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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가옥 전경 안에 들어가려면 사진이 걸린 벽면 왼쪽으로 나 있는 철문을 열어야 한다.
정병욱 가옥 전경안에 들어가려면 사진이 걸린 벽면 왼쪽으로 나 있는 철문을 열어야 한다. ⓒ 서부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유명한 윤동주의 '서시' 첫 구절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 없는' 대표 애송시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 중 체포되어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요절 시인이자 항일 독립운동가다.

주지하다시피 그의 유고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시'를 비롯해, '별 헤는 밤'과 '자화상'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다수 실려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온전히 전해지기까지는 특별한 사연이 전해진다. 일제가 패망을 앞둔 1940년대에 그의 육필 원고 묶음이 하마터면 통째로 사라질 뻔했다.

지금은 윤동주의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기증되어 보관돼 있지만, 그의 육필 원고가 무사히 해방을 맞은 곳은 '생뚱맞게도' 남해바다에 면한 궁벽한 어촌 마을의 양조장에서다. 전라남도 광양의 망덕포구. 해마다 초가을이면 전어축제가 열리는 바로 그곳이다. 시인의 고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 한 번 다녀간 적도 없는 이곳에 원고가 보관된 이유가 뭘까.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보관했던 곳'으로 가는 길

정병욱 가옥 내부 찾는 이들이 거의 없는지, 안내판에도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내부가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위태하다.
정병욱 가옥 내부찾는 이들이 거의 없는지, 안내판에도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내부가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위태위태하다. ⓒ 서부원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숨겼던 곳 마룻바닥을 뜯어낸 곳에는 거미줄만 무성하다.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숨겼던 곳마룻바닥을 뜯어낸 곳에는 거미줄만 무성하다. ⓒ 서부원

두만강 너머 북간도의 용정촌이 고향인 윤동주는 1941년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교토의 도시샤 대학으로 갑작스럽게 유학을 떠나게 된다. 떠나기 전 작품들을 엮어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후배였던 정병욱(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에게 원고를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원고를 건네받은 정병욱의 삶도 그리 평탄치는 않았다. 일제강점기 말 학병으로 끌려가게 된 것. 징집되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에게 원고를 넘기며, 해방 뒤 모교에 건네질 때까지 잘 보관해달라며 신신당부했다. 당시 어머니가 살던, 그의 고향이 바로 남해바다를 마당삼은 광양 망덕포구였던 것이다.

'정병욱 가옥'. 이름만 봐서는 오래된 중요민속자료 같지만, 그 이름 앞에는 꼭 '윤동주의 육필 원고를 보관했던 곳'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내비게이션에서도 그렇게 안내한다. 그런데, 정작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그곳을 찾아가기란 무척 어렵다. 도로의 안내표지판 어디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탓이다.

지난 일요일(1일), 오작동하는 내비게이션을 탓해가며 어렵사리 그곳을 찾았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라는 동판이 번듯하게 붙어있긴 하지만, 바닷바람에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롭게 서 있다. 흉물스럽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하다. 도저히 지정, 관리되고 있는 문화재라고 볼 수 없는 '폐가' 그 자체다.

그렇다고 '외로운' 건물은 아니다. 주말이나, 특히 요즘 같은 초가을에는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어서다. 야트막한 산을 등진 채 앞은 바다로 열려 있고, 양 옆으로는 횟집이 바닷가를 따라 즐비하다. 수백 미터에 이르는 횟집 거리 사이에 데면데면하게 끼어있다고나 할까.

그날도 횟집마다에는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2차선 도로 한쪽이 아예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낡은 건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큼지막한 문화재 안내 현수막이 내걸려 있지만, 거기에 눈길을 주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혹시나 하고 그곳에서 한참을 머물러있었는데도 단 한 대의 자동차도 그 앞에 서지 않았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그곳에서 내가 본 건...

퇴락한 벽에 걸린 녹슨 열쇠 어느 곳의 자물쇠를 열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녹이 슬어 있어 사용된지 적어도 한두 해는 더 지난 듯하다.
퇴락한 벽에 걸린 녹슨 열쇠어느 곳의 자물쇠를 열려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녹이 슬어 있어 사용된지 적어도 한두 해는 더 지난 듯하다. ⓒ 서부원

정면에 윤동주와 정병욱을 나란히 찍은 흑백 사진과 입구에 심플한 디자인으로 세워놓은 문화재 안내판이 되레 어색할 지경이다. 도로 쪽으로 난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다. 미닫이로 된 문이 워낙 낡아 설령 안에서 잠그지 않았다 해도 열리지 않았을 것 같다. 그저 좁고 뿌연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이다.

