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2008년 5월 9일 발병한 희소난치병, 데빅씨병, 좀 더 폭넓게 알려진 이름으로는 '다발성경화증'으로 목 아래가 마비되어 투병 중입니다. 평지도 드물고 대개는 내리막인 난치병의 코스. 제 아내도 예외 없이 가정도 무너진 채로 각종 합병증과 마비된 장기들을 안고 병상투병 6년째입니다. 모든 비슷한 분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투병을 응원하면서 이 글들을 올립니다. - 기자 말
"아무래도 큰 병원으로 옮기셔야 할 것 같은데요?""…조금만요, 며칠만 더 지켜보고요."아내의 퇴원을 놓고 의사 선생님과 흥정하다시피 미루고 미루는 중이다. 아내는 벌써 삼 개월째, 밥을 먹지 못해 죽식을 하고 있다. 그나마 반도 채 못 먹는 게 태반이다. 그러니 병원도 조마조마하고 불안할 것이다.
'여기서 또 큰 병원(서울)으로 가면 더 이상 일도 못 다닐 텐데…. 병원비는, 어린 막내는 누가 돌보나?' 말이 권유지, 거의 추방에 가까운 선고...머릿속엔 온통 그 걱정으로 보름 가까이 버텼다. 말이 권유지, 거의 추방에 가까운 선고를 별 뾰족한 대책이 없어서 그저 미루고 끌고 가는 중이다.
"제발! 밥 좀 먹어주라. 여보야! 우리 지금 또 응급실로 서울 가면 이젠 생활비도 못 벌고 병원비도 감당 못 해서 무슨 일 생길지 모르는데, 제발 부탁이다."차마 대놓고 못하고 속으로만 아내에게 빌고 빌었다. 몇 번의 응급실,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이미 바닥으로 곤두박질한 살림이다. 5개월을 머문 강원도 기도요양원에서도 밥값, 방값을 감당 못하고, 외상으로 두 달을 버텼다. 간신히 시골 농갓집을 팔아서 빚을 정리했다. 돌아온 지 4개월째, 여기서 병원과 직장을 반반씩, 뻔뻔하게도 주3일 근무제를 하면서 버텼는데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것일까?
KBS1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촬영을 하고 갔다. 목 질환의 한 사례로 아내의 난치병 질환과 그로 인한 사지마비의 중대함을 설명하는 자료로 촬영해 간 것이다.
더 심한 경우도 보았는데 회복이 됐었다며 꼭 낫기를 바란다는 피디님의 위로에 잠시 희망을 품기로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밖에 없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도 매달리며 울고 웃지만, 지푸라기는 그야말로 지푸라기일 뿐이다. 아무 치료 수단을 찾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데 상태는 날로 악화하였다.
아침에 일찍 병원에 들러 한 시간을 보살피고 출근해서 일하고, 저녁이면 병원 화장실로 가서 종일 땀에 '쩐' 얼굴과 팔다리를 대충 씻고, 중간에 들러서 사온 만두나 김밥으로 아내 곁에서 저녁을 때운다. 그리고는 세 시간 정도를 굳어진 팔다리 관절을 마사지 겸 운동시킨다. 답답해하는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1층으로, 주차장으로 한 바퀴 돌기도 한다. 또, 며칠에 한 번은 대변을 파내서 아내의 아픈 배를 달랜다.
"살다 보면 악몽도 길어지는 경우가 있고, 그 꿈에서조차 죽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 길을 찾는다. 이 지독한 생명의 원천은 어디서 나올까? 그만두지 못하는 사랑일까?"이곳은 요양원과 재활을 겸하는 시립병원이다. 말이 재활이지 입원환자의 90%가 넘는 사람들이 치매와 노인성 질환자들이다. 우리는 집과 일터의 중간에 있다는 순전히 지리적인 이유로 부득이 입원하고 있기는 하지만, 치료 기능은 기대하기가 사실 어렵다. 한 4개월을 있는 동안 40대 환자는 100여 명 중에 두어 명 보았다. 그 중에 한 명이 아내였다.
