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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8년 만에 처음으로 장준하 선생 죽음의 원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보도를 부정한 결과가 나왔음에도, 진흙탕 같은 정치 싸움으로 인해 들끓던 여론이 잠잠해졌다. 결자해지의 위치에 있는 대통령조차 일언반구 말이 없다. 진상규명은 물 건너간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자전거 여행을 좋아하는 50대 여섯 명이 나섰다. 장준하 선생이 중국 쉬저우(徐州)에 있던 일본군 부대를 탈출해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간 그 길을 따라 자전거로 다녀오자는 데 뜻을 함께한 것이다. - 기자말

파주시 탄현면 기념공원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파주시 탄현면 기념공원에 있는 장준하 선생의 묘소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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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 인천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대전에서 승합차를 대절했다. 자전거 5대가 모두 들어갈까, 염려했으나 뒷좌석을 앞으로 밀어 생긴 공간에 가까스로 들어갔다. 앞뒤 간격이 좁아지긴 했지만 5명이 타기에는 좌석도 충분했다.

올라가는 도중 이봉원 대한민국임시정부사적지연구회 회장님이 독립군가 음원을 휴대전화로 보내줬고, 그걸 듣고 있으니 마치 독립군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독립군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는 기분이 씁쓸했다. 요즘 어느 누가 아무리 사회가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을 또는 남편들을 독립군으로 보내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긍지를 느낄까?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보면 절대로 독립군으로 나서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민족을 위하는 또는 정의를 위하는 일에 나서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하는 사회가 되었다. 나라의 안위보다는 공동체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안위가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남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봉사하거나 희생하기는커녕 남의 희생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사회가 되었다. 비록 후에 큰 손실을 볼지라도 지금의 내 눈에 보이는 조그만 이익이 중요한 사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독립군이 된 것을 자랑하듯이 의기양양하게 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서 임수현씨를 만났다. 나와는 한 차례 만났지만 다른 이들에겐 초면이라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일행은 원래 다섯 명이었다. 그러나 홀수가 되면 숙박할 방을 구함에 있어 좀 비경제적이 된다. 그래서 추가로 한 명을 구하려 꽤 애썼다. 그러나 이번 여행이 예사롭지 않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가 쉽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속한 시민단체를 통해 전국적으로 수소문 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했다. 우연히 인터넷 방송인 국민TV에 소개되어 이른 아침에 인터뷰를 했는데 마침 이 방송을 들은 임수현씨가 바로 연락을 해왔다. 정말 함께 하고 싶다고. 그의 큰아버님도 조선의용대 소속 독립군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함께 하게 되었고 오늘 처음 대면한 것이다.

왼쪽부터 임수현, 임동순, 이규봉, 고병연, 윤일선, 전태일
 왼쪽부터 임수현, 임동순, 이규봉, 고병연, 윤일선, 전태일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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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은 짐을 한 대의 택시에 모두 실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두 시간 후 베이징에 도착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입국수속을 받는 곳으로 갔다. 짐은 우리가 다시 찾아 국내선으로 환승해야 했다. 큰 짐을 보내는 곳이 짐을 찾는 곳 가까이에 있지 않고 4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리곤 다시 3층으로 내려와 국내선으로 환승했다. 검색은 엄청 심했다. 자전거 윤활유도 재확인하고 클립이 장착된 자전거 신발은 벗어야 했다. 몸은 더듬듯이 검색을 한다. 내가 다녀본 그 어느 나라보다 심했다. 6시께 베이징을 다시 출발해 7시 반쯤 쉬저우에 도착했다.

쉬저우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수많은 중국인이 학살당한 난징(南京)이 성도인 장쑤성(江蘇省)의 북서쪽에 있는 도시다. 인구는 900만 명이 넘으며 남서쪽으로 평원을 이루고 있다. 중일전쟁이 한창일 때는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내전을 벌일 때는 국민당 군대와 공산당 군대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중일전쟁 이후 이 지역을 일본군이 점령했고 강제로 징집된 조선인 병사들이 이곳에 많이 배치되었다. 이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니 김준엽과 장준하 일행이 대표적인 경우다.

