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좌파가 뭐란 말인가? 그것은 리영희 선생의 말처럼 과연 사회를 지탱하는 한쪽의 날개인가? 아니면, 각자의 인간이 취하는 하나의 선택 가능한 삶의 가치인가? 야만의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선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어주어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정치적 태도인가? 그래서 난 묻기로 했다.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이 아니라 수십 명의 내 주변에 존재하는, 일상의 공간에서 발견되는 좌파들에게. 대체 좌파란, 당신들에게 좌파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인가? 더불어 10년째 발 딛고 있는 이 파리라는 공간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이 가진 필터를 빌려, 이들이 전망하는 미래와 이들이 들이마시는 오늘, 아파하거나 그리워하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호흡하고 싶은 소심한 야심도 있음을 숨기지 않겠다. - 기자 말
자크 제르베르(Jacques Gerbert)는 칸영화제의 커미셔너로 한국을 자주 드나들었던 영화인이며 동시에, 갈리마르출판사 소속 작가이기도 하다. 필자가 바스티유 구역에 살던 시절, 그는 가까운 이웃이었다. 파리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가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인 바스티유 광장(place de la Bastille : 1789년 혁명의 시발점이던 바스티유 감옥이 있던 곳) 옆에 살던 시절에는 집회가 열릴 때마다 대로변에서 얼굴을 마주쳤고, 집회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1년 전 필자가 다른 동네로 이사한 뒤로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지난주(11월 2~3일) 열린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재불 한인'들의 파리 집회 현장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며칠 뒤 그가 본 집회에 대한 소회도 들어볼 겸,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인터뷰 도중 나오는 노란 글씨는 필자의 말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의 만남, 인생을 바꾸다 - '민주주의 파괴를 규탄하는 재불 한인'들이 주최한 집회에서 만나서 뜻밖이었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나? "당신 말고도 내게는 한국인 친구가 많다.(웃음) 평소 알고 지내는 젊은 한국인 커플이 집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같이 갔던 거다."
- 지난 한국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알겠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정보기관이 선거에 대대적으로 개입한 일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면, 당연히 재선거라는 수순으로 갔을 것이다. 사실, 2주 전쯤 한국 대통령의 방불 사실을 알았다. 이 방문의 성격을 알아보고 싶어 주불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들렀다. 그런데 대통령 방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더라. 대사관 입장에서 대통령 방문보다 더 큰 행사가 또 있겠는가. 그리고 한국은 얼마나 인터넷 활용이 발달한 나라인가. 그런데도 아무런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건, 업무 태만이라기보다 은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부러 인터넷을 검색해 한국 대통령에 대해 알아봤다. <피가로> 지의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박근혜란 사람의 세계 인식은 냉전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느꼈다. 프랑스와 한국 간의 우호관계를 말하면서 60여년 전 한국전쟁 때 프랑스의 참전을 언급한다는 것은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볼 때 어이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짐작하건대 한국 대통령의 방불 사실을 아는 프랑스인은 거의 없을 거다. 집회에 들렀다가 미리 초대를 받은 파티에 갔다. 집회에서 받은 전단을 든 채였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아무도 한국 대통령의 방불 사실을 몰랐다. 그들이 예외적인 경우는 아닐 것이다."
- 본격적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해보자. 어린 시절 시몬 드 보부아르의 무르팍에 오줌을 쌌다던 얘기를 기억한다. "그 얘기를 하자면, 나의 외할아버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외할아버지는 1920년 프랑스 공산당 창당 멤버였고 동시에 아나키스트였다. 그가 죽었을 때 무덤 앞에는 붉은 깃발이, 뒤에는 검은 깃발이 나부꼈을 정도다. 그렇지만 인텔리 계층과는 거리가 먼 소박한 계층의 사람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었고, 이후 정부가 참전 부상자들에게 제공한 직장 중 재경부의 말단 사무직으로 일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는 격변의 시기, 재건의 시기였다. 여성들은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처럼 재경부의 말단 사무직으로 일했다. 어머니는 내가 세 살이던 해에 이혼한 뒤로 평생 혼자서 나를 키웠다. 어머니는 모든 여자들에게 "여자에게 일은 자유와 독립을 보장하는 기본 조건"임을 강조해 말했다. 어머니가 정치적으로 좀 더 견고해지기 시작한 건, 1961년 알제리 반전 시위가 열릴 무렵부터였다. 프랑스의 진보적 정신들이 집결하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집회에 참석했다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당시 노조와 정당들은 정치·사회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시민학교의 역할을 했다. 특히 레지스탕스 정신을 그대로 계승했던 프랑스 공산당은 해방 직후 프랑스의 시민정신을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노조에도 가입했고, 계급·인종주의·여성해방 등 우리를 구속해왔던 무수한 문제들에 대한 구조적인 해답을 찾아나갔다. 새로운 정신들이 왕성하게 만들어지던 그 시대의 혜택을 어머니도 입었던 거다(안타깝게도 지금 프랑스 정당들은 더 이상 시민학교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한편, 어머니는 혼자서 나를 키우면서 고독을 일상적으로 안고 살았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종종 카페에 갔다. 당시 카페는 프랑스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카페에서 서로 만나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사회의식을 키웠고, 새로운 예술사조를 만들기도 했다. 흔히 실존주의 철학은 카페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카페를 다니셨다. 거기서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났다. 둘은 종종 대화를 나누었고, 어머니가 바쁠 때면 보부아르가 나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부아르의 집을 방문했는데, 내가 그만 그녀의 무르팍에 오줌을 싸는 불상사가 벌어진 거다."
