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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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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가 네 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이제 막 세상에 첫 발을 내딛은 셈이다. 아직은 천지분간을 못할 나이지만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갖기 위해서는 돈이라는 걸 주고 '사야 한다'는 걸 귀신같이 안다. 무엇인가를 '사는 행위'에서 아이는 성취감과 기쁨을 느끼는 것 같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는 다른 아이들이 가진 것을 보고 부쩍 더 '사 달라'는 요구가 많아졌다. 원하는 걸 가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깨우친 건 아닐까.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친척을 만나거나 손님들이 와도 대부분 아이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돈을 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은 너무나 일찍 돈이 만들어내는 쾌락과 소비 문화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생활주체'나 '노동주체'가 되기도 전에 '소비주체'로서 자기를 확립하고 있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는 배움을 '흥정'하고 청년이 되어서는 노동으로부터 '도피'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학교의 붕괴 현상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하면서 돈이 돈을 낳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 일찍부터 편입되어 버린 아이들이 교육마저도 '등가교환'식으로 사고하면서 배움이 실종되고 있다고 개탄한다.

아이들은 교육을 배움의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육서비스를 구매하는 사람으로서 교사를, 배움을 바라본다. 배움이 실종된 자본주의 교육시스템 속에서 배움을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등가교환하는 아이들'이 성장하면 어떻게 될까. 소비하는 인간, 경제적 인간로서의 '자립성'을 키울 것을 끊임없이 주입당해 온 아이들이 과연 자기 삶의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을까. 등가교환은 '무시간 모델'이다. 교환하는 그 순간만이 중요하다. 반면 배움이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저자는 "교육을 '고역과 성과', '화폐와 상품', '투자와 회수'라는 비즈니스 모델로 바라보는 한 교육은 반드시 무시간 모델로 밑그림을 그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소비주체는 시간 안에서 변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화폐를 투자해서 이와 등가의 상품을 손에 넣는 교환을 반복하는 한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형태는 변하지만 총액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등가교환 제도 안에서 살아가는, 변화하고 성숙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는 소비주체의 숙명"(p156)이라고 말한다.

무서운 양극화 사회에서 등가교환식 사고에 젖어든 아이들은 과연 리스크를 이겨낼 만한 성숙한 인간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을까. 저자의 결론을 단호하다. 아이들은 맞서는 대신, 분투하고 극복하는 대신 배움을 포기하고 노동에서 도피하는 계층하강의 '하류지향'을 선택할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양극화 사회의 역설'이라는 관점에서 이 현상을 해석한다. 계층하강을 선택한 아이들은 양극화 사회에서 당연하게도 '기회'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기회로부터 멀어질수록 노력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허상으로 변해간다. 점점 노력의 동기마저 사라져간다. 노력과 성과의 안정적인 관계의 붕괴. 저자는 양극화 리스크 사회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양극화는 '노력에 대한 보상을 받은 사람'과 '보상을 받지 못한 사람' 사이에 엄청난 계층 격차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p89)라고. 양극화 시대 '결과의 불평등'은 실상 '노력과 기회의 불평등'으로 인해 점점 더 격차를 벌리고 있다.

우치다 타츠루는 자율과 자립성 측면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기결정권' 개념도 비판한다. 시장에서 평등한 경제적 인간들의 세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라고 가르친다.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에서 개인은 점점 '고립'되어 간다. 고립된 개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힘으로 감당해 내야 하는데, 개인의 힘으로 양극화의 비극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고립'과 '자립'의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면서 "리스크 사회는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라며 "리스크 사회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결정 여부에 상관없이 결과에 따른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상부상조 집단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로 바꿔 물어야 한다"(p108)는 것이다.

진보주의 교육관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자기결정권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교육은 '자기결정권'과 더불어 사회적 관계 맺음과 공동체성 획득도 중요한 내용으로 다루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학교는 오히려 공동체적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학습하고 수용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함께'만이 자기 삶의 진정한 주체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학교일 것이다.

자, 이제 자꾸 뭘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를 어떻게 할까. 아이를 노동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인간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부모인 나부터 돈이 주는 익숙한 편리함과 어느 정도 선을 긋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진짜 교육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읽을수록 무거운 고민들을 하게 되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우치다 타츠루 저/김경옥 역 | 민들레 | 2013년 07월

이 서평은 제 블로그 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게재했습니다.



하류지향 - 배움을 흥정하는 아이들, 일에서 도피하는 청년들 성장 거부 세대에 대한 사회학적 통찰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경옥 옮김, 민들레(2013)


#교육#하류지향#양극화#학교#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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