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를 때는 등산화 끈을 느슨하게 묶는 게 좋다. 발목보다 발등 부분을 조여 주어야 한다. 하산할 때는 반대로 발 전체를 단단히 묶어준다. 특히 발목 부분을. 그러나 지리산능선 종주에서는 그 방법을 적용할 수 없다. 길이 쉼 없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그러니 등산화 끈을 풀었다 조였다 풀었다 조였다, 누가 그러고 있겠나. 결국, 발에 '동티'가 나고 말았다. 느리게 걷는 길이니 괜찮겠지 싶었는데. 오늘 아침 세석대피소를 나설 때부터 왼쪽 발이 저렸었다. 발짝마다 허방 짚듯 허둥댔다. 그렇게 4㎞쯤 걸었다. 이제 한 발짝도 더는 내딛지 못하겠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발가락 끝에서 머리끝까지.
선비샘에서 등산화를 던져버렸다
마침, 선비샘 앞이다. 등산화를 확 벗어 버린다. 양말도 벗는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다. 물이 떨어지고 있는 파이프 밑에 가 선다. 발등에 물을 맞는다. 물을 받아 마신다. 물맛이 맑고 차다. 샘터 위에 묻혔다는 전설 속의 화전민 노인에게 다시 납작 허리를 굽힌다. 그가 한평생 얼마나 천대를 받고 살았으면 샘터 위에 묻어 달라 했을까. 나의 언행이 누군가의 가슴에서 응어리진다면, 섬뜩한 일이다. 이 물을 마시려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니, 노인의 그 한이 얼마간 풀렸을까. 문득, 이 산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주검들의 한이 떠오른다. 오늘 나의 걸음은 첫 발짝부터 숙연했다. 아침 다섯 시에 세석대피소에서 짐을 꾸려들고 나왔다. 대피소 건물계단에 앉아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빵 하나를 꼭꼭 씹어 먹었다. 그리고 박명이 깔린 세석평전을 잠시 둘러보았다. 30여만 평의 고원이다. 남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평원이 펼쳐졌다. 아한대인 고원은 노린재나무, 붉은 병꽃, 진달래, 철쭉 같은 키 작은 나무들이 관목 숲을 이루었다. 구상나무도 키가 작다. 바람 때문인가. 봄에 철쭉꽃이 장관이란다. 그 꽃이 핏빛인가. 세석평전은 현대사 비극의 현장이다. 이현상의 남부군 주둔지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에서는 남부군의 군중대회와 연극공연 등이 열렸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토벌대에 포위되어 몰살당했다고 하니, 해마다 핏빛 꽃이 피고 지나. 세월 무상하게 그 흔적 하나 보이지 않는데.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가 저릿저릿 저렸다. 발끝의 통증도 심상치 않았다. 오늘 목적지는 연하천대피소다. 거리는 9.9㎞이지만 지리산능선 중 길이 가장 험하고 변화무쌍한 구간이다.
아침 산길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삽상한 공기와 숲의 내음이 푸르렀다. 차차 숲 깊숙이 햇살이 퍼져갔다. 산중 생명들이 깨어나는 기척을 들으며 조심조심 걸었다. 한 시간여 걸려 기암지대인 1652m의 영신봉에 올랐다. 날이 맑아 천왕봉이 우뚝 보였다. 북쪽으로는 한신계곡이 흘러내리는 자리였다. 첫날 내가 죽자 사자 타고 올랐던. 숲이 우거져 조망할 수는 없었다. 남쪽으로는 남부능선을 따라 삼신봉이 훤히 보였다. 그 너머로 청학동이다. 나는 낙남정맥의 발원지에 서 있었다. 숲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노루처럼 한 여자가 불쑥 나타났다. 노란색 등산복 차림의 20대 여자였다. 오늘 길 나서서 첫 만남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그녀는 어젯밤 9시부터 화엄사에서 걸어오고 있는 중이란다. 세상에나! 혼자 그 험한 길을 밤을 꼴딱 새며. "정말 무서웠어요. 물소리, 바람소리가 그렇게 무서운 줄 처음 알았어요"라고 말한 그녀는 천왕봉에 올랐다가 오늘 곧장 대원사로 내려간단다. 무박종주였다. 일정을 왜 그렇게 잡았느냐 물었더니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단다.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걷고 싶었어요. 그럴 때가 있잖아요. 하지만 다시는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안할 거예요. 정말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그녀는 미처 격려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사라졌다.
