쩍 말을 건넨다. 배야, 너는 좋겠다. "왜?" 너는 몸은 작은데 그 작은 몸에 이 넓은 연못을 다 실을 수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너도 좋은 거야." 응? 나도? "생각을 해봐. 그 작은 발에 길고 먼 길을 다 실을 수 있잖아. 그리고 그렇게 걸으면 그 길의 풍경도 다 실리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배만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배와 서로 좋은 걸 주고 받았다.

양평 물소리길
 양평 물소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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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길에선 가끔 사람을 만났다. 한적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둘씩 짝을 지어 걷는 경우가 많았다. 길의 둘은 대개 말없이 걸었다. 걷는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작품이 됐다. 아름다운 풍경이 도와줘서 그런 듯하다. 우리가 걸을 때, 한순간 우리가 아름다울 수 있도록 풍경이 돕는다. 사람들은 걸으면서 사실은 풍경의 아름다움에 물든다.

밤나무
 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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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를 만났다. 밤꽃이 한창이었다. 이 계절이 지나면 가시가 신경질처럼 뻗친 밤송이를 잔뜩 매달게 될 것이다. 밤나무가 흔한 동네인 듯 산이 온통 밤꽃으로 하얗게 덮인 곳도 많았다. 길을 걷다 보면 향기를 손처럼 뻗어 내 뒷머리를 툭툭친다. "이봐, 나 여기 있다구. 얼굴이나 한번 보고가." 두리번거리면 꼭 눈에 잡히는 거리에 서 있었다.

회춘한 듯한 무덤, 풀 때문인가

무덤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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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소리길은 여기까지였다. 물소리길이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에서 그만 길을 놓치고 말았다. 어디로 가는 길인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놓친 길에서 가장 먼저 무덤을 만났다.

무덤의 봉분에는 푸른 풀이 잔뜩있었다. 풀 때문에 마치 다시 회춘한 듯 보였다. 가지런한 잔디로 머리를 하고 있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부용산 숲길
 부용산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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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만났다. 길의 경사는 완만했다. 완만한 경사가 그만 길을 잃었다는 생각을 지우고 그 길을 계속 걷게 만들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아무래도 길을 잘못들었다는 판단이 서기는 했지만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오래 걷고 말았다. 잘못든 길도 일단 들어서자 고집이 생겼다. 가끔 길을 잃어 오히려 길을 찾을 때도 있다.

햇볕
 햇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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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의 조각을 만났다. 나뭇잎 위에서 놀던 햇볕이 나뭇잎 사이의 틈새에 빠져 우수수 숲길로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흔드는 것은 머리 위 높은 곳에 자리한 나뭇잎이었지만 그때마다 숲길에 떨어진 햇볕의 조각도 함께 흔들렸다. 덕분에 그늘로 덮인 숲길이 반짝반짝했다.

갈잎
 갈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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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흔적을 만났다. 갈잎에 꽃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아카시아 꽃이다. 아마도 아카시아꽃이 한창일 때 이 길을 지나갔으면 이곳에선 잠시 그 향기에 묻혔을 것이다. 과거가 되어버린 향기의 기억을 이제는 갈잎이 그 푸른 손에 올려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요일도 일하는 개미

개미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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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를 만났다. 개미는 일요일에도 일을 한다. 하긴 사람들 가운데서도 일요일날마저 바쁘게 보내야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갑자기 개미도 쉬는 날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우린 개미가 아니니까 사실 개미처럼 살면 안되는데. 개미도 아닌데 개미처럼 일만하는게 바람직하게 선전이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산다. 그래도 개미들은 오늘 기분이 좋아보였다. 아주 넉넉한 식량거리 하나를 마련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정표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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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를 만났다. 이정표는 길을 안내하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때로 이정표는 내가 길을 잘못들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넌 완전히 잘못왔어." 이정표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물소리길을 찾아왔는데 나는 그만 산소리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난 고집을 부린다. 이 세상에 잘못온 길이란 없어. 내가 가면 오늘 이 길이 남다른 길이 될 거야. 난 이정표의 얘기를 무시해 버렸다.

숲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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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만났다. 사진에는 소리를 담을 수가 없다. 우선 이름모를 새소리가 있었다. 서너 번 연주를 해주었다. 아름다움 소리였다. 어떤 주장도 없이 아름답게 울기만 했다. 뻐꾹이 소리도 들었다. 뻐꾹뻐꾹 반복되는 음으로 산을 채우고 있었지만 듣기에 좋았다. 매미소리도 들었다. 벌써 매미인가 싶었지만 졸지에 산행이 되어버린 걸음의 끝에서 잠깐 매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바람 소리가 있었다. '쏴쏴' 하며 지나갈 때면 마치 바람이 파도를 끌고 숲을 지나는 느낌이 났다.

나무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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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무성한 나무를 만났다. 사람 하나 없는 그 나무 밑에서 나는 나무 얘기를 나누었다. 나무가 왜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줄 알아? 여름내내 나무는 그늘을 펼치고는 그 그늘을 들고 있거든. 얼마나 무겁겠어. 아마 나뭇가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일 거야. 그러니 나무도 가을에는 쉬고 싶은 거라고. 사실 나무는 오매불망 겨울만 기다리며 여름을 견디는 거지. 나무가 맞다고 바람이 불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불상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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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은혜를 만났다. 내려올 때도 길을 잘못들어 결국 약간 헤맨 끝에 부용사란 절로 내려왔다. 신원리에 있는 절이었다. 법당을 연꽃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독특한 절이었다. 땀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보더니 절의 신도 한 분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물을 한 컵 내다주었다. 부처님께 절로 감사한 마음이 되었다. 부처님, 그 물맛 정말 좋았어요. 나중에 목마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갚을게요.

농촌 풍경
 농촌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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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만났다. 모내기를 끝낸 마을이었다. 모내기를 하고 논에 물을 채우자 산그림자가 논두렁을 따라 슬쩍 논으로 몸을 눕혀놓고 있었다. 밤꽃이 그득한 작은 야산이었다. 모가 자라 벼가 되면 그때쯤 산그림자는 이제 볏속으로 숨을 것이다.

이곳의 벼는 그냥 익어가는 것이 아닐 듯 싶다. 내가 걸었던 부용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로 흐르고 있으니 그 산의 기운이 산그림자로 누운 논에선 그 산의 숲길에서 내가 만난 그 많은 만남들이 한해동안 두런두런 대화로 이어지며 벼로 익어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벼를 거둘 때쯤 그 이야기도 함께 익어 볏알 속에 맛있게 들어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찾아가긴 물소리길이었는데 그만 표식을 놓치는 바람에 부용산 꼭대기로 이어지는 산소리길을 걷게 되었다. 내려와보니 물소리길이 어떤지는 몰라도 이렇게 계획없이 산소리길을 걸어 양수역에서 신원역까지 가고 물소리길은 그곳에서부터 걸어도 괜찮지 않겠나 싶었다.

잘못든 길에서 찾은 뜻밖의 길이었다. 혹시나 물소리길을 갔다가 길을 잃었다면 산소리길이 반겨줄 테니 굳이 잃은 길을 찾아 걸음을 돌리지 마시고 계속 그 길을 가시라. 산꼭대기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덤으로 안겨주는 좋은 길이다.


태그:#양수리 부용산,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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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갖고 돌아다니면 세상의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때마다 사진을 찍고 그들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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