- 보부아르와의 만남이 어머니에게 남긴 영향은 어떤 것이었나? "하루는 보부아르가 어머니에게 <제2의 성>을 선물했다. 그 책 이후로 어머니의 삶은 완전히 격변했다. 어머니는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책에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작은 노트에 기록하기도 했다. 이때의 독서 경험으로 어머니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품었다. 보부아르에게 직접 쓴 글을 보여주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어머니에게 여자의 삶을 둘러싼 세상을 분석할 도구를 선사했고, 어머니의 세상은 월등히 견고해졌으나, 두 사람은 당시의 우정을 평생 이어가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둘은 서서히 멀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근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했고, 보부아르는 철두철미 부르주아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지만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의 장벽이 있었다."
-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공산당원이었나?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는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고수했다. 그게 어렵지 않았던 게, 어머니는 은퇴 후에는 바뇨(Bagneux : 파리 남쪽의 외곽 도시)에서 살았는데, 전통적으로 공산당이 집권했던 도시다. 파리 근교에 그런 도시가 많았다. 그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공유하는 코뮤니즘 정신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런 갈등도 고민도 없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죽는 날까지 지킬 수 있었다."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자본가들에게 뺏기지 마라 - 당신은 그런 어머니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나. "꼭 그렇진 않다. 홀로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의 아들로 산다는 건, 끊임없이 뻗어오는 어머니의 영향력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일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LCR(혁명적공산당동맹)이라고 하는 트로츠키 정당에 가입했다. 급진적인 좌파 정당이었다. 당시는 어머니를 배반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물론 어머니는 나의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3년 뒤 나는 LCR을 탈당했다. 지금도 극좌 정당에 부르주아 엘리트들이 더 많듯이, 당시 LCR도 그러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와는 다른 문화와 언어를 구사하는 부르주아 집안 자녀들의 태도에 충격을 받았고, 그들과 섞이지 못했다. 그러한 계급 장벽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어머니는 나에게 '자본가들에게 좋은 것을 다 주지 마라. 우리가 그것을 가져야 한다. 세상의 아름다운 모든 것은 네 것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을 때 주저하지 말고 문을 열고 들어가라. 누가 '거긴 네 정원이 아니다'라고 말하거든 이렇게 대답해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모두의 것이다'라고 늘 말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내가 한때 캐딜락을 타고 다니거나 혹은 비싼 슈트를 사 입을 때면 어머니는 계급을 배반했다며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특히 내가 에콜 노르말 수페리에르(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는 '그곳은 부르주아들의 학교다. 네 자리가 아니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어머니는 정치교육을 통해 자신 앞에 가로놓인 장벽을 뛰어넘으려 했으나, 시시때때로 그 장벽을 내 앞으로 가져다놓는 모순 속에 살았다. 어머니가 걸려 넘어지곤 했던 그 장벽은 물질적 측면에서보다 문화적 측면에서 더욱 완강한 장애로 작용했다. 부르주아들이 갖는 것을 나는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영원히 그것에서 소외될 것이라는 열등감. 피에르 부르디외가 통감했고 그래서 이론화했던, 바로 그 문화적 구별 짓기의 장벽을 어머니는 결코 넘어서지 못했다."
- 당신에게 68혁명은 어떤 의미인가.