안을 구경하자면 가옥 왼쪽으로 난 철문을 직접 열고 들어가야 한다. 말하자면 안채로 곧장 들어가는 뒷문인 셈이다. 철문에 달린 뻑뻑한 녹슨 손잡이가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거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오래 전에 인적이 끊어진 탓일까. '유일한' 관광객을 처음 반겨준 건 윙윙거리며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말벌떼였다.

비좁은 실내로 들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건 그렇다 해도 퇴락한 목조 부재들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휘어져 있고, 삐져나온 못들은 시커멓게 녹이 슬어 혹여 살갗에 스칠까 두려울 정도다. 문짝마다 창호지는 곳곳이 찢긴 채 나풀거리고, 실내가 온통 회색빛이어서 가운데 놓인 새뜻한 소화기가 무척 낯설어 보인다.

건넌방에는 옛 집 주인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못다 치운 가재도구들이 널브러져 있고, 육필 원고를 숨긴 곳으로 전해지는 마룻바닥은 의도적으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볼썽사납게 뜯겨져있다.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곳일진대, 자상한 안내문이 있을 법도 하건만 그곳엔 '원고가 숨겨져 있던 곳'이라고 적힌 성의 없는 팻말이 전부다.

상점을 겸한 일본식 주택으로 건축학적 가치 또한 높다고 기록돼 있지만, 건물을 유지, 보존하려는 거창한 계획은커녕 당장 비질하고 먼지라도 털어내는 해당 관청의 관심과 성의가 아쉽다. 그저 사유재산이라 어쩔 수 없다며 손 놓고 나몰라라 하는 건, 독립운동가 윤동주와 '서시'에 대한 모독일 수 있다. 벽면에 적힌 '서시' 전문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접한 당혹스러운 뉴스

망덕포구의 전어 특화거리 정병욱 가옥 옆으로 전어 횟집이 수백 미터 늘어서 있다. 전어문화축제가 시작되면 인산인해로 북적이게 될 현장이다.
망덕포구의 전어 특화거리정병욱 가옥 옆으로 전어 횟집이 수백 미터 늘어서 있다. 전어문화축제가 시작되면 인산인해로 북적이게 될 현장이다. ⓒ 서부원

씁쓸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에 당혹스러운 뉴스를 접했다. 찾는 이 없이 초라하게 방치된 윤동주와 '서시'와는 사뭇 대조적인 소식이었다. 검정을 통과한 교학사의 뉴라이트 성향의 한국사 교과서가 이미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법적,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촌 김성수와 육당 최남선을 미화하고 두둔하는 내용을 실었다는 것이다.

'과오는 있으나 공적도 못지않다'는 전형적인 물 타기 서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문제연구소가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의 맨 앞자리에 위치한 인물들이 아이들이 배울 교과서에 버젓이 항일 투사인양 적고 있다. '국부' 이승만과 '근대화의 영웅' 박정희를 미화해온 뉴라이트의 '눈물겨운' 노력의 종착역이 결국 친일 반민족 행위자의 '복권'임이 명확해진 것이다.

자칭 보수정권이라면 항일 민족운동에 대한 평가는 냉혹할 정도로 철저해야 하고, 미래세대 아이들의 교육과 역사의식을 책임지는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라면 정치적인 외압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교학사의 새 한국사 교과서 서술을 통해 뉴라이트가 과연 제대로 된 '보수'인지,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과연 우리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운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윤동주의 '소울메이트'였다는 독립운동가 송몽규는 이름조차 생소하고, 김창숙과 여운형, 김원봉 등이 평가받을 자리에 김성수와 최남선 따위의 친일파를 재평가하자는 주장을 마구 뒤섞으려는 건 엄연한 역사 왜곡이며 반민족적인 범죄 행위다. 기우일지는 모르지만, 이러다간 윤동주가 일제강점기 나약한 지식인으로 그려지고, '서시'가 국어 교과서에서 퇴출되는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이번 주 금요일인 9월 6일부터 사흘간 '정병욱 가옥' 주변에서는 섬진강 전어 문화 축제가 펼쳐진다. 정확히 말하자면, 광양 망덕포구 횟집 거리 일원에서 열리는 최대의 가을 전어 축제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전어를 맛보러 망덕포구를 찾는다면, 부디 짬을 내 그곳에 들러보길 권한다.

혼자만의 생각일 테지만, 그냥 전어축제라고 하지 않고 굳이 전어'문화'축제라고 명명한 건 고소한 제철 전어를 맛보면서 윤동주와 '서시'의 자취가 서린 그곳에도 꼭 가보라는 취지 아니었을까. 지금은 '전어 특화거리'로 인식되고 있지만, '윤동주 문화거리'라고 불리게 된다면 훨씬 더 의미 있을 듯하다.


#섬진강전어문화축제#정병욱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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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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