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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미국 대통령(왼쪽)과 맥아더 장군이 웨이크 섬에서 만나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1950. 10. 15.).
 트루먼 미국 대통령(왼쪽)과 맥아더 장군이 웨이크 섬에서 만나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1950. 10. 15.).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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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체포

맥아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군사전문가조차도 그 성공확률을 '1/5000'로 보는, '세기의 도박'이라고 혹평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전문가들을 비웃듯이 그들의 예상을 깨고 성공했다. 이 작전의 성공 요인은 맥아더 장군이 상대의 허를 찌르는 틈새공략과 제공권, 제해권의 완벽한 장악, 병력과 화력의 절대 우위 등,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950년 9월 23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그동안 한 달 남짓 낙동강전선의 교착상태에서 벗어나 인민군을 맹공하며 그들의 후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개시한지 사흘 만에 낙동강전선에서 경기도 오산에서 인천 상륙부대인 미 제7사단 병력과 연결할 정도로 초고속 북진을 강행하였다.

이렇다 보니 남한 지역에 남아 있는 인민군 소탕작전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잔적 소탕보다 반격의 기세를 몰아 한국전쟁을 이 참에 아주 끝장내고자 하는 생각이 더 앞서 있었다. "급히 먹는 밥에 목이 멘다"는 말처럼 치밀치 못하고 성급했던 유엔군의 반격작전은 승기를 잡고도 끝내 이기지 못한 큰 패착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무튼 3년 남짓 지속된 지루한 한국전쟁은 자유 우방 16개국이 참전하고도 북한, 중국 두 나라 군대를 이기지 못한, 16 : 2의 전투에서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써 미국은 새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전쟁'으로, 세계 최강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겨 버렸다. 한때 맥아더는 만주 폭격과 원자탄 투하를 주장하는 등 확전을 꾀하였지만 평화를 원하는 세계 여론에 밀려 트루먼 대통령에게 극동군사령관 및 유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당하는 수모를 맛보았다.

만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의 주장대로 만주 북폭과 원자탄 투하 등 확전을 감행하며 북진을 하였다면, 그 무렵 원자탄을 개발하고 기회를 엿보던 소련까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을 것이다. 이는 곧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인류는 또 다시 대재앙을 겪었을 것이다. 강대국간의 이해와 분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치 않고, 전쟁으로 몰고가려는 발상은 각종 무기가 초고속으로 발명 발달된 현대에 인류 스스로 자멸케 하는, 몰이성적이요, 야만적인 반 역사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보름달

준기는 추풍령 외딴집을 떠난 뒤 곧 경부선 철길을 만났다. 그 철길을 건너자 국도가 나왔다. 한가위 보름달은 전쟁 중임에도 휘영청 더욱 밝았다. 그 밝은 보름달이 준기에게는 마냥 을씨년스러웠다. 아마도 그가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달이 하늘 한가운데 머문 것으로 보아 자정 전후인 것 같았다.

준기는 지난 8월 1일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을 수료한 뒤 전방부대로 배치될 때 황간에서 부터 이곳 추풍령을 야간행군으로 지났다. 하지만 그때는 한밤 중이라 이 일대 지형에 대한 기억이 전혀 되살아나지 않았다.

준기는 그곳에서 한동안 지형과 주위를 살폈다. 사방은 고요했지만 국도에는 이따금 지프차와 군인을 태운 트럭들이 북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국군이나 유엔군으로 보였다. 준기는 철길을 따라 가거나 국도를 걸어 북상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는 거나 다름이 없을 것 같았다.

"부디 몸 성히 돌아오라."
"오마니는 네레(네가) 훈장을 따오기보다 기더(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가서."
"오마니! 걱덩마시라요. 내레 꼭 살아 돌아오가시오."

고향 구장 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면서 아버지 어머니와 마지막 주고 받은 말이 환청처럼 울렸다. 부모님의 목소리가 불쑥 용기를 주었다.

서울로 가는 경부선 철길(추풍령 역, 2013. 7. 29.).
 서울로 가는 경부선 철길(추풍령 역, 2013. 7. 29.).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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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기는 날렵하게 국도를 가로 질러 건넌 뒤 앞산 골짜기로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는 지도도 나침판도 없기에 북극성을 바라보며 계속 북동쪽으로 걸었다. 너무 험한 산은 피하며 오솔길과 마을길을 따라 걷었다. 새벽녘에 자그마한 산마을 외딴집에 이르렀다. 마침 한 노인이 쇠죽을 끓이고 있었다.

"할아바디, 여기가 어드메요"
"머라꼬?"
"여기레 경상도 땅이야요? 충청도 땅이야요?"
"여긴 경상도 상주군 공성면 신곡리다."

"아, 네"
"어데로 가는 길이고?"
"고향에 가는 길입네다."
"고향이 어딘데?"
"펭안도 영벤이야요."
"머라꼬? 거길 걸어서 간다는 말이가?"

