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호 태풍이 일기 시작하는 여름밤에아내가 마루에서 거미를 잡고 있는꼴이 우습다하나 죽이고둘 죽이고넷 죽이고……야 고만 죽여라 고만 죽여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정말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1960. 7. 28)
김수영 선생님, 부끄럽게 고백합니다. 저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산문형의 이성적인 삶을 바랍니다. '나'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현실의 불합리도 '나'를 통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늘 생각을 하고, 말을 하며, 글을 쓰며 행동을 하려고 애씁니다.
이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나'가 있습니다. 그 '나'는 운문형의 감성적인 인생을 꿈꿉니다. 폭발하듯 분출하는 열정에 느닷없이 사로잡힙니다. 술이라도 마시면 엉망진창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때의 '나'는 그 누구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때의 제 속마음은 마치 "술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면, 눈을 부라리고 입술을 실룩이는"(<김수영 평전> 302쪽) 격정에 사로잡힌 선생님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또 다른 '나'를 향해 정신 차리라 부르댑니다. 정신 똑바로 차린 채 이 세상 올바르게 살라며 힘주어 가르칩니다. '나'는 또 다른 '나'에게 이유 없는 낭만이 가져오는 반동의 삶을 경계하라며 조용히 타이릅니다. '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다그칩니다. 결코 멈추지 말라고. 멈추더라도 늘 자신을 되돌아보라고. '나'는 그것이 진정한 사람의 길임을, 이 시끄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자의 책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저는 이 시를 읽으며 선생님의 속사람을 그려 보았습니다. "어제의 남편"(3연 3행)이 그 속사람이겠지요. 선생님의 문제적인 자아, 곧 또 다른 '나' 말입니다. 그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오늘 아침에 서약"(3연 2행)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제의, 그러니까 과거의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아내'는 선생님을 여전히 "어제의 남편"으로 여깁니다. '아내'가 보기에 "어제의 남편"은 무수한 '거미'가 되어 날뜁니다. '아내'는 그 "어제의 남편"의 분신인 '거미'를 죽입니다. "어제의 남편"은 이미 가고 없는데도, '아내'는 '거미'를 여전한 "어제의 남편"으로 여긴 채 하나 둘 잔인하게 짓이깁니다.
선생님의 '서약'이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과거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부족한 것일까요. 짐작컨대 선생님의 '서약'은 충분히 강했으리라 봅니다. 몸부림은 누구나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도 왜 '아내'는 선생님을 "어제의 남편"인 '거미'를 짓이길까요.
선생님께서도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만, 한 편의 시가 현실의 굳건한 벽을 쓰러뜨리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벽에 부딪는 일은 할 수 있지요. 시가 쉼 없이 현실의 벽에 부딪는 과정은 무모해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현실의 벽에 틈을 내고, 결국 그것을 무너뜨리게 되지 않을런지요. 시를 향한 믿음은 그 어떤 강한 무기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나는 아직까지도 '시를 안다는 것'보다는 더 큰 재산을 모르오.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오. (<김수영평전>, 287쪽)이 시는 아마도 그런 '무모함'을 향한 다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의 남편"이 한 것보다 더 강한 '서약'과, 그 어떤 단단한 벽에 부딪혀도 쓰러지지 않을 굳은 의지를 위한 노래 말입니다.
선생님, 문득 생각해 봅니다. "'시를 안다는 것'보다는 더 큰 재산을 모르"겠다고 여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시를 안다는 것은 전부를 아는 것"이라며, 시에 온몸을 내던지는 시인은 또 과연 얼마나 될까요. 시에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고, 웅대한 예지를 지닌 시인이 사람들을 이끌지 못하는 이 타락한 시대를 우리는 대체 어떻게 건너가야 할까요. 재떨이를 던져 문창살을 박살내며, 혁명을 모독하는 얼빠진 이들을 일갈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