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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기 장군 견장 달아주는 노태우 제9공수여단장에 취임하는 윤흥기 준장, 오른쪽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왼쪽이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준장이 윤 준장에게 지휘관 견장을 달아 주고 있다.
윤흥기 장군 견장 달아주는 노태우제9공수여단장에 취임하는 윤흥기 준장, 오른쪽이 정병주 특전사령관, 왼쪽이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준장이 윤 준장에게 지휘관 견장을 달아 주고 있다. ⓒ 윤흥기 장군 가족 제공

[기사 수정 : 9일 오후 1시 52분]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온 지 두 달 반이 되었는데 상태가 점점 더 나빠져서 지금은 아예 의식이 없으세요. 한 달 전부터는 계속 주무시기만 하고, 의사도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하니 언제 어떻게 되실지 모르겠어요." 

여든의 노병은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가쁜 숨만 몰아쉬었다. 곁을 지키는 부인은 연신 거즈로 환자의 입가에 흘러내리는 침을 닦아냈다.

9일 오전 서울 송파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호스피스 병동 819호실. 한 달째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는 노병은 윤흥기(80·보병학교 갑종간부 35기) 예비역 육군 소장이다. 그는 지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권의 4개 공수여단 중 유일하게 육군본부의 정식 지휘계통 아래 있었던 제9공수여단장이었다.

반란의 그날 정치군인들의 사조직 '하나회' 회원들이었던 최세창 3공수여단장, 박희도 1공수여단장, 장기오 5공수여단장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지시를 받고 휘하 여단들을 쿠데타군의 일원으로 동원했을 때 부평에 주둔하고 있던 윤 장군의 9공수여단은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아 진압군으로 출동했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윤 준장은 예하 1개 대대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지만, 당일 오후 11시 40분경 경인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직전 신군부의 기만작전에 현혹된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복귀지시로 부대로 복귀했다. 이로써 9여단이 반란주동자들을 진압, 사태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윤 장군이 9공수여단장에 취임할 때 그에게 지휘관 견장을 달아주었던 사람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준장이었다. 그 직후 노태우 준장은 별 하나를 더 달고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고, 12·12 당시 노태우 소장이 동원했던 9사단 병력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단장 취임식에서 윤 장군에게 견장을 달아주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3공수여단 반란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제예편당한 뒤, 10년의 세월을 회한 속에 보내다가 1989년 3월 4일 백골의 사체로 발견됐다. 생전 정 장군과 윤 장군은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려졌다.

12·12 직후 여단의 지휘권을 하나회원이었던 이진삼 준장(육사 15기, 육군참모총장 역임)에게 넘겼던 윤 장군은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끝으로 30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어야 했다.

12·12 당시 반란군 진압 부대 지휘... "강제전역 확실"

부인 정혜자씨는 윤 장군의 전역을 "타의에 의한 강제전역"이었다고 단언했다.

"우리 영감님이 12·12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게 전두환 대통령 눈에 들지 않았겠죠. 집에 와선 통 밖에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는데, 강제로 전역을 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윤 장군은 전역 후에도 쿠데타 당일 석연치 않은 복귀지시로 정치군인들이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제5공화국을 탄생시켜 군부독재가 연장되는 계기를 발본색원할 수 없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그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우리 사회에 법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승화 대장을 비롯해 12·12 당시 육본의 정식지휘 계통 아래 있었던 장군 22명을 규합, 19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반란죄 공소시효가 15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해서 영감님이 고소장 초안을 작성하시고, 그걸 장태완 장군님에게 드렸지요. 당시 고소를 하셨던 22분 중 절반이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22명의 고소인 중에는 윤 장군의 친형 윤흥정(육사 8기, 2002년 별세) 예비역 육군 중장도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투교육사령관으로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었던 윤 중장도 광주시민들의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전격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난 1988년 국회에서 열린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윤 중장은 "부대원들에게 총을 빼앗기지도 말고 그렇다고 쏘지도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 고소사건에 대해 검찰은 "직접 피해당사자들인 동시에 당시 군 수뇌부를 이루고 있던 인물들이 낸 것이라는 점에서 무게를 지닌다"고 밝혔다. 8·15 광복 이래 역사가 오히려 뒷걸음치면서 겨레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 탄압을 받고, 민족을 배반하거나 민주정부를 뒤엎은 자들이 권력을 잡아 영화를 누리는 것을 보며 분개하던 국민들도 당시 열릴 재판에 대해 민족사를 바른 궤도에 올릴 계기가 되리라고 기대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은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결정을 내렸으나, 1995년 1월 헌법재판소는 12·12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결정을 내려 논쟁이 계속됐다. 그해 7월 검찰은 5·18 관련자들에게 '공소권이 없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군인정신으로 한평생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것만..."

윤흥기 장군이 투병중인 병실 윤흥기 예비역 소장이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중인 중앙보훈병원 호스피스 병실 모습.
윤흥기 장군이 투병중인 병실윤흥기 예비역 소장이 의식불명 상태로 투병중인 중앙보훈병원 호스피스 병실 모습. ⓒ 김도균

하지만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거센 국민적 요구가 있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해 11월 비자금 관련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은 민자당에 5·18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전격적으로 지시했다.

이에 검찰은 12·12와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반란수괴 등 혐의로 12월 구속 수감됐다. 같은 달 5·18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며 1996년 1년 내내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 및 5·18, 비자금 관련 공판이 진행됐다.

마침내 재판부는 1997년 "12·12는 명백한 군사 반란이며 5·17과 5·18은 내란 또는 내란목적 살인행위였다"고 적시,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하는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평소 '12·12에 대해서 책을 하나 쓰겠다', '유작으로 두 딸들 앞으로 남기겠다' 그러셨어요. 아직도 12·12에 대해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겠다고 책을 쓰시려고 오랫동안 자료도 준비하셨는데 지난 2000년 갑자기 방광암 3기 판정을 받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군 후배에게 드렸어요. 그분이 지금 출판을 준비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군사반란 동조자들을 고소함으로써 '역사바로세우기'의 계기를 제공했던 22명의 고소인들 중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진기 육본 헌병감 등 12명의 장군들이 이미 고인이 됐다. 그리고 이제 또 한 명의 노병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외람되지만 정치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영감님도 남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오로지 올바른 군인정신으로 한평생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아왔다는 것만 써주셨으면 합니다. 역사에 기록돼 있는 대로 보태거나 더하지 말고…."

정씨는 남편이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걸 절대로 원치 않을 거라며 병상에 누운 모습을 촬영하는 것을 한사코 사양했다.


#윤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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