견딜 수 없는 발가락 통증... 등산화 대신 샌들을
나도 내 갈 길로 올라섰다. 영신봉에서 칠성봉까지는 오르내림이 많은 길이었다. 가파른 돌길과 암벽과 울울한 숲길. '심장마비 사망사고 지역'이라는 경고판이 붙어 있는 천길 깎아지른 낭떠러지도 지났다. 그리고 가며가며 남쪽으로 흘러가는 산맥이 보였다. 하얀 구름이 발아래서 흘렀다. 돌아보면 천왕봉, 재석봉, 촛대봉도 보였다. 그렇게 줄지은 봉우리들과 험준한 협곡과 산기슭을 속속 조망하며 쉬엄쉬엄 걸었다. 풍광이 장엄하여 가슴 뭉클뭉클했다. 한편, 가슴 먹먹한 길이었다.
칠성봉을 내려와 선비샘까지 왔다. 세석대피소에서 네 시간쯤 걸렸다. 이제 한 발짝도 더는 못 내딛겠다. 샘물로 발의 통증을 다스렸다. 발이 늘 말썽이다. 장거리 좀 걸었다 하면 물집 서너 개 잡히는 건 예사다. 발톱이 시퍼렇게 멍든다. 나중엔 빠진다. 그래도 참을 만하면 참겠다. 그러나 발가락 끝에서 비명처럼 자지러지는 그 통증은. 도저히 걸을 수가 없다. 기이한(?) 발 모양 때문인가. 기성화가 내 발에 적합하지 않나.
나는 손발이 유독 크다. 손은 웬만한 남자 손만하다. 목이고 어깨고 허리고 다리고 다 호리호리한데. 손발은 나무 잘 타는 유인원의 쩍 벌어진 큰 발 같다. 손가락, 발가락이 길고 굵고 벌어졌다. 손톱 발톱도 넓적하다. 젊은 시절엔 데이트 중인 남자에게 그 못난 모양을 들키지 않으려고 긴장하곤 했다. 꼬박꼬박 양말을 챙겨 신었다. 손을 잡을라치면 부끄러움을 타는 듯 뺏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외향이 사는데 뭐 대순가 하게 됐지만. 등산화를 배낭에 집어넣고 샌들을 꺼냈다. 더 걸으려면 앞이 트인 샌들을 신어야 한다. 내 샌들 경력은 오래 됐다. 3년 전에도 샌들을 신고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었다. 지난번 지리산 종주 때도 등산화 반나절 만에 샌들로 바꿔 신었었다. 천왕봉도 샌들 신고 올랐다. 사실 샌들이 등산화보다 안정감이 떨어진다. 발목이나 발가락 부상 노출이 크다. 울퉁불퉁한 돌길에선 위험천만하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딱 한번 나처럼 샌들 신고 산 타는 사람을 만났었다. 내공 높은 산사람처럼 보이는 남자였다. 바로 지난번 지리산종주 때였다. 그 남자는 샌들이 빨리 걸을 때는 위험하지만 천천히 걸을 때는 훨씬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 발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걸으라고 조언했다. 그건 자신 있다. 느리게 걸어야 보이는 세상에 나는 홀려 있기에. 그리고 샌들 신고 산길 타는 내가 그 사람처럼 산타기 고수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으쓱했다. 나도 참... '도보 여행자에게는 신발이 전부다. 모자니 셔츠니 명예니 하는 것은 모두 그 다음의 문제다.' 루돌프 퇴퍼(최초의 만화가)의 말이다. 지당한 말씀이다. 선비샘을 떠난다. 물통 가득 물을 담아. 샌들을 신으니 발이 편해졌다. 통증에서 얼마간 해방됐다. 걸음이 한결 수월하다. 산죽 사이로 뜨문뜨문 피어있는 말나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을 몇 만나 반갑게 스친다. 덕평봉을 넘어서 인천해밀학교 선생님 네 분을 만났다. 학생들과 종주를 하기 위해 답사를 오셨단다. 그때 마침 삼사십 명의 중학생들이 줄지어 우리 옆을 지나간다. 헉헉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이제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는다는 우리의 역사를, 지리산의 역사를 그들은 알고 걷는 걸까. 그 힘든 여정이 훗날 그들의 기억에 어떻게 남을까.
너무 평화롭고 멀쩡해 눈물나는 지리산
벽소령대피소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나는 역사 속의 '작전도로'로 들어선다. 평탄한 오솔길이다. 이 길이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군인이 닦은 길이었단다. 남쪽의 화개면 대성리와 북쪽의 마천면 삼정리를 잇는 비포장도로였다. 지금은 오솔길이 됐다. 얼마간 나가자 남쪽으로 시야가 확 트이며 기암절벽 옆으로 길이 이어진다. 낙석주의 표지판이 죽 붙어 있다. 길가로 싸리나무 꽃과 까치수염 꽃이 피었다. 꼬리풀 꽃도 꽃차례로 피었다. 세상 고요하고 예사롭게. 거기, 잡목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배낭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등짝을 짓누르는 느낌이 벗어지지 않는다. 배낭이 계속 등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떨어지지 않는 과거의 무거운 기억처럼.
