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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세 하루 전 쓰던 유고 원고
 별세 하루 전 쓰던 유고 원고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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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의 거장 김열규 교수님,
별세 하루 전 오후 다섯 시까지 글을 쓰시다
- 이상옥의 디카시 <유고 원고>

한국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가 22일 오전 10시 별세했다. 1932년 경남 고성 출생의 김열규 교수는 향년 81세가 된다. 한 달여 전에 혈액암 진단을 받고 경상대학병원에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글 읽기와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김열규 교수 서재에 놓여 있는 사진
 김열규 교수 서재에 놓여 있는 사진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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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하루 전 21일 경상대 병원에서 항암주사를 맞고 고성 자택으로 와서는 당일 오후 5시까지 에세이집 <아흔 즈음> 탈고를 위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김열규 교수는 별세 하루 전 오후 5시까지 이 책상에 앉아 원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김열규 교수는 별세 하루 전 오후 5시까지 이 책상에 앉아 원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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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교수는 <독서>에서 "내게 앎 없이 삶은 없다. 앎이 삶이고 삶이 곧 앎이다. 그러니 내게 읽기 없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읽음이 앎이다. 앎은 삶이다. 그렇다면 읽기가 삶이고 삶이 읽기이다. 이건 자명한 일이다. 배워서 알게 되고 알아서 살게 되는 이치 또한 명백하고, 읽기 없는 배움이 없을진댄, 읽기는 배움과 앎과 삶의 주춧돌이고 선봉장이다"라고 썼다.

그의 지론대로 평생 앎을 위해 읽고 쓰는 사람살이를 온몸으로 밀고 나갔다. 고성 송천리 자택에서 영면에 든 김열규 교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장엄했다. 그가 타계 하루 전까지 열정적으로 글 쓰던 책상 위의 유고 원고가 놓여 있었고, 컴퓨터 모니터에는 유고 에세이집 <아흔 즈음>의 초고 원고가 소롯이 저장되어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 글은 그의 마지막 글쓰기 모습을 보인다. 김열규 교수는 생전 원고지에 글을 먼저 쓰고 그것을 컴퓨터로 쳐 넣는 방식이었다. 이 글은 그가 생전 출간하고자 했던 에세이집 '마흔 즈음'의 원고이다.
 컴퓨터 모니터 글은 그의 마지막 글쓰기 모습을 보인다. 김열규 교수는 생전 원고지에 글을 먼저 쓰고 그것을 컴퓨터로 쳐 넣는 방식이었다. 이 글은 그가 생전 출간하고자 했던 에세이집 '마흔 즈음'의 원고이다.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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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 하루 전까지 김열규 교수는 고향 후배 정해룡 시인과 같이 시장을 보고, 또 전화로도 많은 얘기를 나눴다. 정해룡 시인은 김열규 교수가 경상대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을 때 모시고 가고 또 모시고 오고 해서, 김열규 교수의 마지막 순간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

정해룡 시인은 김열규 교수가 이 고비를 넘기면 구순까지는 살 수 있다면서, 앞으로 정해룡 시인과 공저도 내고 하자는 얘길했다고 한다. 김 교수 자신은 그날 바로 타계할 줄은 정녕 몰랐던 것이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세계일보>에 연재물을 쓰고, 에세이집 탈고며, KBS 인터뷰까지 소화하려는 삶의 열정을 끝까지 보였다.

1991년에는 정년을 6년 남겨두고 서강대 교수직을 내려놓은 뒤 고향 경남 고성을 거처를 옮기면서 인제대 교수직 제의를 받아들여 승용차로 1시간 이상 운전을 손수 하며 출강했다. 그의 귀향 자체가 당시에는 화제였다. 다들 서울로 못 가서 안달이었는데, 서울의 명문대학에서 시골로 느닷없이 낙향한 것이 도무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으니까.

 경남 고성 송천리 김열규 교수의 자택, 여기서 바라보는 자란만이 있는 바다는 정말 일품이다.
 경남 고성 송천리 김열규 교수의 자택, 여기서 바라보는 자란만이 있는 바다는 정말 일품이다.
ⓒ 이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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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 교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자연주의자의 삶을 동경하여 낙향한 것이다. 그는 고향 고성에 거주하며 자연 속에서 책을 읽고 글 쓰기에 매진하여 한 해 1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하며 왕성한 필력을 보였다.

저서로는 <한국민속과 문학 연구>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 <한국신화와 무속연구> <한국문학형태론> <독서> <노년의 즐거움> <그대, 청춘> <공부> <행복> 등 본격 학술저서에서부터 대중인문교양서에 이르기까지 60여 권이 넘는다.

유족으로는 부인 정상옥(수필가) 여사와 아들 진엽(서울대 미학과 교수)·진황(현대고 교사)씨, 딸 소영(한국종합예술학교 교수)씨로 한평생 다복한 가정을 일구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5호실이고. 발인 미사는 25일 오전 9시 서강대 성당이다.

덧붙이는 글 |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이제는 채호석 교수가 쓴 <청소년을 위한 한국현대문학사>(두리미디어, 2009)에 새로운 시문학의 한 장르로 소개되어 있을 만큼 대중화되었다. 디카시는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날시)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순간 소통을 지향한다.



#디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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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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