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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열규 교수 집 창에서 본 풍경
 김열규 교수 집 창에서 본 풍경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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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교수 눈길 닿으니
홍자색 꽃이 핀다
- 이상옥의 디카시 <자란만(紫蘭灣)>

정해룡 시인(전 통영예총회장)의 전화를 받았다. "김열규 교수님이 혈액암으로 경상대 병원에 입원해 계시니, 같이 병문안 가자"는 것이다.

김열규 교수(81)는 한국학의 석학으로  쉰아홉이던 1991년 부인 정상옥 여사와 함께 서강대 정년을 6년이 앞두고 경남 고성으로 귀향하여 김해 인제대에서 전임으로 일흔까지 강의를 했고, 이어서 대구 계명대에서 또 석좌교수로 일흔셋까지 근무했다. 그리고는 지리산고등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쳤고, 최근에는 경상대학교에 시간강사를 했다.

이렇게 쉬지 않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은, 무명의 릴케가 파리에 와서 로댕의 비서로 일할 때 로댕이 릴케에게 가르친 것이 '항상 일하라'라는 것이었는데, 김 교수는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김 교수는 유독 릴케를 좋아하는 바, 그가 학자이지만 시인의 감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릴케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김열규 교수는 귀향 이후만 70여 권의 역작을 썼다. 그중 한 권이 <노년의 즐거움>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삶의 노숙함과 노련함으로 무장한 노년기가 결코 청춘기 못지 않는 가능성의 시기이며, 가슴 뛰는 생의 시작이라고 노년의 희망과 즐거움을 말한다.

이 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위인이나 대인의 용모를 노년의 초상화에 담으려 한 것이, 젊은 시절의 사진이나 그림이 남겨져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이나 중장년기의 초상으로는 거인·거물들이 이룩해낸, 그들이 다다른 완성과 성취를 드러내기가 모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년의 위대함을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김 교수의 노년 예찬은 그의 삶을 통해서 실현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공허하지가 않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초조함을 느끼게 되지만  김열규 교수님을 만나보면 그건 하나의 기우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김열규 교수 집으로 가는 골목길 앞에 서 있는 정자나무. 이 나무는 마치 김열규 교수의 거대한 정신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듯 우람하다.
 김열규 교수 집으로 가는 골목길 앞에 서 있는 정자나무. 이 나무는 마치 김열규 교수의 거대한 정신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듯 우람하다.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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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열규 교수는 1991년 서울을 떠나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송내마을로 온 지 20년이 넘었다. 정자나무 옆에 있는 송내마을 표지석.
 김열규 교수는 1991년 서울을 떠나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 송내마을로 온 지 20년이 넘었다. 정자나무 옆에 있는 송내마을 표지석.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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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룡 시인의 전화를 받고 김열규 교수님 병문안을 지난 26일 다녀왔다. 경상대병원에서 1차 항암주사를 맞고 집으로 퇴원하는 시점에 맞추어 찾아 뵈었다. 마침 정해룡 시인이 정상옥 수필가(사모님)를 아침에 모시고 경상대병원에 들러서 김교수님을 집으로 모시고 온 시간이 1시경이었다.

나는 조금 일찍 도착하여 김열규 교수님이 자리잡은 자란만이 보이는 송천리를 이러저리 둘러보며 상념에 잠겼다. 김교수님 집 앞에는 큰 정자나무가 있어서 김 교수님의 높고 깊은 사유의 세계를 잘 표상하고 있는 듯했다.

 김열규 교수가 거주하고 있는 2층집. 집안에서 바라보는 자란만이 있는 바다가 절경이다.
 김열규 교수가 거주하고 있는 2층집. 집안에서 바라보는 자란만이 있는 바다가 절경이다.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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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교수님은 1차 항암치료를 받아서 많이 힘든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정신은 맑아서 나를 반갑게 맞으셨다. 2층에서 정상옥 사모님과 정해룡 시인과 같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병과 싸우기보다 항암주사와 싸우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며, 통 입맛이 없어서 음식 먹기가 힘들다고 했다. 경상대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입원해 있으면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고 하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고도 말했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이 되어 치료를 하면 완치가 된다고 하니 다소 마음이 놓인다. 김열규 교수는 원래 건강체가 아니어서 결혼 당시 김 교수의 어머니가 며느리인 정상옥에게 하는 말이 아무쪼록 김 교수가 오십만 넘기도록 하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은 혈액암 진단을 받기 얼마 전 김 교수님 댁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때 정상옥 사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김 교수님은 아주 건강한 상태여서 같이 담소를 나누는 중에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다.

너무 오래 지체하면 김 교수님이 힘드실 것 같아 정해룡 시인과 서둘러 일어섰다. 나오는 길에 아름답게 조성된 정원의 유실수들이 흐드러지게 가지를 뻗고 과일을 탐스럽게 맺고 있는 정경이 보였다. 돌복숭들은 지천으로 마당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최근까지 해마다 5권 이상의 책을 내면서 책을 쓰는 순간이 자신의 생명력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순간이고 그것이 바로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하던 김열규 교수님의 왕성한 집필력을 당분간은 만나기 힘들게 된 것은 독자로서 많이 애석한 일이다. 하지만 김 교수님의 맑고 잡된 것이 없는 생에 대한 열정이 여전하기 때문에 병마를 조만간 이겨내고 우리들에게 환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



#디카시#김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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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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