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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 은행나무 / 2013
 <28> / 정유정 / 은행나무 / 2013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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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통제로 잠재워 놓은 두통이 또 언제 깨어날지 몰랐지만, 정유정의 문장들은 내 눈을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숨에 몰아붙였다. <7년의 밤>을 읽고 나서, 흥분하며 <내 심장을 쏴라>와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까지 찾아봤었던 기억이 되새김질됐다. 그녀의 서사에 다시 한 번 몰입되는 순간이 황홀했다. 두통도 날 멈추지 못하게 할 정도로.

전작들에서 보이듯이 정유정은 작품 속 공간을 폐쇄하고 정밀히 설계해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 폐쇄공간은 <내 심장을 쏴라> 에서는 정신병동이었고, <7년의 밤>에서는 세령호였다. 소설 <28>에서의 폐쇄공간은 서울 인근의 가상 도시, 화양이다. 규모는 29만 인구 급의 소도시로 확장됐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그녀의 작품들의 공간보다 백배는 더 혹독하고 무자비하다. 어느 순간 시작된 죽음의 불길은 화양의 겨울을 송두리째 삼키고, 등장인물들은 위태로운 걸음을 내딛는다.

주요 인물들의 사정은 서사를 따라 교차한다. 사람이 아닌 개 '링고'를 포함해서 인물들은 생존을 향한 몸부림을 치지만 운명은 가혹하고, 가혹하다. 읽다가 나도 모르게 '헉' 소리로 신음할 만큼. 그렇게 겨우 살아남은 인물의 생존에서도 희망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몰살의 현장, 생지옥 같은 화양시 구석구석의 비극들은 생명에 대한 통각을 강하게 자극한다.

작가는 몇 년 전 구제역 파동 때의 돼지 생매장 동영상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 됐다고 했다. 적어도 생명에는 똑같이 '한목숨'임을 거부하는 인간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을 것이다. 생명을 향한 근원적 양심의 짐은 서재형이라는 인물이 모두 떠안는다. 그는 알래스카에서 자신의 생명과 맞바꾼 썰매 개들의 죽음을 더 이상 되풀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그의 염원 만큼 잘 이뤄지지 않는다.

또 하나 <28>에서 주목할 부분은 폐쇄된 화양이다. 화양은 결국 1980년의 광주거리를 연상시키며 생존과 자유를 갈망한다. 살고 싶어서 진원교차로를 향하는 화양사람들의 행렬을 통해 33년 전 금남로의 행진을 보게 한다. 굉장히 노골적으로 표현된 이 장면이 나는 <7년의 밤> 이후의 정유정의 가장 빛나는 진보라고 생각한다. 읽으면서 작가의 나긋하지만 뜨거운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지금은 소설도 거칠어도 되는 때 아니냐고 말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있는 그대로 중계조차 해내지 못하는 방송사와 언론을 압도했다. 작가가 고마운 순간이다.

시청 광장은 진원동 남부 봉쇄선과 더불어 화양에서 가장 시끄럽고 위험한 곳이었다. 남부 봉쇄선이 차량 시위로 군대를 압박하고 봉쇄 해제를 요구하는 전방이라면, 시청은 대중이 연좌시위로 상황 개선을 요구하는 후방이었다. 전방의 요구가 "길을 열라"였다면, 후방은 "살게 해달라"였다. 불시에 갇힌 외지인에겐 의식주 해결과 감염에 대한 공포가, 시민에겐 현금, 생필품, 마스크나 고글 같은 방역 물품 조달이, 감염자나 그 가족에겐 통합거점병원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의료 지원이 중대한 관심거리였다. 생존이 달린 문제였고, 당연한 요구였다. 이를 세상으로 전달하는 건 시 당국도, 언론도 아니었다. 인터넷과 SNS 사용자들이었다.(본문 260~261쪽)

지금, 이 땅에도 여전히 작은 화양들은 외치고 있다. 국정원 사태를 규탄하는 광화문 거리의 사람들과 대한문 앞의 사람들, 송전탑 위의 사람들. 이들이 작은 화양이다. 모두, 결국, 다 같은 외침이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이들, 아니 우리들의 결말은 <28>의 결말과는 다른 것이기를 소원한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소설 속 '진원교차로'를 훌쩍 지나 모두가 사는 자유에 제발 다다르기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저의 개인 블로그(http://dressing.tistory.com)에도 올렸습니다.



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은행나무(2013)


태그:#28, #정유정,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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