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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과 유언으로 이어지는 까르마빠의 존재

비가 멈추자, 16대 까르마빠의 유골이 안치된 황금사리탑(Golden stupa)으로 갔다. 룸텍사원 메인 법당 옆으로 작은 문을 통해 화살표를 따라가니 까르마 스리 날란드 불교연구소(Karma Shri Naland of Buddhist Infinitude)로 가는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연구 맞은편에 작은 홀이 나왔다. 말로만 듣던 까르마빠의 황금사리탑이다.

 룸텍 사원 황금사림탑으로 가는 길
 룸텍 사원 황금사림탑으로 가는 길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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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대 까르마빠 사리가 안치된 황금사리탑 건물
 16대 까르마빠 사리가 안치된 황금사리탑 건물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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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안으로 들어가니 황금으로 된 사리탑이 홀 전면 중앙에 안치되어 있다. 그 안에 16대 까르마빠의 유골과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경비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언가 신성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예언과 환생에 의해서 태어나는 까르마빠의 존재는 어떤 것일까?

까르마빠는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들의 깨달음을 행하는 존재로 알려졌다. 그 환생의 계보는 12세기 티베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까르마빠는 환생라마를 인정하는 전통의 기원이 이루어졌다.

많은 옛 기록들이 까르마빠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 까르마 까규 계파의 사마디라자 수트라(삼매왕경)에는 다음과 같은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

"홍안의 나라에 가르침이 내릴 것이니/관세음보살을 따르리라/사자의 포효보살/까르마빠로 나타난다/그는 선정으로 이들을 다스릴 테니/그를 보고 듣고 만지고 기억하는 자는 환희에 이를 것이다."

한편, 랑카 수트라(능가경)에는 다음과 같은 예언이 전해지고 있다.

"승복을 입고 검은 왕관을 쓴/그는 모든 중생들을 끊임없이 이롭게 하리니/일천 부처의 가르침이 지속되는 한". 

또한 문수보살 원전 탄트라에서도 까르마빠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이름이 '까'로 시작하고 '마'로 끝나는/고귀한 자가 가르침을 밝히리라" 그 외에도 까르마빠의 출현에 대한 많은 예언들이 전해지고 있다.

다른 티베트의 환생 라마들과는 달리 까르마빠는 점이나 신탁의 예언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특별한 공덕을 쌓은 덕분에 거의 모든 환생 까르마빠들은 '유언장의 숨겨진 말씀'을 남기는 전통을 지속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내다보는 까르마빠의 지혜를 통해 유언장에는 다음 까르마바의 가족 이름, 장소, 12간지에 의한 그 해의 동물,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징표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16대 까르마빠 랑중 릭뻬 도르제
 16대 까르마빠 랑중 릭뻬 도르제
ⓒ 룸텍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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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통에 의해 제15대 까르마빠 카캽 도르제는 다음 까르마빠인 랑중 릭빼 도르제에 대한 문서를 가까운 제자에게 남겼다.  마지막 노래 '귀에 장식하는 갈대꽃'이라는 문서는 때가 올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 이 문서에 따라 16대 까르마빠인 랑중 릭뻬 도르제를 찾아내고 달라이 라마 성하의 인정을 받았다.

까르마빠를 확인하는 밥법은 수세기에 걸쳐 내려오고 있다. 테르텐 촉규르 링바(1829-1870)는 위대한 스승이자 예언자였는데, 그는 계속해서 태어날 까르마빠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텍촉(수승한 수레, 4대 까르마빠)이 열반에 든 후 그 이름들은, 데웨 닥니(환희 바로 그것, 15대 까르마빠), 릭빼 도르제(깨달음의 금강, 16대 까르마바), 오겐 틴레(깨달은 행위의 구루 린포체, 17대 까르마빠), 삼텐(고요한 선정, 18대 까르마빠) 등 그는 19세기 티베트에서 종파초월 운동에 참여하며 그루 린포체의 제자로서 환생할 까르마빠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

룸텍사운을 재건하고 이곳에 묻힌 16대 까르마빠 랑중 릭빼 도르제(1924-1981)는 동부 티베트 데게 지방 덴코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환경은 15대 까르마빠가 예언한 새로운 환생에 관한 유언장과 딱 들어맞았다.

여덟 살에 츄르프에서 흑모와 까르마빠 법복을 승계받고 대관식을 치른 그는 1941년부터 1944년 사이에 많은 시간을 츄르프 사원에서 안거하며 사원을 확장에 힘썼다. 1954년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는 시킴과 인도를 방문하였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시킴 국왕 초걀 따시 남걀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시킴 국왕은 그를 룸텍으로 초대하였다.

