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SNS가 세상을 사방에서 호령하고 있는 시대에 새롭게 시작한 월간 매거진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온갖 현란한 광고로 도배된 월간지가 아닌데, 그것도 '그리스도인의 문화나눔터'라는 한계를 지어놓고 발간하는 잡지가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도 독자를 한정시키는 것인데, 거기에 '문화'라는 더 제한된 영역을 만들어 놓고 제작되는 월간 잡지가 영상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을 잡을 수 있을까?

시도 자체가 대단하다. 내가 알지 못하고 있는 월간 잡지이니 만큼 그 연륜이 오래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용이 알차면,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으면 독자가 찾을 것이라는 당위만 가지고 만드는 월간지인 듯해 나를 조마조마하게 한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왜일까? 잡지다운 잡지를 대망해온 결과일 것이다. 언젠가는 내가 그런 잡지를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구상까지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어제(7월8일) 책을 두 권 선물 받았다. '그리스도인의 문화나눔터 오늘'이 그것이다. 우편으로 배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봉투를 생략한 채 두 권의 매거진이 집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달 포 전 쯤 된 것 같다. <오늘>의 원유진 기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오마이뉴스>에 내가 올린 '두메산골에 묻혀 있는 113년 된 후평교회'라는 기사를 읽고 도움을 청하는 메일이었다.

<오늘> 7-8월호 특집이 '산으로 갈까'인데, 두메산골에 묻혀 있는 100년이 넘은 후평교회를 취재해서 게재하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교회 목사님의 연락처를 원 기자에게 알려주었고, 그가 교회를 취재해 가면서 잡지가 나오면 나에게 한 권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 책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배달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그 월간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마치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처럼.

외화내빈(外華內貧)이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는 화려한데 실내용은 빈약하기 짝이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요즘 대부분의 월간지들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의 상대어는 외빈내화(外貧內華)가 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기는 볼품이 없는데, 속은 알차다는 말, 월간 매거진 <오늘>이 분명 그랬다. 정말 볼품없이 보였다. 명기되어 있지는 않지만 재생 용지로 제작했을 법하고, 기사 하나 하나에 가식적 꾸밈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나눔터 <오늘>의 표지면 배우 서태화가 표지 인물로 나왔다. 표지엔 그 흔한 알파벳을 넣지 않았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분문 내용을 소개하는 몇 개서 제목이 인쇄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나눔터 <오늘>의 표지면배우 서태화가 표지 인물로 나왔다. 표지엔 그 흔한 알파벳을 넣지 않았고, 오른쪽 아랫부분에 분문 내용을 소개하는 몇 개서 제목이 인쇄되어 있다. ⓒ 이명재
따지고 보면 '문화'는 우리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되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온갖 문화를 누리며 살아왔다. 그래서 모든 것을 문화사 속에 포함시켜 서술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노동 등을 문화의 하위 개념으로 놓고 서술하는 역사가 곧 문화사이다. 이것은 사람을 문화에서 떼어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인간 편리의 촉수를 만족시켜주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우리 인간은 문화의 범주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문화나눔터'라는 수식어를 단 <오늘>이 세상을 반역하는 몸짓으로 보이긴 하지만 해야만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회색 표지 면에는 배우 서태화의 팔짱 낀 웃는 얼굴을 담았다. 서태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가 크리스찬 배우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신까지 부정당하기 십상인 현실에서 소망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표지도 밋밋하다. 그 흔해빠진 알파벳 글자를 동원해서 사람의 눈을 현혹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속의 기사 중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 몇 개를 뽑아 오른쪽 하단에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기사도 온통 문화에 관한 것이다. '특집 산으로 갈까'에는 산 속에서 행하는 문화에 관한 글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문화>의 내용을 분류해서 다섯 파트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차례로 'PEOPLE'에는 각종 문화에 자신을 기꺼이 바치고 있는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LIFE'에는 생활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문화에 대한 소개이고 '2013 SPECIAL'에는 출판사 한 곳과 크리스찬 인디밴드를 소개하고 있다. 책과 음악은 문화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장르이다.