그늘 속이 금세 서늘해진다. 춥다. 볕으로 나 앉는다. 햇살이 뜨겁다. 곧 더워진다. 다시 그늘로 들어간다. 춥다... 그늘 속을 들랑날랑 하며 <나는 걷는다>를 읽는다. 나는 잠깐 지리산을 벗어나 실크로드로 떠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시 작전도로 오솔길을 따라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다. 정오 무렵이다. 햇살이 따갑다.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는 사람들이 다 그늘을 찾아 들어가 있다. 점심으로 햇반을 샀다. 다행이 벽소령대피소는 전기선을 매설해 아래 마을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기에 햇반을 데워준다. 시어 꼬부라진 김치 한 가지로 밥을 먹었다. 허기가 채워지지 않아 황도 통조림 하나를 사먹었다. 산에선 식욕이 없어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음식을 든든히 먹어두어야 한다. 나처럼 산길을 노닥노닥 거닐지라도. 밝다 못해 푸른빛이 돈다는 벽소령 달밤의 운치가 궁금하지만, 떠난다. 오늘 목적지인 연하천대피소까지는 3.6㎞ 남았다. 벽소령부터 명선봉까지 '피의 능선'이다. 빨치산 투쟁 때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지세 험한 이 일대를 무대로 활약했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산세만큼이나 역사의 격랑의 땅이다. 삼한과 가야, 삼국시대의 접경지로 싸움터였고... 근대에 이르러 동학민중운동, 여수사건,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이가 피를 흘린 전쟁터였다. 지리산은 생명의 땅이고 주검의 땅이었다. 지금 지리산은 역사의 아픔을 깊이 묻은 채 침묵하고 있다. 너무나 평화롭고 멀쩡해 보여 눈물 나도록. 빨치산의 활약상을 그린 이태(李泰)의 수기 <남부군>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 생각난다. <남부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남과 북 어느 쪽에도 승리는 없다. 우리는 외세의 힘으로 해방되었고, 외세로 인해 분단되었으며, 외세가 개입한 전쟁을 하고 있다. 어디가 이기든 그것은 남과 북이 아니라, 미국이나 소련의 승리일 따름이다." 결국 전쟁은 남과 북 어느 쪽의 승리도 아닌 분단으로 끝났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다. 분단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극의 역사 속에서, 이념의 비극 속에서. 몸도 마음도 고된 길...온몸으로 부르는 진혼가
밧줄을 타고 암반을 내려간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길을 오르내린다. 석문을 지나고 암봉을 지난다. 내내 두리번두리번, 기웃기웃 거리며. 보라색 종 모양의 모시대 꽃이 피었다. 둥근이질풀 꽃도 더러 보인다. 딱총나무 열매가 벌써 총총총총 빨갛게 익었다. 여기저기 숲을 들여다보느라 늦장을 부려도 허벅지가 당긴다, 숨이 차오른다. 자주 가다 서다 한다. 형제가 불도를 닦다가 바위로 굳어 버렸다는 형제봉을 헉헉 오른다. 앞서 가던 내 그림자가 어느새 옆에서 뒤쪽으로 물러나 따라오고 있다. 형제봉을 내려와 성황당 바위와 삼각고지를 지난다. 얼마 남지 않은 연하천대피소까지 편안한 흙길이다. 긴장이 풀렸나. 그만, 돌부리에 발이 호되게 채였다. 악, 비명을 지르며 기우뚱거리는 몸을 다잡아 세운다. 주저앉는다. 오른쪽 발 엄지가 얼얼하다. 눈물이 찔끔 난다. 아, 아... 발가락을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낸다. 등산화만 신었어도 충격이 덜 했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놓칠세라 한 손으로 카메라는 꼭 쥐고 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다. 발을 움직여 보니, 걷는데 별 지장 없겠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고, 그대로 앉은 채 물을 마시고 초콜릿을 까먹고... 마침내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했다. 갑자기 피로감이 확 몰려온다. 피로를 덜까하여 먼저 물가로 다가간다. 대피소 앞의 개울에 맑고 시원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 물에 손을 적시고 뒷목을 적신다. 살짝 맨발을 담근다. 돌부리에 채인 엄지발가락이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오늘 나는 몸도 마음도 고된 길을 걸어왔다. 마치 온몸으로 진하게 진혼가를 부른 것 같다. 오다가 만난 젊은 부부가 먼저 도착해 저녁을 해먹고 있다. 산에서 밥을 해먹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던. 나는 벽소령대피소에서 데워 온 햇반을 먹고 일찍 대피소로 입실했다. 이제 내일이면 지리산 능선 종주가 끝난다. 내일도 나는 혼자 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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