16대 까르마빠는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할 것과 불교에 대한 탄압을 미리 예견하였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에게 1959년 봄 고국을 떠나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그의 일행은 3주 동안 히말라야를 넘어 부탄으로 피신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킴 국왕이 그를 시킴으로 공식 초청했고, 두 달 후 일행은 시킴 갱톡에 도착했다. 그리고 룸텍으로 돌아가 폐허에 가까운 룸텍사원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 4년간 룸텍사원 건설 끝에 1966년 츄르프에서 가져온 성스러운 유물들을 안치하고 티베트 새해 설날에 16대 까르마빠가 거처로 공식취임을 했다.

 16대 까르마빠가 심혈을 기우려 재건한 시킴 룸텍사원
 16대 까르마빠가 심혈을 기우려 재건한 시킴 룸텍사원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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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세계 순방에 나선 그는 미국과 캐나다, 유럽을 방문하여 흑모 의식을 거행하고 관정을 주었으면 불법을 가르쳤다. 로마로 가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만나기도 했다. 1980년 마지막 여행에서는 그리스, 영국, 미국, 그리고 서남아시 등을 방문하여 설법과 흑모의식, 관정, 인터뷰, 강연 등으로 보살행을 베풀었다.

그는 1981년 11월 5일 미국 일리노이 주 시온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해 12월 20일 그는 시킴 룸텍사원으로 공수되어 다비식을 치렀는데, 다비를 한 재에 그의 발자국 두 개가 티베트를 향하여 찍혀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그가 어디에서 환생할 것인가를 밝힌 유언장을 부적으로 포장하여 사랑하는 제자 시투 린포체에게 주었다. 10년이 지난 후 그 부적을 열어보니 '철의 말해에 열어보라'고 쓰인 봉투가 있었다. 1992년 3월 19일, 유언장을 열고 까규 종파의 주요 뚤구인 시투 린포체, 잠곤 공들 린포체, 걀찹 린포체 그리고 사마르 린포체가 참석한 가운데 유언장을 해석하고 어떻게 그의 환생을 찾아낼 것인가를 의논했다.

이 유언장에는 17대 까르마빠가 황소의 해, 동부 티베트 라톡지방아버지 돈둡 따시와 어머니 로가 사이에 태어난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 유언장에 의해 1992년 5월 동티베트 라톡에서 17대 가르마빠가 될 양시를 찾아냈다. 1992년 츄르프로 온 양시는 그 해 9월 27일 7세의 어린 나이에 17대 가르마빠로 취임하는 대관식을 치렀다.

17대 까르마빠 룸텍사원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직 룸텍 사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17대 까르마빠 오겐 틴레 도르제
 아직 룸텍 사원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17대 까르마빠 오겐 틴레 도르제
ⓒ http://kagyuoffic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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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는 처음에는 17대 까르마빠인 오겐 틴레 도르지를 지지했다. 당시 14세였던 오겐을 잘 키워서 중국의 꼭두각시 티베트 총독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겐은 지난 2000년 1월 초, 티베트에서 도망을 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에 피신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는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1999년 12월 28일 밤 10시 30분, 가장 추운 날씨에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츄르프 사원을 출발하여 중국 공안당국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육로로 히말라야를 넘었다. 시가체, 라체를 통과하여 창포강을 건넜다. 쵱야에서 중국 국경을 넘어 네팔 코레라고 건너간 일행은 추위에 고산병으로 사투를 벌였으며 뉼라(5400m) 토롱라 고개(5415m)를 넘어 헬기를 타고 새천년이 시작되는 1월 2일 네팔 나가르코트에 도착했다.

그 길로 네팔 바하르 간지에서 인도국경을 넘어 기차와 지프를 타고 2000년 1월 5일 인도 다람살라에 도착하여 극적으로 14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둘은 티베트의 전통대로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달라이 라마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 소년 승려에게 사랑과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젊은 스님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신념에 찬 모습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은 신심으로 가득차고 만다. 그는 달라이 라마와의 특별한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달라이 라마 성하가 계신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다람살라까지 왔다. 그에 대한 나의 믿음과 신뢰는 오래된 것이다. 처음 뵐 때 나의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실로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기자는 지난 2005년 17대 까르마빠가 탈출했던 길을 육로로 여행한 적이 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인지는 가 본 자만이 안다. 더구나 중국 공안 당국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눈 덮인 가파른 절벽을 타고 넘어야 하는 14세의 어린 소년승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7대 까르마빠가 탈출에 성공했단 소식을 들은 룸텍사원은 놀라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찼다. 탈출 소식을 듣고 그날 법회에 참석했던 스님들과 신도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환영했다. 그들은 곧 오겐을 룸텍 까르마빠 자리에 앉힐 준비를 시작했지만, 인도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뜨거운 감자'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인도가 시킴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데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국의 비위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룸텍 사원 밖 길가에 늘어선 룽다
 룸텍 사원 밖 길가에 늘어선 룽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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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많은 인도인들은 오겐을 중국의 스파이로 의심을 했다. 따라서 오겐은 2002년까지 난민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고, 룸텍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 후 인도전역에서 '까르마빠를 룸텍으로, Karmapa to Rumtek' 운동이 크게 지지를 얻으면서 한때 오겐이 룸텍에서 까르마빠 자리에 취임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낳기도 했지만, 인도 정부는 여전히 중국의 눈치를 보며 허락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현재 다람살라 근처 규또 람체 탄트릭 대학(Gyuto Ramoche Tantric University)에 임시로 거처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까르마빠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자 인도 정부의 딜레마가 시작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까르마빠가 달라이 라마를 이을 티베트 망명 최고 지도자가 된다면 중국 정부에게도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티베트를 점령한 이후 자신들의 통치하에서 티베트가 번영을 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지만, 까르마빠가 티베트를 탈출하면서 중국의 선전이 허위였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 데다 까르마빠 역시 반 중국노선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검은 모자'가 있는 한 까르마빠는 돌아온다?