'SPIRITUALITY'는 '영성'이란 뜻인데, 한 선교단체와 CCM 창작연대를 소개하고 있고, 'CULTURE LENS' 에는 영화 공연 전시 음악 도서에 대한 소개 및 비평을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는 이 책의 압권(壓卷)은 부록과도 같이 마지막에 첨부되어 있는 '오늘, 을 읽다'라고 생각한다. 도서 영화 드라마 교육 언론 신앙 등에 대한 비평적 글들이 객관적 시각으로 서술되어 있다. 앞 쪽 글의 체제를 좌로 90도 돌려놓은 것 같아 시각적 호기심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가로 인쇄가 갑자기 세로 인쇄로 변화되어 기사를 읽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을 '그리스도인의 문화나눔터'라고 했지만, 그리스도인들만 보는 잡지로 그쳤다면 이 매거진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우리만의 축제'에 머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리더십이 한계에 도달해 있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매거진 <오늘>의 장점은 비 기독교인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전혀 부담없이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수 냄새가 도드라지지 않으면서 내면 깊이 흐르고 있는 예수의 향기, 오늘날의 문서 전도는 이런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금 우리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소위 신자유주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약육강식의 논리도 신자유주의를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축이라고 생각한다. 무한 경쟁,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 중앙 집중 등이 약육강식의 결과물들이다. 이것은 정녕 주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를 더듬어 보면 그분은 철저히 약자 중심의 사역을 펼치셨다. 예수님의 주 사역지도 수도 예루살렘이 속해 있는 유다 지방이 아니라 오클로스(민중)의 땅 갈릴리인 것만 봐도 그분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은 예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매거진이다. 나는 세 시간에 걸쳐 이 매거진을 정독했는데, 기사의 대부분이 중앙(서울)이 아닌 지방의 이야기들이었다. 그것도 큰 것만 추구하는 세상 조류에 맞지 않을 사소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 사소한 이야기는 내 이야기 같아 친근감이 갔고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웃들의 이야기여서 눈을 오래 붙잡았다. 독자를 손님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주인공이 되어 책을 독파하게 만드는 묘한 동기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매달 문화 전문 잡지를 제작해 낸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척박한 출판 풍토에서 아주 어려운 일임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인적 물적 자원이 적지 않게 요구될 것이다. 일반 월간지들은 그것의 큰 몫을 광고에 의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잡지의 격은 도외시한 채 호화찬란한 상업성 광고들이 지면을 도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저수준 잡지에 현혹되는 사람의 격도 따라서 추락하게 되어 있다. 필요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그리고 교양을 확장하기 위해 책을 보는 것인데, 읽을수록 격을 떨어뜨리는 책이라면 차라리 읽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오늘>의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혹시 광고가 있나 찾아보았다. 있었다. 하지만 광고 같지 않은 광고가 몇 개 끼어 있었다. 출판사의 책 광고와 공연 및 전시 광고가 전부였고, 뒷 표지 면에 올린 한미약품의 케어가글액 광고가 내가 보기에는 광고다운 광고로는 유일한 것이었다. 기왕 문화 전문 매거진으로 이 세상에 나왔으니 유료 구독자를 많이 확보해서 <오늘>이 어려움 없이 계속 나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거진의 내용을 알차게 채워야 할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나는 그런 가능성을 <오늘>에서 발견했다. 한 쪽(page)에 지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 두 명의 기자가 멀리 위치한 현장을 방문해서 꼼꼼히 취재하는 모습에서 좋은 매거진의 발전 가능성을 보았다. 책상머리가 아닌 발로 뛰며 생동감 넘치는 기사를 써서 게재하는 것은 잡지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성에 가미된 성실성은 좋은 글을 쓰는데 필요한 덕목이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잡지, 영세하지만 세상이 무시하지 못하는 매거진 <오늘>이 되기를 바란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에 창간되어 1970년 대 초 강제 폐간된 <사상계>라는 월간지가 있었다. 잠자고 있는 정신을 일깨워 민족과 사회 이웃을 생각하게 만든 잡지였다. 당시 이 월간지를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면 그 사람이 다르고 보였다고 한다. 오늘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이 정도까지 진전될 수 있었던 데에 <사상계>의 공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은 '문화'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대이다. 문화를 주 이슈로 다루는 월간 매거진 <오늘>이 격조 높은 교양인을 만드는 데 이바지하게 되기를 바란다. 현대의 교양인은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참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그리스도인들의 문화나눔터#원유진 기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