쉬저우 공항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너무 썰렁했다. 우리 짐이 크고 많은지라 버스에 실을 수는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택시 운전사와 한 대 당 160위안에 가기로 하고 두 대를 불렀다. 그러나 보통 크기의 택시라 그 크고 많은 짐을 실을 수 있을까 걱정됐다. 한 대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중국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그들은 자전거 두 대를 뒷좌석에 집어넣고 다시 두 대는 트렁크에 억지로 넣고 나머지 두 대는 열린 트렁크 문 위로 올려놓더니 끈으로 묶었다. 그런데 갖고 있는 끈도 변변치 않은 것이라 매우 염려스러웠다. 그래도 그들은 문제없다며 가다가 경찰을 만나면 벌금은 대신 내달라고 했다.

여섯 대의 자전거 짐을 한 택시에 모두 실다.
 여섯 대의 자전거 짐을 한 택시에 모두 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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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짐을 실은 택시에 남아있는 앞좌석에 타고 나머지 다섯 명은 다른 택시에 모두 끼어 탔다. 호텔까지는 꽤 멀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던 택시가 속도를 내는데 시속 80km까지 낸다. 앞서가던 짐을 실은 택시에서 짐이 흔들린다. 속이 바짝 바짝 마른다. 속도 좀 줄이라고 외치지만 앞 택시에 연락할 방법이 없다, 함께 탄 우리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고 택시 기사는 영어를 전혀 모른다. 낌새를 눈치 챘는지 운전사가 전화를 한다. 그러자 앞 차가 섰다. 다시 잘 묶은 다음 떠났는데 천천히 가는 것도 잠시, 또 달린다. 호텔까지 오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호텔에 도착하니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뒤 운전사와 실랑이가 벌여졌다. 중국어를 모르는 우리는 왜 또 저러지? 했다. 또 돈 더 달라는 것 아냐? 그렇다. 그들은 짐을 택시 위에 실고 왔기 때문에 흠집이 생겼을지 모른다며 돈을 더 달라했다. 대당 40위안을 더 달라는 것이다. 누가 위에다 올려달라고 했나? 처음 말한 것과 끝나고 요구하는 것이 다른 경우를 종종 보아 온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했고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었다. 독립군의 행적을 따라가는 우리는 독립군이 나라를 찾는 데 충실했듯이 나름 원칙에 충실할 뿐이었다. 받을만큼 받고 줄만큼 준다.

이 많은 짐이 택시 하나에 모두 들어가다니, 뒤에 하나가 더 있다.
 이 많은 짐이 택시 하나에 모두 들어가다니, 뒤에 하나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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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으나 시간이 늦어서인지 노점 식당만 있었다. 주인인 듯한 사람은 한족답게 웃통을 벗고 담배를 피면서 주문을 받는다. 음식을 주문해보니 역시 거의 기름진 음식이다.

전 일정을 아무런 사고 없이 마칠 수 있기를 기원하며 고량주로 '위하여'를 외쳤다. 5명 모두 애주가들이라 원칙을 정했다. '고량주는 500ml 기준 하루 한 병에 한한다.' 호텔로 돌아와 자전거 조립을 모두 마치니 새벽 1시가 되었다. 전 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첫날 밤을 보냈다.

