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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하버드 대학생이 지적 허영을 과시하다가 맷 데이먼(윌 헌팅 역)에게 제대로 '디스'당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한 장면. 하버드 대학생이 지적 허영을 과시하다가 맷 데이먼(윌 헌팅 역)에게 제대로 '디스'당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
ⓒ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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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맷 데이먼 주연의 영화 <굿 윌 헌팅>의 이 장면을 혹시 기억하는가. 밴 애플렉(척키 슐리반 역)이 술집에서 하버드 여대생에게 '작업'하는 걸 못 마땅하게 여긴 동료 남학생이 '지적 허영'을 과시하다가 맷 데이먼(윌 헌팅 역)에게 제대로 '디스' 당하는 장면.

상대방 '허영'의 출처까지 조목조목 짚으며 맷 데이먼은 이렇게 말한다. "너의 의견은 없냐"고. "남의 견해를 자신의 것처럼 떠들지 말라"고. 개인적으로 일부 지식인들의 위선에 넌더리를 치는 체질이라 무척 통쾌하게 봤었다. '가짜'의 지적 허영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도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그 사이 인터넷은 혁명적으로 발달했고, 윌 헌팅의 머릿속에 있었을 방대한 지식이 스마트폰 하나에 모두 담기는 세상이 됐다. 그만큼 '아는 척'이 쉬워졌고, 또 한편으로는 '척'을 가려내기도 쉬운 세상이 됐다.

덕분에 책을 읽는 인구는 계속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세상을 예견하기라도 한 듯 조선 후기 유학자 양응수는 <백수집>이란 책에 이런 글을 남겼다. "'꼭 책을 읽어야 돼? 지름길이 따로 있는데'라고 한다면, 이는 사람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라고 말이다.

독서...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김영사가 최근 내놓은 <오직 독서 뿐>
 김영사가 최근 내놓은 <오직 독서 뿐>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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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영사에서 내놓은 책 <오직 독서뿐>에 나오는 글이다. 이 책, 얼핏 고리타분해 보인다. 허균, 박지원, 이덕무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아홉 명의 독서 전략과 담론을 소개하고 있다는 보도자료에 고전학자이자 인문학자인 저자의 이력까지 더하면, 일단 따분한 내용의 '독서 권장서'정도로만 보인다.

책 형식도 단순하다. 저자가 추려낸 조선시대 선비들의 독서 '엑기스'는 모두 158개. 각각의 원문을 소개하고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첨가한 풀이를 덧붙였다. 그런데 그 단순함의 사이사이, 마디마디에 맺힌 문제의식이 서슬 퍼렇다. 저자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꾸준히 오래해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지 오래"라며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화려한 스펙도, 남이 선망하는 학력도 내 자신 앞에서는 안 통한다. 맛난 음식을 탐하는 사이, 혈관이 막히고 소화기관에 깊은 병이 들었다. 차를 타고 더 빨리 더 빨리 하는 동안 근육이 굳어 제 발로는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

저자는 그 이유를 독서 그 자체를 합목적적으로 여기지 않게 만든 풍토에서 찾고 있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드문 일 중 하나"임에도 자꾸 책을 "다른 꿍꿍이"로 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입으로만 흉내내는 앵무새 공부, 읽는 시늉만 하는 원숭이 독서"는 고역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익 <논어질서서> 통해 '개성의 말살' 풀이

"찾는 것이 있어 책을 읽게 되면 읽더라도 얻을 것이 없다. 때문에 과거 공부를 하는 자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읽어봤자, 읽고 나면 아마득하기가 소경과 다름없다. 이는 흑백을 말하면서도 정작 희고 검은 것을 모르는 것과 같다."


