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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보름가량 열린 제10회 드림파크 국화축제가 지난 6일 끝났습니다. 약 150만 명이 관람했다니 대박을 터뜨린 셈이지요. 나는 그 축제의 마지막 날에 아내랑 갔습니다. 구경을 갔느냐고요? 아니랍니다. 55세, 이 나이에 알바를 하러 갔던 것입니다.

그건 정말 뜻밖의 일었습니다. 지난 9월 초에 내가 회원으로 있는 어느 문학회 월례모임에 갔더니 오는 국화축제에 우리 문학회가 일을 하게 됐다고 회장이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첫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매일 2명씩 배당해야 되는데, 가족이나 친지, 혹은 친구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당으로 개인 당 5만 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 참가한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희망하는 날짜에다 2명씩 이름을 적었는데, 나는 일요일인 마지막 날에 나와 아내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편한 알바인 줄 알고 갔더니... 이게 웬 날벼락

 국화축제에 우리 문학회가 일을 하게 됐다고 해서 알바를 신청했을 뿐인데... 사진은 외국의 한 정원.
국화축제에 우리 문학회가 일을 하게 됐다고 해서 알바를 신청했을 뿐인데... 사진은 외국의 한 정원. ⓒ sxc

6일 오전 9시 30분까지 가야 하므로 무척 바빴습니다. 검암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간신히 우리가 일해야 할 장소를 찾았습니다. 이미 나와 있는 행사 관계자와 인사를 나누었는데, 대뜸 첫 마디가 그런 옷차림으로 오면 어떻게 하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넥타이는 매지 않고 가벼운 양복 차림으로 갔는데 그렇게 물어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했습니다. 나는 며칠 전 아내에게 문학회에서 하는 거니까 아마도 좋은 작품들 전시할 거라며 우리는 가서 편안하게 관람객들을 안내하면 될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의외의 상황에 좀 당황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먼저 이거나 입으라고 이미 준비해 놓은 조끼를 꺼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윗옷을 벗고 그것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를 옆에 있는 일터로 데려갔습니다. 아, 이게 어찌 된 일인가요? 아내에게 우아하고 고상한 일을 그것도 아주 편안하게 할 거라며 가방에 쉬면서 읽을 책과 신문을 넣어 가져갔는데, 이건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것이었습니다.

컬러점토 놀이체험, 녹청자 유물찾기. 이 두 코너가 바로 우리가 하루 종일 일을 할 일터였습니다. 아내는 컬러점토 놀이체험을, 나는 녹청자 유물찾기를 맡았는데, 다행히 두 곳이 옆에 붙어서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이왕 주어진 일 열심히 하자며 관계자가 가르쳐준 대로 관람객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씨름판처럼 네모나게 만들어놓은 모래판 속에다가 조그만 도자기, 그릇 등 유물들을 깊숙이 숨겨놨습니다. 그리고 모종삽과 붓, 플라스틱 통 등을 가지런히 가장자리에 놓았습니다. 그것들을 준비할 때에 어느 가족이 왔습니다. 아이가 둘인 젊은 부부인데, 오자마자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모래판으로 들어와 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5분이 지났을까요? 이번에는 아이들이 4명이나 왔습니다. 순식간에 아이들은 6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래 내가 맡은 곳이니 아이들과 재미있게 놀아야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나도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지만 쇠로 된 모종삽이므로 사용하다가 다칠 수가 있으므로 시선을 조금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이곳저곳을 파헤치다가 드디어 유물을 캐냈을 때에는 "야, 유물 캤다! 멋있구나. 잘했다" 하며 큰소리로 외쳐주며 박수를 보내줬습니다. 아이들은 그러는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퍽 즐거워했습니다. 곁에서 앉아 구경하던 부모들도 아주 만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시작한 지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요? 그 일은 나의 적성에 딱 맞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곳은 인기 있는 곳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쉬지 않고 꾸역꾸역 몰려 들었습니다. 많을 때는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서로 엉덩이를 부딪치면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나의 목소리도 더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아는 노래들을 가사가 맞든 틀리든 막 흥얼거렸습니다. 아내도 옆에서 재미있게 일하는 나를 보고 미소를 보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나고 즐겁게 아이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며 흥겹게 일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얼마 안 가서 금방 지치고 말았습니다. 좀 쉬고 싶은데 축제 마지막 날이고 일요일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말 그대로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모래판에 아이들이 많아 왔다가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유물을 찾으면 잘 했다고 칭찬하며 격려를 했는데, 그리고 그 유물을 다른 쪽에 묻어놓곤 했는데 점점 그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 들었습니다. 몸이 힘드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아이들은 찾은 유물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천막 뒤쪽에다가 그냥 갖다놨습니다. 내 눈에는 모래판 구석에 있는 의자만 보였습니다. 거기에 앉아 두 다리 죽 뻗치고 쉬고 싶었습니다. 거기에서 책이랑 신문을 보고 싶었습니다.

