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송포유>는 참 나쁜 프로그램이다. 거칠고, 잔인하며, 무섭다. 그리고 매우 씁쓸하다.
"학생들이 100일 동안 노력했다고 굉장히 갱생하거나 모범생이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라거나 "사회에서 일찍 낙인찍히거나 어른들이 밀어내버린 라인 밖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이나 사랑이 작은 변화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제작진과 담당 피디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송포유>는 1부 도입부부터 출연하는 학교와 학생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대상들인지를 시청자들에게 보여주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방황하는 아이들의 종착역'이라거나 '살짝 거친 ○○고 학생들', '나쁜 애들이 다닌다', '우리 학교 안 좋다'라는 등의 화면과 자막으로 해당 학교를 나락의 공간으로 표현했다.
또 온몸에 문신을 한 학생을 보여주거나 학교폭력 관련 사실을 고백하는 학생, 욕설하는 학생, 무질서한 모습의 학생들을 속도감 있는 화면과 큼직한 자막으로 보여주었다. 마치 범죄자를 잡는 수사물 같은 느낌의 화면처리. 거기에 카메라 꺼달라고 요구하는 학생의 모습까지도 '수틀리면 바로 폭발'이라는 자막과 함께 고스란히 내보냈다. 학생들을 충분히 희화화하고 아주 몹쓸 구경거리로 만들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악마의 편집'이라 이름 붙일 만하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분노했고, 언론들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학교폭력 가해자 미화라거나 일진 미화라는 말이 따라 붙었다. 학교폭력 피해자에게 사과나 반성, 자성이나 참회가 없다고도 했다. 반성 없이 노래만 할 거냐고 비아냥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 시대의 속성은 공격성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
일찍이 미국의 심리학자 하임 G. 기너트는 "우리 시대의 속성은 공격성을 부추긴다는 데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송포유>는 시청자들의 공격성을 부추겼다. 그리고 완벽하게 성공했다.
성장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나 옹이를 지니게 된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적의 같은 것들이 뒤섞여 끓고 있다. 여기에서 학교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구분은 무의미하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양식이 다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이나 고민 따위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도 모른다. 어떤 어른도 그들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살피면서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은 탓이다. 이들에게 다짜고짜 반성문을 써 내라고만 소리치며 반성과 참회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송포유> 논란에는 고스란히 반영돼 있어 씁쓸함을 더한다.
20여 년 전 본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1991)에는 아직도 생생한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 사랑하는 사이였던 여자 주인공 미셀이 떠나가자 남자 주인공 알렉스가 '아무도 나에게 잊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라고 독백하며 자기 손가락을 총으로 쏘아 자해하는 장면.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는 건 배워서 하는 게 아닌 본능적인 것이지만 그 대상을 잊는 건 그렇지 않다는 메시지의 아픈 전율.
<송포유>에 등장하는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행위나 버릇 혹은 성장과정에서 빚어진 상황 등에 대해 성찰하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나 기회를 충분히 제대로 준 적이 있었던가,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면서 일찌감치 문제아로 낙인부터 찍어 가정과 학교에서 포기하고 격리·배제하여 내쫒아 건강한 어른 세계로 성장·진입하는 길을 차단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자라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반성만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가정과 사회의 잔인한 외면과 방치가 아이들을 잔인하고 난폭한 괴물로 만들어버린 또 하나의 '악마의 편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직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우르르 달려들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데에만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은 아닐까.
그들에게 자신을 사랑하는 법,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라 여기고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법을 제대로 차근차근 일러주기보다는 낙인과 배제를 일삼아 열정도 참을성도 다 사라지고 무기력한 모습에 짐승 같은 분노만 내재한 아이들로 만들어버린 건 바로 우리들의 잘못이다.
그래놓고서 너는 왜 그렇게 사느냐고, 너는 왜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느냐고 비난을 일삼고 반성과 참회만을 강요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진심 어린 반성이야 하든 말든, '잘 못했습니다'라고 강요에 못 이겨 형식적으로 쓴 반성문 한 장이면 반성하고 뉘우친 것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시늉을 하는 연극은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 1, 2부와 달리 3부에서 좀 변화한 아이들의 모습을 두고 '감동'이라거나 '참회의 반전'이라는 등의 요란한 수사를 들먹이는 언론 보도가 안타까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이제 100일간의 <송포유>는 끝이 났다. 100일 이전에는 괴물처럼 묘사되던 아이들이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에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기에 <송포유>의 아이들이 겪은 100일은 작은 태동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작 변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반성을 강요했던 나와 당신들이다. 나와 당신들의 거친 강요의 습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송포유>의 주인공들에게 우리는 여전히 같은 모습의 폭력을 휘두르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당신을 위한 노래'를 부르려면 내 마음이 먼저 따뜻하고 행복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