"열일곱 살이던 고교 시절에 68혁명의 진통을 겪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그 대열에 참여했지만, 한편으론 관객이기도 했다. 68혁명의 거대한 소요 속에서도 대강당 무대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근사한 언어로 연설하는 것은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사실에 나는 주목했다. 한편으론 우파도 68혁명을 은근히 이용한다는 정황을 감지했다. 샤를 드골이라는 완고한 민족주의자의 통치하에서는 현대적인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게 용이하지 않았다. 이 모든 완고함을 갈아엎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의 전통을 모두 깨부수는 게 그들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거나, 미국에 전쟁 포기를 요구한 베트남전쟁 반대 투쟁에서의 승리, 68혁명의 거대한 물결은 나를 비롯한 당시 청년들에게 변혁의 주체라고 하는 자신감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갈 이상세계에 대한 배포를 안겨주었다. 그때 시를 쓰던 친구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될 것을, 영화판을 쫓아다니던 친구들은 자신이 위대한 영화감독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이미 그들은 남들이 알든 모르든 스스로를 위대한 존재라고 인식했다."
초등학생조차 장래희망으로 정규직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현실과 대조되는 이 대목에서 상상을 해보았다. 열일곱의 나이에 이미 위대한 시인이었던 저 무수한 랭보들을. - 그 후에 공산당원이 되어 활동한 건가?"그랬다. 그러다가 이상주의자였던 나의 정치적 믿음에 균열이 가는 계기가 있었다. 1971년 파리 코뮌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공산당은 동유럽의 공산당원들을 위한 파리 코뮌의 격전지 방문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동유럽 공산당은 오래 활동한 당원들에게 포상으로 파리 방문을 허락했고, 당시 대학생이던 나는 동유럽의 공산당원들을 가이드하는 역할을 맡았다. 바로 그때,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일들이 저편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마니아, 소련, 동독, 불가리아, 폴란드 등지에서 온 공산당원들은 하나같이 나이든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 파리 코뮌에는 관심도 없었다. 약속 장소에 모인 열 명에게 지하철 티켓을 나눠주고 한참 가다 보면, 뒤에 남는 사람들은 두 명 남짓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파리의 싸구려 가게에 가서 가족들에게 선물할 청바지나 티셔츠를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고, 나눠준 지하철 티켓을 팔아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마련하기에 급급했다.
물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100년 전 코뮌주의자들의 행적보다, 프랑스에 넘쳐나는 소비자본주의에 눈이 가는 게 당연했다. 낯선 것을 보기 위해 다른 세계를 찾는 법이니까.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대해 말할 때면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태도를 보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의심이 자라기 시작했다. 더욱 놀랐던 건, 그들 대부분에게서 어떤 견고한 정치의식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의 모두, 소비에 매혹된 인간이었다. 나는 동유럽의 공산주의는 실패한 실험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나는 모순 속에 소요하면서도 당을 떠나기보다, 의문을 품고 탐색하는 쪽을 택했다. 무엇이 그 늙은 공산주의자들을 질식시켰는지를."
코뮌의 격전지를 안내해주러 나선 젊은 프랑스의 공산주의자가 지하철 티켓을 나눠주자 그걸 팔러 사라져버린 늙은 동구권 공산주의자들. 그 상황에서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할 때, 나는 자크라는 사람이 그때부터 일찌감치 품고 있던 인간에 대한 관대함과 연민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프랑스 공산당이 더 이상 자기개혁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자각했던 1979년, 나는 당을 떠났다. 공산당은 심각하게 교조화되었고, 자기개혁에 실패하면서 급격히 퇴화해갔다. 그것은 이미 내가 동구 공산당원들에게서 보았던, 비대한 교조주의의 침침한 그림자였다. 모든 불가침의 권위를 누리는 자들은 모두를 질식시키고 만다. 자유를 호흡하지 못하는 세상은 질식사로 그 끝을 마감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철폐를 바란다면, 일어서라! 불복하라! - 탈당 이후의 삶은 전과 많이 달라졌나. 정치적 지향에도 변화가 있었나. "탈당 이후 나는 개인적인 공산주의자로 살기 시작했다. '코뮤니즘(communism)'은 공유재산을 뜻하는 라틴어 'commune'에서 따온 말로 공동소유, 나눔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가 가진 것들을 이웃과 나누기를 좋아하고 사유하는 것, 나 혼자만 갖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한때 일상적 실천보다 모순이 쌓이고 쌓여 폭발하는, 소위 혁명의 방식으로만 세상을 개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둘 다 필요하다.