점심시간입니다. 나는 당연히 점심은 정해진 식당에서 한 시간 동안 여유 있게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를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관계자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국수와 국밥 중 하나를 정하라고 주문을 받는 거였습니다. 행사를 하는 곳이 많은 건 아는데 그렇다면 반은 쉬고 가서 먹고 오면 될 텐데 그게 안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하긴 그들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겁니다. 관람객이 그렇게도 많이 밀려오는데 점심시간을 딱 정해서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랑 또 다른 한 사람과 셋이서 아이들 노는 걸 보면서 선 채로 밥을 먹어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간절히 기다렸던 끝나는 시간이 됐습니다. 오후 6시, 나도 아내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몸은 완전 녹초가 돼 버렸습니다. 국화축제 알바가 이렇게 힘든 줄 알았더라면 신청하지 않았을 겁니다. 회장도 일하는 것 통보만 받았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 부부의 알바는 끝났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우리 부부는 각각의 통장으로 5만 원이 입금됐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 돈은 우리 부부가 피땀 흘려서 번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알바해선 사준 저녁 한 끼의 소중함을 느끼다

비록 힘들었지만 나는 그 알바 경험을 통해 아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올해 24세인 아들은 지난 4월에 제대한 후 대학에 복학하기 전에 영화 현장을 따라다니며 주로 촬영 쪽으로 알바를 해왔습니다. 당일로 새벽에 갔다가 밤늦게 오는 때도 있었으나 어떤 때는 2~3일 동안 나가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공부하고 촬영을 좋아하기에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만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의 모습으로 봐서 그 일이 얼마나 고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한 달 전쯤 나에게 저녁에 시간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동안 알바한 것이 통장에 80만 원 모아졌다며 가족을 위해 한 턱을 내고 싶다고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대해서 쉬지도 못하고 용돈이라도 벌려고 여러 알바를 했는데 그 번 돈으로 저녁을 산다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날 저녁은 동네 순댓국 음식점으로 우리 가족이 다함께 갔습니다. 아버지, 나, 아내, 딸, 그리고 한 턱을 쏘는 아들 이렇게 5명이 기분 좋게 한 자리에 사이좋게 앉아서 그 무엇보다도 맛있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다 먹고 아들은 상에 놓인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가서 자신의 카드로 계산을 했습니다. 아내도 나도 그런 아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지만 우리 부부가 한 알바는 아들이 한 것에 비해서 사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사고 없이 잘 놀 수 있게 조금만 돌봐주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 무거운 장비를 들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땀을 흘리는 막노동을 했습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옷도 몇 벌씩 버려가면서 알바를 했습니다. 이 나라의 보통 청년들이 하는 어렵고 힘든 알바를 오랫동안 하면서 그 돈을 벌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바를 하고 나니 그 돈이 얼마나 가치 있는 줄 알게 됐습니다. 그 노동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됐습니다. 아들이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을 위해 그날 한턱 낸 저녁이 얼마나 뜻 깊고 고귀한 것인 줄을 국화축제 알바를 통해 더욱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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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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