2~3일 전부터 아내는 숨 쉬는 것을 힘들어하더니 기어이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통 때는 밤 9시가 좀 넘으면 병원을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야만 이곳 공동간병인들도 좀 쉬고 잘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호자가 계속 병실에 있으면 편히 쉴 수가 없다. 규칙도 오후 9시면 가족보호자는 모두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상태가 좋지 않아 미안해도 어쩔 수 없이 머물렀다.
종합병원 응급실, 또 가지 않기를 빌고 빌었는데...
아내는 이곳 병원에서도 요주의 환자이고, 무척 까다로운 간호를 요구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왜 안 그럴까? 다른 상급 종합병원에서조차 치료를 거부하고 본래 병원으로 옮기라고 하는 판국이니….
밤이 깊어지면서 급기야 산소탱크를 끌고 와서 코에다 바람을 넣기 시작하고, 수시로 혈압과 맥박을 체크했다. 그런데 나아질 기색이 안 보인다. 무서워지고,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아내의 얼굴과 불규칙한 숨 쉬는 소리 때문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 새벽 한 시, 두 시…. 도저히 더 미룰 수가 없겠다는 판단이 선다.
큰 비닐봉지를 두어 개 얻어서 모든 병원 짐을 다 담았다.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지만, 아내가 거부한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곁에 있어 주기를 원했다. 차를 가지고 따로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 그 순간을 버텨야 한다는 그것이 더 싫다고 한다. 짐을 싣고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나니 새벽 2시 40분, 울컥 서럽고 속상한 맘이 북받쳐온다. 그렇게 종합병원 응급실을 또 가지 않기를 빌고 빌었는데….
"이러다가 울컥 충동적으로 무슨 행동을 하지 않을까?"내 속엔 두 개의 존재가 서로 못 믿어 하면서 말을 주고받곤 했다. '욕 안 먹을 만큼 했잖아? 포기하고 모든 걸 내려놓으면 편해질 거야!' 하는 아주 친한 척 하는 놈과, '어떻게 해봐야지? 입장 바꿔 봐, 저렇게 숨쉬기도 힘든 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섭겠어? 죽고 사는 건 제쳐놓고 좀 편하게 해줘야지…'라는 모진 놈, 내 안에 있는 두 놈은 환장할 정도로 싸웠다.
그 새벽까지 곁에서 지켜봐 주다가 같이 따라 내려와 준 공동간병사 아주머니가 내가 승용차 뒤쪽에 휠체어랑 짐을 싣는 동안 아내에게 열심히 말을 건넨다. 꼭 나아서 다시 만나자고, 마음 단단히 먹고 기운 내서 투병해야 한다고. 나와 동갑이던 그분은 자기 손에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서 아내의 손에다 끼웠다. 그녀는 "내 마음이 여기 있으니 보면서 기운을 내라, 기도하겠다!"라고 말한다.
이 깊은 밤, 절망의 새벽에 나타난 천사 같았다우리가 무슨 가까운 사람도 아니고, 몇 번 교대로 아내를 간병해주면서 이야기해 본 것이 다인데, 참으로 이 깊은 밤, 절망의 새벽에 나타난 천사 같았다.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 동안 서서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백미러로 봤다.
오늘도 이렇게 넘어간다. 하나의 고개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등을 밀어주는 힘을 얻어서, 눈물이 핑 돌고 민망해졌다. 이해관계도, 책임질 일도 없는 사람조차 끼고 있던 금반지 빼주면서 기운 차리고 회복하길 기도하겠다는데…. 명색이 남편인 내가, 20년을 넘게 살면서 아이들 셋 낳은 반쪽을 두고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좀 지나서 알았다. 그분조차 루게릭병을 앓고 진행되어가는 남편을 간호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아내보다 더 무서운 결과가 저만치서 기다리는 불치에 가까운 병이다. 그런데도 많이 웃고, 궁지에 몰린 남을 돌아보았다니.
"때론 사람이란 참 설명이 안 되는 미스터리 덩어리다. 더 힘들고, 더 심한 고난을 겪고 난 사람들이 덜 겪은 사람보다 더 평안하고 더 어른스럽게 산다는 게." 아직도 가끔 문자를 주시면서 아내에게 힘을 내라고 전해주란다. 나도 문자로 답을 보냈다. "아직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라고.
덧붙이는 글 | 2009년 5월부터 2009년 8월 사이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