정신, 즉 개개인이 각자의 일상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흔히 일상에서의 실천을 말하는 사람들과 혁명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려 한다. 반드시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한 가지는, 세상을 바꾸기 전에, 자기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 스스로를 변혁할 수 있을 때라야, 세상도 변혁할 수 있다.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이다지도 힘든 이유는, 개개인이 자신을 변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힘든 것이다. 16세기 모럴리스트 라 보에시(La Boétie)가 <자발적 복종에 관한 고찰>에서 한 말을 되새겨보자. "독재자가 그토록 커 보이는 것은 우리가 그의 무릎 아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어선다면, 더 이상 독재가 없을 것이다."
불복종은 어쩌면 가장 간단하게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다.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야말로, 우리가 빠져든 이 깊은 늪으로 우리를 인도한 주체들이다. "마르크스가 세상을 구조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도구를 우리에게 주었다면, 프로이트는 우리가 각자의 내면을 해방하기 위한 도구를 주었다고 본다. 이 둘이 제공한 도구를 통해, 우리는 집단과 개인이 덜 고통스럽고 덜 비굴하게 살 방법을 찾을 수 있다."
- 아들에게도 당신의 정치적 신념을 교육했나?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을 강요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아들을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새로운 방식의 사고가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전하려 했다. 아들에게 '부모의 뜻을 거스를 때, 너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매일매일 너는 부모의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구축한 네 모습을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들은 내 말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들은 사춘기 때 '이상한' 옷차림이나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종종 했고, 내가 그런 모습을 나무라면 '아빠가 부모의 맘에 안 들게 행동하라고 말했잖아요'라며 항변했다. 그때는 나도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의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한 아들을 사랑한다."
한국영화, 그 숨 막히는 잔혹함
- 당신은 평생 영화와 문학, 이 두 세계 속에서 살았다. 당신의 정치적 지향과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 있는가. 당신에게 이 둘은 세상을 변혁하는 도구인가, 아니면 단순한 흠모의 세계인가?
"영화와 문학은 나의 정치적 지향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십대 중반 무렵, 나는 문학과 정치 문제를 다루는 잡지를 탐독했다. 정확히 그 시절부터 '참여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했다. 요컨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와 <제르미날>을 쓴 에밀 졸라 둘 중 누가 더 혁명적인가, 라는 물음에 나는 프루스트라고 답했다. 프루스트는 부르주아적 감성을 다루지만 그의 문체는 혁명적이다. 졸라는 혁명과 사회변혁의 문제를 다루지만, 그의 문체는 지극히 전통적이다.
예술의 영역에서 혁명이란, 단지 주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주제보다는 형식에서 혁명성을 가져야 한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확장했고, 형식면에서 혁명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며 그 시기를 관통했다. 지금도 세상의 변혁에 기여하려는 작가, 예술가라면 형식적인 변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그런 점에서 장 뤽 고다르에 대한 나의 관심과 그와 나눈 우정은 각별하다. 고다르의 영화는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의 영화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가 찾아내는 해답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계속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앞으로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렇기에 고다르의 영화는 영원히 전위적이다."
- 한국영화 이야기를 좀 해보자. 당신이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을 칸영화제에 소개했다. 어떤 점이 좋았나. "오래전부터 한국에 대해 각별한 관심과 느낌을 갖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참석차 여섯 차례 한국을 다녀왔고, 한국인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영화제 일로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다녔는데, 한국에서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생경함, 이해할 수 없는 낯섦을 경험했다.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이 기이함, 독특함은 대체 어디서 비롯하는가. 이게 바로 내가 한국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박하사탕>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내가 한국사회에서 처음 느꼈던 생경함과 비슷했다. 영화에는 이창동이라는 한국 시네아티스트만의 시선이 있었고, 그의 배우들은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인간 유형을 보여주었다."
-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진화를 지켜봐온 관찰자로서, 한국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평을 하자면. "대부분의 한국영화에 흐르는 정서는 잔혹함이다. 그것은 살인 장면과는 무관하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그리고 <시>까지,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정서는 숨 막히는 잔혹함이다. 그것은 김기덕 감독의 몇몇 영화에서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봉준호 감독의 <마더>, 심지어는 더 거슬러 올라가 김기영 감독의 <화녀>에서도 일관되게 발견된다. 나는 이 영화들을 통해서, 한국사회가 거대한 억압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재벌이든 독재권력이든 유교든…. 그래서 한국영화를 통해 그 억압들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을."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가 얼마 전 개봉됐다. 보았나? "보지 않았고, 볼 생각도 없다. 내 관점에서 그 영화는 한국영화가 아닌, 완벽한 할리우드영화다. 수천만 불의 예산을 들여서 수억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이다. 한국감독이 만든 영화라고 해서 한국영화의 색깔이 날 리 만무하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지는 상품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수억 명에게 팔기 위해, 그들의 입맛을 고루 고려하여 제조되는 상품에 낯섦, 새로운 영화적 실험 따위가 스며들기는 불가능하다. 영화뿐 아니라 그림, 문학 같은 모든 예술 장르에서, 나는 전혀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나무 한 그루를 표현하는 예술가를 언제나 기다린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 감탄한 작품이 있다. 전수일 감독의 <핑크>다. 최근 몇 년간 본 한국영화 중 단연 최고였다."