이곳 룸텍 사원에는 까규파의 법왕의 상징인 '검은 모자(Black Hat)'가 사원 깊숙이 봉안되어 있다. 16대 까르마빠가 인도 망명을 할 때에 츄르프 사원에서 모셔 온 것이다. 이 흑모는 까르마빠에게만 전수되는 까규파의 상징으로 아주 중요한 의식을 치를 때만 쓴다고 한다. 흑모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이 세상의 억겁 년 전에, 세 번째 부처인 수가타 다팜카라가 세상에 왔다. 이것보다도 수 억겁 전에, 메루 산의 서쪽에, 율코르 꽁(백성과 나라의 보호자) 왕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명상 속에 고요히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나중에 당쏭 꾄바께(고귀한 출생의 리시)라고 알려진 그는 일념의 선정 속에 80만 년을 고요히 앉아 있었다. 드디어 금강 삼매의 깨달음이 그에게 일어나자, 시방세계의 130만 디키니(수행을 돕는 여신)들이 모두 놀랐다. 이들은 한곳에 모여 각자 머리카락을 뽑아 고귀한 모자를 만들었고 해와 달로 꼭지를 치장했다.

그는 다음 생에 라 푸 디메 카르포(신의 흠이 없는 희 아들)로 태어났다. 그 후 까르마 데누, 그리고 인도의 브라민 사라하 등등으로 태어났다. 이 모든 환생들에서 지혜의 관이 머리에 씌어졌다. 그 이후 티베트에서는 영광의 첫 까르마빠, 뒤쑴 켄파와 그 후 까르마빠의 환생들을 통해 이 왕관은 본원적 지혜가 저절로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 머리 위에 나타난다고 한다. (Music in The Sky, 미쉘마틴 지음에서 인용)

이 지혜의 흑모가 이곳 룸텍사원에 보관되어 있다. 이 흑모는 까르마빠의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고도 하며, 천상에서 왔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천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도 한다. 시방시계 사람들은 17대 까르마빠가 하루속히 이곳 룸텍사원으로 돌아와 그가 흑모를 쓰기를 고대하고 있다.

나는 이 사원 어디엔가 봉안되어 있을 지혜의 흑모를 향하여 합장 배례하고 황금사리탑을 나왔다. 황금사리탑을 나와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아까부터 경전을 읽고 있었던 동자승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천진하기 이를 때 없었다. 나는 그 동자스님께 합장을 하고 황금사리탑을 내려왔다.

 MG광장 어느 카페에서 만난 시킴의 소녀들. 표정이 천사처럼 맑고 편안하다
 MG광장 어느 카페에서 만난 시킴의 소녀들. 표정이 천사처럼 맑고 편안하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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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에 도착하여 여권을 무사히 찾은 우리는 다시 지프를 타고 MG광장으로 향했다. 도중에 운전수는 한 소녀를 태웠다. 갱톡으로 가는 소녀인데 학생이라고 했다. 그 소녀의 표정 역시 너무나 편안하고 순진했다.

MG광장으로 돌아온 우리는 어느 카페로 들어가 커피와 케이크, 도넛을 시켜 놓고 휴식을 취했다. 카페에서 우리는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는 소녀들을 만났다. 그녀들은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듯 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 명의 티베트 지도자가 망명을 한 인도 땅, 이곳 히말라야 산간 시킴의 갱톡에서 소녀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 역시 티 없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아마 과거·현재·미래, 3세의 모든 부처들의 깨달음을 행하는 까르마빠의 주석 처인 룸텍사원을 다녀온 탓이리라. 이곳 시킴에 온 후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난 2012년 5월에 여행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성했습니다.



#룸텍 사원#시킴여행#16대 까르마빠#17대 가르마빠#흑모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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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여행, 작은 나눔,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 등 살맛나는 기사를 발굴해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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