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산책

이중섭거주지 방에 있는 이중섭 사진 액자
 이중섭거주지 방에 있는 이중섭 사진 액자
ⓒ 박도

관련사진보기

제주 도착 사흘째 날(2013. 9. 16)이다. 아내와 함께 이른 아침 바다로 나가 산책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수협 어판장을 둘러보자 제주 아낙네들이 밤새 잡은 생선들을 쌓아두고 종류별로 선별하고 있었다. 고등어와 갈치가 가장 많았다. 숙소가 바닷가라 간밤에 보니까 제주 온 근해는 고기잡이배들이 집어등을 켠 탓으로 밤새 불야성을 이루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들의 생활도 점차 팍팍해진다는데, 불빛을 좋아하는 갈치· 오징어 등, 바닷고기들도 이즈음은 살기가 매우 힘들 것 같다. 이러다가 문명이 오히려 지구의 대재앙으로 변질될까 두렵다. 하긴 이웃나라 일본은 방사능 공포로 전 일본인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내외는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간단히 요기를 한 뒤 구체적인 일정을 세우기로 했다. 아내는 숙소 데스크에서 관광안내 책자를 얻어와 나에게 갈 곳을 정하라고 했다. 그날 오전 시간은 우리 부부만의 시간으로 마땅한 한두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나는 제주관광안내지도를 보면서 즐거운 선택의 고민에 빠졌는데, 이번 제주여행이 3차라 웬만한 곳은 그동안 다 둘러본 곳이었다. 그 가운데 지난날 서귀포 앞바다를 본 잔상이 아름답게 남아 그 일대를 살피는 중 '이중섭미술관'이 눈에 띄었다.

내가 그곳을 말하자 아내도 좋다고 공감하여 곧 숙소 체크아웃을 한 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서귀포 행 버스에 올랐다. 곧 서귀포 행 시외버스는 제주 섬 한가운뎃길을 관통하기에 제주의 속살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 길은 이전에 두어 차례 지난 적이 있기에 다소 눈에도 익었다.

제주 서귀포 시 이중섭거리의 '울부짖는 소' 모형
 제주 서귀포 시 이중섭거리의 '울부짖는 소' 모형
ⓒ 박도

관련사진보기


오산학교

이중섭 모교 오산학교 교지 다섯메 11호(1973년)의 표지에 담긴 이중섭의 '바닷가 아이들' .
 이중섭 모교 오산학교 교지 다섯메 11호(1973년)의 표지에 담긴 이중섭의 '바닷가 아이들' .
ⓒ 오산학교

관련사진보기

내가 천재화가 이중섭을 더 잘 알게 된 것은 1971년 3월, 오산중학교 교사로 부임한 뒤였다. 그때 나는 군에서 제대 후 경기도의 한 시골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서울 학교로 가고자 두 곳에 이력서를 냈다. 두 학교 모두 공개시험으로 채용한다고 하여 두 곳에 응시했더니 아주 운이 좋게도 두 곳 다 합격했다.

그때 나는 오산중학교와 또 다른 시내 한 여고 두 학교를 두고, 즐거운 고민 끝에 오산학교로 결정했다. 그 까닭은 시험장에서 본 교조 남강 이승훈의 유훈 "내 유해는 땅에 묻지 말고, 생리표본을 만들어 학생들을 위하여 쓰게 하라"는 말씀과 민족 시인 김소월이 다녔던 평북 정주의 다섯메 오산학교 명맥을 잇는 서울에 재건된 학교란 말 때문이었다.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는 김소월, 김억, 함석헌, 한경직, 주기철, 조만식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오산출신들은 당신네 모교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나는 부임 첫해부터 문예반 지도교사로, 학교신문과 교지발간 지도교사를 담당했다. 부임 이듬해 오산중고등학교 교지 '다섯메' 11집 발간에 표지를 당시 오산고등학교 미술교사인 김창복 선생에 부탁드리자 김 선생은 흔쾌히 당신이 비장한 이중섭 은박지 '바닷가의 아이들'로 표지를 장정해 주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김 선생이 재산목록 제1호로 여기는 이중섭의 은화지 원본을 볼 수 있었고, 그 그림에 대한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창복 선생은 이중섭 선생이 가장 아꼈던 오산 후배 미술학도였기에 그는 이중섭의 전 생애를 샅샅이 관통하고 있었다.

그 뒤 시인 고은 선생의 이중섭 평전 '그 예술과 생애 이중섭'을 통하여 천재화가의 불우했던 생애를 엿볼 수 있었다.