신성중학 시절부터 항일정신을 키우다

장준하 선생은 1918년 8월 27일 생으로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4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나 그의 형이 출생 후 얼마 안 돼 사망하여 사실상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가 1919년 3월 만세 시위에 가담하여 사찰대상이 되자 온 가족은 후에 수풍댐이 만들어지는 첩첩산중인 삭주군 청계동으로 피신하여 장준하는 거기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와 목사인 아버지 아래에서 성장한 장준하는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1학년 방학 때 고향에 돌아왔는데 일본 순사의 오만무례한 심문을 받은 후 징준하는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34년 아버지가 선천읍에 있는 신성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하면서 장준하는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여기서 장준하는 평생의 스승이며 동지인 함석헌을 만났다. 장준하가 선천에서 가까운 정주의 오산중학교로 함석헌을 만나러 간 것이다. 이 만남을 김삼웅은 <장준하평전>에서 "한국현대사에서 두 사람의 만남은 큰 축복이고 희망이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교장이 수감되자 장준하는 전교생을 이끌고 그를 석방시키기 위해 동맹시위를 감행했다. 장준하는 주동자를 자처하여 처음으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1938년 신안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안이 어려웠던 그는 잠시 진학을 포기하고 정주에 있는 신안소학교 교사로 부임해 교편을 잡았다. 학교에는 선생도 별로 없었고 건물은 거의 다 쓰러져갔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포함해 교회 청년들과 함께 학교 건물을 지을 터를 닦았다. 온갖 노력 끝에 교회의 장로들과 학부모들을 설득해 학교 건물을 새로 신축하였고 그 건물은 정주의 명물이 되었다. 한 소년 선생이 지역사회를 바꾼 것이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했고 다음 해에 동경의 일본신학교로 전학했다. 여기서 그는 문익환과 문동환 형제 등 뜻을 함께하는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아내에게 일본군 탈출을 미리 알리다

패망에 쫓기던 일본은 전시체제를 강화하면서 1943년 3월에 징병제, 10월에 학병제를 실시했다. 11월에 총독부는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징용하기로 하면서 청년들은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장준하는 1943년 11월에 귀국했다. 아버지가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신성중학교에서 쫓겨났고 요시찰 인물로 감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학도병 지원을 기피하면 가족이 당할 불행은 뻔했다. 장남으로서 집안을 지키기 위해 그는 어쩔 수 없이 학도병을 지원했다. 그전에 그는 자칫 잘못하면 일본군 위안부나 공장으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초등학교 제자이며 독실한 천주교 집안인 신안소학교 시절 하숙했던 집 주인의 딸과 1944년 1월 5일 결혼했다. 2주일 뒤인 1월 20일 그는 평양에 있는 일본군 제42부대에 성경을 들고 입대했다.

그 추운 겨울에 부대에서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하다 장준하는 엄지손가락에 동상을 입었다. 점점 악화되어 의무실을 찾았으나 마취제 없이 생살을 째야 했다. 미숙한 의무관은 그의 엄지손가락을 난자질 했으나 그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참아냈다. 놀라운 표정을 짓는 의무관인 일본군 육군 중위를 보고 그는 일본과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아픔에 초췌해진 장준하를 보고 부대장은 그의 중국 파병을 보류하려 했으나 장준하는 꼭 보내달라며 부탁했다. 거의 다른 모든 조선인 학도병이 조선에 남기를 바랐으나 장준하는 어떻게 하든 중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 이유는 일본군을 탈출하여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로 가려는 그의 결심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면회 온 아내에게 말했다. 내가 주말마다 편지를 하는 데 보낸 편지에 성경구절이 있으면 일본군을 탈출한 것으로 알아달라고...

중국에 가면 꼭 매주 주말마다 편지를 하마. 만약 그 편지의 끝이 성경구절로 되어 있으면 그것이 마지막 받는 편지로 알아도 좋을 것이다. 당신이 그 성경 구절을 읽고 있을 땐 이미 나는 일군을 탈출하여 중국군 진영이나 또는 우리 임정의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 <돌베게> 25쪽

장준하는 1944년 1월20일 중국 장쑤성 쉬저우의 보충대에 배속돼 3개월여 훈련을 받았다. 조선인 학도병 탈주 사건이 일어나자 장준하 일행은 조선인 학도병의 탈출이 전혀 없었던 츠카다 부대로 전출되었다. 이 부대는 그 만큼 규율이 매우 엄격하고 학도병에 대한 회유와 협박이 심했던 곳이다.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신문 얼레빗에도 투고



태그:#장준하, #구국장정육천리,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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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통해 사회를 분석한 <오지랖 넓은 수학의 여행>, 역사가 담긴 자전거기행문 <미안해요! 베트남>, <체게바를 따라 무작정 쿠바횡단>, <장준하 구국장정6천리 따라 자전거기행> 출간. 전 대전환경운동연합 의장, 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현 배재대 명예교수, 피리와 클라리넷 연주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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