나는 집회장에서 세상을 배웠다
- 당신은 좌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당신은 스스로 좌파라고 규정하는가.
"좌파란 시간을 더디게 흘러가게 하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파는 모든 삶을 속도에 대한 강박 속에 날려버린다. 시간을 갖고 삶을 음미하며, 소위 개발과 발전이라는 강박으로부터 삶을 되찾아오는 싸움을 한다. 좌파는 끊임없이 세상의 구조,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수에 맞서 소수를 대변하며 지속적으로 우리를 둘러싼 삶의 조건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일깨우고 탐구하는 사람들이다.
예술은 삶의 잉여물이거나 사치품이 아니라,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요소다. 그리고 예술가는 예술적 실험을 통해 다른 세상, 다른 관점이 가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사람들이다. 예술과 문화로 자신을 계속 일깨우고 자극하는 사람들도 좌파에 해당한다. 나는 분명 좌파다. 그러나 좌파라는 말이 너무 많은 배반을 겪은 지금(이를테면, 흔히 좌파로 불리는 프랑스 사회당은 실재로는 우파인 것처럼)은 좌/우파라는 정치적 노름을 떠난 제3의 지대에 머물고 싶기도 하다."
- 좌파로서 당신의 실천은 무엇인가.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참을 수 없고, 미학적으로는 놀라움의 연속인 세상을 살고 있다. 정치가 퇴보하고, 정당들이 더 이상 사회변혁을 위한 건강한 기능을 포기한 이 시대에 낙심하지만, 예술 그리고 삶 속에서 감동을 얻고 위로를 찾는다. 나는 끊임없이 놀람을 선사하는 그림과 책과 영화를 찾는다. 그것으로 나를 자극하고,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엿본다. 루브르박물관을 나설 때면 마치 집회에 참여했다가 귀가할 때처럼, 내가 한 뼘 움직였음을 느낀다.
나는 집회 현장에서 역동하는 세상을 배웠다. 나는 거의 모든 집회 현장을 방문한다. 열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알제리전쟁 반대 집회에 참가한 이후로 집회장은 내가 세상의 흐름을 간파하고, 감동을 얻는 장소다. 나에게 예술작품을 가까이하는 것과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목적이 같다. 그것이 나를 진정한 좌파로 존재하게 한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일상적으로 연민과 너그러움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한다. 나치나 인종 차별주의자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우리는 너그러울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따스함으로 품는 것, 그 또한 좌파의 주요 덕목이다."
자크 제르베르의 아름다움을 향한 예찬은 단지 예술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길에 서서 이야기를 하다가도 서쪽 하늘에 석양이 걸릴 때면 "저길 좀 봐. 정말 아름다워"라며 말을 끊기 일쑤다. 길을 같이 걷다가 건물 벽에 조각된 여신상을 보면서도, 그것을 벌써 삼백 번째 보는 것일지라도, "제발 저것 좀 보라고. 저 곡선의 아름다움을"이라고 말하며 감탄의 신음을 내뱉는다. 이제 예순을 살짝 넘긴 이 남자는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포착하느라 분주하다. 이 같은 열정은 파리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집회에 얼굴을 들이밀고, 권력의 거대한 힘에 저항하는 소수자들 속에서 한 뼘 더 성장하고 싶어 하는 그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언제나 첫사랑을 만난 듯 밝게 상기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싱그러운 농담을 건네려고 애쓰는 그를 보면, 곳간에 장작이 쌓여 있지 않아도, 지금 가진 초 하나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의 차가운 손을 녹이려고 애쓰는 사람 같다. 그가 집회장과 전시장, 영화관을 하나의 단상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그곳에 갔다 올 때면 자신이 한 뼘 움직였음을 느낀다고 말할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한 일상적 실천과 제도적 혁명을 양손에 쥐고 가는 그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유토피아는 결코 지옥의 끝에 문득 다가오지 않을 것이며, 더 많은 미소와 환희, 희열들이 일상에 쌓이고 쌓여, 어느새 옷처럼 우리에게 입혀지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