제주 서귀포시 정방동에 있는 이중섭거주지
 제주 서귀포시 정방동에 있는 이중섭거주지
ⓒ 박도

관련사진보기


'울부짖는 소'

버스 차창 밖의 이국적인 제주 풍물과 이중섭을 연상하는 새, 시외버스는 어느 새 서귀포 시 중앙로터리에 내려주었다. 초행길에는 택시를 타는 게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에 차에 오르자 5분도 안 돼 이중섭거리로, 그의 '울부짖는 소' 그림 모형이 반겨 맞았다. 거기서 비탈길을 조금 내려가자 '이중섭거주지'가 나왔다.

이중섭거주지
화가 이중섭과 가족이 거주하던 곳. 여기는 화가 이중섭이 아내 이남덕[李南德; 일본명 山本方子 야마모토 마사코], 장남 태현, 차남 태성과 함께 1951년 1월부터 그해 12월까지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던 곳입니다.
방 : 4.70㎡[1. 4평]
부엌 : 6.39㎡[1. 9평]

이중섭 네 가족이 살았던 방(1. 4평)
 이중섭 네 가족이 살았던 방(1. 4평)
ⓒ 박도

관련사진보기

이중섭 가족의 부엌(작은 솥들이 앙증맞게 걸려 있다.).
 이중섭 가족의 부엌(작은 솥들이 앙증맞게 걸려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이중섭거주지는 억새와 새로 엮은 일자형 제주전통 초가집이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일컬어지는 대향 이중섭 화가 가족이 피난을 와서 거주하였던 이곳은, 이 마을 반장 송태주와 김순복 부부가 방을 내주어 생활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중섭 가족은 1.4평 정도의 작은방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찬 없이 밥을 먹고, 고구마나 깅이(게)를 삶아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지만, 웃으면서 살 수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초상화를 그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이곳에서 이웃 주민과 집주인을 위해 마당에 쌓아놓은 땔감 위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하며 1년여를 이곳에서 생활하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작품 활동에 몰두하며 (일본으로 떠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가 1956년 9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타계하였다.

그가 살았던 좁은 방에는 그의 사진과 벽에는 그의 유시 '소의 말'이 붙어있었다.

소의 말

              이중섭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이중섭산책로에 있는 그의 동상 곁에 필자가 슬며시 앉다.
 이중섭산책로에 있는 그의 동상 곁에 필자가 슬며시 앉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그가 살던 집과 살았던 방과 부엌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자 그의 산책길이 나왔다. 그 길 돌덩이에는 이중섭이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보았다. 산책로를 돌아 이중섭 미술관에 이르자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말처럼 그날이 월요일로 휴관 날이었다. 이중섭미술관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나는 이전에 이중섭의 화집과 이중섭 유작전시회를 관람한 적이 있기에 이중섭거리에 나붙은 작가의 모형그림으로 갈증을 풀며, 이중섭거리 구석구석을 맴돌았다.

이중섭거리 풍경
 이중섭거리 풍경
ⓒ 박도

관련사진보기


행복한 예술가란 없다

후일 고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에게 (제주 서귀포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게'였다. 그는 서귀포로 와서 처음으로 그의 예술을 통해서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소재로 '게'를 발견한 일이 그의 제주 생활에서 가장 큰 수확이다.  - 고은 지음 민음사 간 '그 예술과 생애 이중섭' 140~141쪽

그는 이곳에 살며 큰아들 태현을 데리고 서귀포 앞 바닷가로 갔다. 거기에서 돌멩이를 들춰내면 작은 게들이 있었다. 이중섭은 그것을 재빠르게 잡아 깡통이나 항아리에 담아왔다. 그 게는 그들 가족들의 주린 배를 채웠고, 때로는 중섭이 화폭에 담는 그림의 소재였다.

우리는 이중섭거주지와 거리에서 한 시간 남짓 머문 뒤 다시 제주로 돌아오고자 갈 때와 역순으로 택시를 탔다. 그는 서귀포시 중앙로터리에 우리 내외를 내려주면서 한라산과 하늘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손님, 제가 제주에서 평생 살았지만 오늘처럼 하늘이 구름 한 점 없고, 한라산이 맑게 보인 날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 기사의 말에 배낭에 챙겨 넣었던 카메라를 꺼내 중앙로터리 건널목에서 연신 셔터를 눌렀다.

예술가에게는 그의 예술이 남겨져서 누리게 되는 예술적 명예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예술 이상의 비극을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될, 여느 사람으로서는 해득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그러므로 행복한 예술가란 없는 것이다. … 그러나 예술가는 그가 받아들이는 비극을 어느만큼 관련시키느냐에 의해서 예술가와 예술적 치정(癡情)이 나뉜다. 
- 고은 지음 민음사 간 '그 예술과 생애 이중섭' 서(序) 1쪽

서귀포시 중앙로터리에서 바라 본 한라산
 서귀포시 중앙로터리에서 바라 본 한라산
ⓒ 박도

관련사진보기




태그:#이중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