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려앉은 앙상한 가지에 빨간 홍시가 매달려 있다. 겨우내 먹이를 찾는 까치는 하얀 눈 속에서 사람들이 남겨놓은 빨간 홍시를 찾아 양식 걱정을 덜어낸다. 옛 조상들로부터 내려온 나눔의 문화 '까치밥 홍시' 프로젝트가 오늘날 새로운 모습으로 그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까치밥 홍시는 유럽의 서스펜디드 커피 문화를 한국형으로 적용한 나눔 문화 운동이다. 커피 한 잔의 값을 미리 지불하면, 커피 한 잔을 마실 형편이 되지 못하는 이가 와서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 까치밥 홍시를 기획하고 운영해 나가고 있다.
광주 용봉동 전남대 후문에 위치한 카페 '스며들다'에는 홍시 모양의 메모가 주렁주렁 달려있다. 메모엔 저마다 남긴 음료 이름과 이야기가 적혀 있고 입구엔 '까치밥 홍시'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었다. 까치밥 홍시 가게에서는 나눔을 원하는 사람들이 홍시 모양의 메모에 기부내용을 적고 금액을 지불하면 적립된 홍시가 다른 사람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까치밥 홍시는 유럽의 서스펜디드 커피와는 조금 다른데, 기부라고 하기보다 나눔이라 하는 것이 맞겠다. 서스펜디드 커피가 노숙자들로 대상을 정해서 기부하는 것이라면 까치밥 홍시는 누가 홍시를 먹을 수 있는지 정해 놓지 않았다.
유럽의 서스펜디드 커피, 광주에서 '홍시'로 재탄생
까치밥 홍시가 주목을 받게 된 이유 중에는 대학생들이 주체가 돼 캠페인을 시작했다는 점도 있다. 대학생들이 기획한 이 소박한 캠페인에 현재 광주 지역 20여 곳의 가게가 참여하고 있다. 음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이외에도 안경집, 팥죽가게, 두부가게 등에도 홍시가 걸려 있다.
까치밥 홍시 코디네이터 박현은씨는 "따로 단체가 있었던 건 아니고 평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끼리 모이게 됐다"며 "공유 경제나 나눔 같은 것을 어떻게 하면 확장할 수 있을까 생각 끝에 까치밥 홍시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까치밥 홍시를 기획하기 전에, 모두가 읽을 수 있게 벤치 주변에 책을 두자는 '책 읽는 벤치' 캠페인을 벌였다. 까치밥 홍시는 책 읽는 벤치에서 발견한 나눔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캠페인이다.
"서스펜디드 커피를 우리 지역에서 하면 어떤 모습이 될까 궁금했어요. 서양인들이니까 저런 문화캠페인이 되겠지 또는 우리와 의식수준이 다르다는 관념을 극복해보자, 예로부터 나눔의 정이 깊은 우리 지역 광주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광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현은씨에게 광주는 가능성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한 곳이다. 까치밥 홍시는 1980년 5·18민중항쟁 때 주먹밥을 나누던 광주 시민의 따뜻한 정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박현은씨는 수도권 중심의 문화를 벗어나 지역에서도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 까치밥 홍시와 비슷한 캠페인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미리내 가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으면 좋겠어요. 거창한 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광주를 대표하는 새로운 나눔의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커피·안경·팥죽·두부... 시작 두 달 만에 20개 가게 참여
지난해 하반기부터 준비된 까치밥 홍시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운영된 것은 지난해 11월 말. 이제 두 달 정도 됐다. 짧은 기간이지만 참여 가게 수가 11개에서 20개가 됐고, 홍시가 100개나 걸린 가게도 생겨났다.
100개의 홍시를 달성한 카페 '디커피스토리'의 주 고객층은 직장인들이다. 디커피스토리에 달려 있는 홍시에는 환경미화원 아저씨께, 월요병으로 지친 직장인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홍시의 나눔이 카페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을 넘어서 모두에게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문화로 실현되고 있었다.
기부라고 하면 평범한 시민들에게 부담으로 느껴지기 쉽다. 또 내가 한 기부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잘 전달이 됐는지 궁금하지만 잘 알 수 없다는 게 기부를 지속적으로 하기 어려운 까닭이라고 꼽을 수 있다. 평범한 시민들이 해온 기부는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 불특정 다수일 경우가 많았고, 기부를 한다는 그 차제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까치밥 홍시는 기부문화의 한계를 넘어서 나눔이라는 새로운 코드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홍시는 한 사람이 나눈 따뜻한 차 한 잔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와 같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차가운 겨울을 녹이는 문화코드로 까치밥 홍시가 자리 잡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은향 기자는 오마이뉴스 1기 대학통신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