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필자는 강월도 영월의 동강을 거닐고 있었다. 동강 최고의 비경이라는 어라연을 탐방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단풍철도 지난 시기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동강만이 필자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푸아항~! 그런 호젓한 정적을 깨는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한 대가 동강의 골짜기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탱크킬러라고 불리는 A-10 공격기였다. 미 공군 마크가 선명했다. 필자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 저 공격기가 비행을 하고 있을까? 난 순간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이미 엔진소리는 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참 이 근처에 공군 사격장 있지. 그런데 거기 백두대간 허리축이라던데….'한때 필자의 마음 속에는 비행기가 있었다. 푸른 창공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들이 좋았고, 그 비행기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필자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대해 '구애 작전'을 벌였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비행기 사진을 모으다가 나중에는 항공잡지 세계에 뛰어들었다. 항공잡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니 잡지를 구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용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항공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헌책방에서 항공잡지를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항공잡지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곰팡이가 피고, 냄새나고.
'어린왕자' 꿈꾸던 그 시절... 지금도 그립다그렇게 부실한 잡지들은 한 번씩, 꼭 손을 거쳐야 했다. 햇볕에 내다말려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옥상에서 잡지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하기에 느긋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와중에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더니 옥상에 있던 항공잡지들은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빗방울이 컸고, 강수량도 많았던 터라 내 잡지들은 소나기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난 멍하게 잡지 파편들을 보고 있었다. 그 잡지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던가! 동쪽 하늘에 예쁘게 드리워졌던 무지개가 얄미웠다.
그런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던져주던 나의 비행기 사랑은 이제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흘러가면 첫사랑의 짜릿함도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꼭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비행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비행기들이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있던 자리에는 또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순리인 걸까?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 여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번, 두 번 떠난 여행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아웃도어 여행으로 인해 인생의 지향점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강 어라연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백두대간 걱정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이러다가 아웃도어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고, 또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비행사 생텍쥐페리와 함께 '어린왕자'를 만나러 가던 그 시절, 그 동경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있다 없으니까' 공모 응모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