학창 시절 교과서로 그 이름만 대했던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글이다. 이처럼 이 책에는 귀동냥으로만 접했던 고전의 가치를 되새기게 만드는, 오늘에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일갈'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그 결과 앎은 삶과 따로 놀고, 지식은 지혜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식의 저자의 해석이 그 흥을 더해준다. 어제와 오늘의 척척 맞는 장단을 구경하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이처럼 장단이 오가다 보니, 현행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것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다. 이익의 <논어질서서>의 한 대목을 저자는 '깊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라'로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은 풀이한다.

"그런데 주입식에 익숙해진 공부는 '따지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만 한다. 의문을 말하면 '네 까짓 게 뭘 알아'하며 무시한다. 모든 것이 다 꽉 짜여 있어 숨 쉴 틈이 없다. 그 결과 공부를 마치고 나면 각자의 개성은 다 말살되고 모두 똑같은 사람만 남는다."

"문제는 책 꽤나 읽었다는 사람들" 하지만...

지난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바닥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바닥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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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저자의 문제 의식은 '원숭이 지식인' 혹은 '앵무새 지식인'으로 향한다. "큰 문제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생긴다"며 홍대용의 <여매헌서>에서 "고인이 책을 지은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장의 꾸밈에 힘을 쏟아 공명을 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살핀 것을 밑천 삼아 명예를 구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는 대목을 곱씹는다.

이덕무의 <사소설> 중 <교습>을 소개하면서는 "문제는 책 꽤나 읽었다는 사람이 책을 읽어 행실이 나아지지 않고, 그저 출세를 위해서만 공부하는 행태다. 더 가증스러운 것은 공부 꽤나 했다는 사람이 입만 열면 성현 말씀을 줄줄 꿰는데, 하는 행실은 간사하고 일마다 속임수나 쓰는 경우"라는 풀이를 덧붙여 놓는다.

이런 경우면, 저자의 표현처럼 독서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것이다. 저자가 소개한 홍길주의 <수여방필>의 한 대목 또한 그러하다. "책을 많이 읽어도 책 따로 나 따로 놀면 안 읽은 것과 같다. 말만 앞세우고 행실이 따라가지 않으면 차라리 책을 덮어라"는 글은 분명 오늘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공부 꽤나 했다는 사람들이 책 따로 나 따로 노는 경우를 하도 많이 봐서, 일부 지식인들의 간사한 행실 또는 속임수를 쓰는 경우를 하도 많이 목격했기에 사람들이 책을 더 멀리 하는 것 아닌가. 영화 <굿 윌 헌팅>의 한 장면이 떠올랐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이 책 저 책 집적대지 않기 등 교육적 노하우도 '빼곡'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독서'의 가치를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짜들'의 지적 허영에 농락 당하지 않는 것이나 스스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실 같은 길, 독서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과제이니 말이다. 그 의미를 <오직 독서뿐>은 오히려 옛 사람들의 글을 통해 효과적으로 잘 전달한다.

그렇다고 독서에 대한 당위만 나열하고 있지는 않다. 지적 허영이나 원숭이 독서 그리고 지식인의 위선 등에 대한 '디스'만 가득한 것이 아니다. 독서 습관 들이기, 이 책 저 책 집적대지 않기 등 책을 잘 읽는 '교육적 노하우'도 수두룩하다.

그 중에서도 "삶의 버팀목이 되어 줄 책 몇 권만큼은 평생의 반려로 삼아 읽고 또 읽어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당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책꽂이에서 나만을 바라보고 있을 '평생의 반려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균의 <한정록> 풀이 한 대목이 더욱 서늘했다.

"사는 게 바빠 책 읽을 여가가 없다고 투덜거리지 마라. 낮에 바쁘면 밤중에 읽고, 갠 날 바쁘면 흐린 날 읽고, 여름에 바쁘면 겨울에 읽으면 된다...(중략)...도대체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저 한 마리의 소시민, 무지렁이 밥벌레로 살겠다는 말과 같다."


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김영사(2013)


태그:#정민, #오직 독서뿐, #독서, #굿 윌 헌팅, #맷 데이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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