"아직 다니는 차가 없기에…."
"그래 어데서 오노?"
"추풍넝에서 와시오."
"길도 잘 모르민서 밤새 마이 걸어 왔데이. 요새 부쩍 산을 타고 북쪽으로 가는 사람이 많더라."
"아, 네. 할아바디, 내레 좀 쉬었다 가게 해주시라요."
"알았다. 이 방에 들어가라. 내가 거처하는 방인데 지금 막 쇠죽을 끓이느라 불을 때서 곧 뜨뜻할 거다."
"고맙습네다."

준기는 신발을 들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길을 묻다

"누기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 임자는 모른 척하고 아침밥이나 야무지게 한 그릇 더 채리라."
"영감은 누군지도 모르고."
"예로부터 우리네 인심은 과객에게는 밥 한 끼 멕여 보내는 기다."

준기가 건넌방에서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헛기침 소리가 났다.

"안 자면 건너 온나."
"네, 가디요."

준기가 안방으로 가자 둥근 밥상에 밥이 세 그릇 놓여있었다.

"마, 따로 상을 채리지 않았다."
"벨 말씀을요."

명절 다음날이라 반찬이 많았다.

"그래 고향 가는 길은 알고 가나?"
"잘 모릅네다. 좀 알쾌주시라요."
"우선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만 옛날부터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은 상주로 해서 문경새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요기서 상주는 얼매나 됩니까?"
"한 이 십리밖에 안 된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자면 지나야 했던 문경새재 들머리로 최근에 새로 세웠다.
 영남지역에서 서울로 가자면 지나야 했던 문경새재 들머리로 최근에 새로 세웠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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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핀도 니 핀도 없다

"내 말씨 들어본께 북선(북조선, 인민군) 군인 같다."

영감의 말에 준기는 뜨끔했다.

"…기러습…네다…."

준기는 얼더듬으며 대꾸했다.

"마, 내 집에 있는 동안은 걱정마라. 사실 내 같은 무지렁이 농투사니(농사꾼)들은 내 핀(편)도 니 핀도 없다. 우리 조선 백성들이 언제 내 핀 니 핀이 있었나. 다 한 핏줄 조선사람들 아이가(아니가)."
"사실이 기러터만요. 서로 총을 든 북남 인민들이 모두 김씨요, 이씨요, 조씨 들이더만요."

영감은 그동안 꾹 참았던 말문을 열었다. 무지렁이 노인이지만 그나름대로 세상 보는 눈은 있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우리 조상들이 세상 흐름을 모르고 산 탓으로 저래 원수처럼 싸운다 아이가. 양반이라칸 놈들하고 벼슬한 놈들이 백성들 볼기짝이나 때리면서 등쳐 먹다가 나라를 왜놈들한테 빼앗겼고, 그 왜놈들이 간뎅이가 부어 코쟁이들하고 싸우다가 그놈들한테 지니까 저들이 통채로 집어먹었던 조선 땅을 게워내자 그 놈들이 전리품으로 덥석 반쪽씩 나눠가진 기라. 내 무식해 잘 모르겠다만, 이번 전쟁은 미국 놈 소련 놈들이 조선반도를 둘이 농갈라(나눠) 먹고 보니 지들 성이 안 차자 혼자 다 먹겠다고 서로 싸우는 거 아이가. 그 틈에 죽어나는 이는 조선백성들 뿐이데이. 사실은 내 집 막둥이도 김천중핵교에 다녔는데, 난리 중 안방 다락에 숨어지내다가 꼭 한달 전에 인민위원회에 들켜 의용군으로 붙잡히 나갔다."
"아, 네…."

그 말에 할머니는 수저를 놓고 앞치마를 끌어다 눈물을 닦았다.

"올해 멫이고?"
"열 여섯입네다."
"그라만 우리 집 막둥이랑 동갑이다."
"아, 네."

할머니가 계속 울먹이며 말했다.

"날마다 비행구가 저리키도 난릴 치고 대포가 천둥치듯 짜들아 쏘아쌌는데 그 틈에 걔가 살아있을지 몰라."
"마, 지 밍(명)이 길면 살아올 끼다. …죽고 사는 건 다 지  팔자다. 하지만 아침저녁 정화수 떠놓고 비는 임자 정성에 염라대왕님이 감복해서 돌려보내 줄 끼다." 
"낼은 직기사(직지사)에 가서 한 사흘 불공드리고 와야겠소."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까?"
"영감 마음 내친대로 하소."
"그럼, 그라지."

준기가 밥그릇을 다 비우자 할머니는 애랫목에 묻어둔  놋쇠 밥그릇을 꺼내 상 위에 올려놓았다.

"내 밥상머리에 앉아 울쩍거려 미안타. 이리저리 쫓기다니느라 지대로 조석도 먹지 못했을 텐데 단디 먹어라."
"아넵니다. 되시우."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단디 먹어둬라."

할머니는 부엌에 나가 따뜻한 국도 다시 한 그릇 떠왔다.

"고맙습네다."
"우야든동 꼭 부모 상봉하거라. 집에서 마이 기다릴 거다."
"네, 기러겠습네다."

가족들이 학살 현장에서 가장의 시신을 찾은 뒤 통곡하고 있다(전주, 1951. 9. 27.).
 가족들이 학살 현장에서 가장의 시신을 찾은 뒤 통곡하고 있다(전주, 1951. 9. 27.).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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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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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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