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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99년부터 국내외에 숨겨진 근현대사의 현장에서 묻힌 역사의 진실을 찾고자 발품을 팔았다. 중국대륙과 미주, 일본, 러시아 등 국외와 국내 항일의병지를 취재노트와 카메라를 메고 여러 차례 누빈 바 있었다. 그 역사 현장들은 거의 100년이 지난지라 대부분 그 원형이나 흔적을 찾기가 몹시 어려웠다. 여기에 '나만의 특종'이라는 제목으로 주로 역사 현장 답사 사진에 얽힌 뒷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다. -기자의 말

창춘의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 건물로 지금은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였다.
 창춘의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 건물로 지금은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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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많은 창춘(長春)

중국 창춘은 동북지방 지린성 성도(省都)다. 이 도시의 역사는 1800년 청나라가 창춘청(長春廳)을 설치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 도시 중앙부에 창춘 역을 건설함으로써 역 중심의 방사형 도시가 만들어졌다. 그 뒤 1932년 일본은 동북삼성에 괴뢰만주국을 세우면서 창춘을 그 수도로 정하고, '신경(新京)'으로 고쳤으나 1948년 중국이 해방된 후 다시 창춘이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창춘은 '봄의 도시'로 '춘성(春城)'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가로수와 공원이 많은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26개의 대학과 전통을 자랑하는 영화제작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 도시는 청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溥儀)가 만주국 황제로 등극했던 '위황궁(僞皇宮)'이 자리 잡고 있다. 이밖에도 일제 관동군사령부, 만주국군사부, 만주국문교부, 만주국민생부, 만주국사법부 등 숱한 일제강점기 건물들이 아직도 당시 그대로 남아 있어 일본의 대륙 침략의 역사를 보여주는 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나는 1999년 1차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에 이어, 2000년 2차 답사, 그리고 2009년 3차 답사 때에도 이곳을 들렀다. 내가 이처럼 이 창춘을 여러 번 찾은 까닭은 이 도시 곳곳에는 볼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푸이 만주국 황제궁 동덕전으로 지금은 '위황궁'이라는 이름으로 지린성 박물관 전시실이 되어 있었다.
 푸이 만주국 황제궁 동덕전으로 지금은 '위황궁'이라는 이름으로 지린성 박물관 전시실이 되어 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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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황궁(僞皇宮)

'위황궁(僞皇宮)'은 푸이 만주국 황제 궁으로, '거짓 · 가짜 황궁'을 뜻한다. 중국인들은 민족을 반역한 푸이 황제가 살았다고 그의 황궁을 그렇게 모욕적으로 부른다.

사람이 한 번 황제에 등극하는 것도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인데, 푸이는 세 번이나 황제에 올랐다. 그의 생애를 잘 모르는 사람은 푸이가 얼마나 '귀하신 몸'이냐고 우러러볼 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세 번의 재위 기간 동안 황제로 실권을 행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꼭두각시, 곧 괴뢰 황제에 지나지 않았다.

푸이는 마지막 만주국 황제로 재임 중이던 어느 날, 갑자기 산보를 하고 싶어서 황후 완용과 두 여동생을 데리고 그의 연호를 따서 이름 붙인 대동공원으로 갔다. 그날 그가 말없이 집정실을 벗어나자 집정실 관리는 곧장 일본 관동군헌병사령부에 알렸고, 헌병사령부에서는 즉각 대규모 병력을 출동시켜 성 전체를 시끌벅적 요란하게 푸이를 황궁으로 데려갔다.

이처럼 그는 자기 마음대로 산보조차 할 수 없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황궁에서 무위도식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가 만주국 황제로 허수아비 노릇으로 14년을 보내는 동안 500만 명의 동북 백성들은 일제에 의해 죽거나 다쳤으며, 주요 산물의 절반 이상을 약탈당했다.

이 위황궁은 글자 그대로 허수아비 황궁이었고, 사실상 모든 만주국 통치는 관동군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또한 관동군사령부는 만주 땅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던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고, 독립투사를 잡아 가둬 고문하고 살육했던, 그 모든 만행을 총지휘한 대륙 침략의 심장부였다.

위황궁 집회루, 황후 완용의 거실로 황제 부부가 아편을 즐기며 사치를 즐기는 동안 만주국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장쩌민 주석은 '勿忘九.一八'이라는 글을 돌에 새겨 놓았다.
 위황궁 집회루, 황후 완용의 거실로 황제 부부가 아편을 즐기며 사치를 즐기는 동안 만주국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장쩌민 주석은 '勿忘九.一八'이라는 글을 돌에 새겨 놓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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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동군사령부

제1차 중국대륙 항일유적지 답사 때인 1999년 8월 8일 아침, 나와 일행인 이항증(광복회경북지부장) 선생은 이 도시를 떠나면서 길안내를 맡은 김중생(일송 손자) 선생에게 관동군사령부와 만주 건국대학교, 만주군관학교를 부탁드렸다. 하지만 김 선생은 빡빡한 일정으로 세 곳은 도저히 다 둘러볼 수 없다고 하면서 가까운 일본 관동군사령부 한 곳만 안내했다. 

지금은 길림성 공산당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옛 관동군사령부를 보자 나는 순간 선입관 때문인지 온몸에 소름이 끼치고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당시 우리 선열들은 이곳을 바라보며 얼마나 치를 떨었을까? 길림성 장춘시 인민정부 청사 국기 게양대에는 지난날 일본의 욱일승천기 대신, 붉은 오성 중국기가 펄럭였다. 청사 정문에는 중국군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일본 관동군사령부 당시의 모습
 일본 관동군사령부 당시의 모습
ⓒ 지린성위황궁진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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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승용차에서 내려 중국군 경비병에게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사정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손을 가로 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그대로 놓칠 수 없었다. 너무 아쉬운 나머지 불법인줄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승용차에 오른 뒤 차창을 열어 문틈으로 카메라 앵글을 맞춘 다음 차를 천천히 달리게 하면서 얼른 셔터를 눌렀다.

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카메라 셔터소리를 듣고는 곧 쏜살처럼 그곳을 빠져 고속으로 달렸다. 다행히 경비병들이 뒤쫓아 오는 소동은 없었다. 앞자리의 김 선생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로 그들에게 붙들리면 간첩으로 오인 받아 신체 구금을 당하거나 벌금을 물어야 하고, 카메라나 필름도 압수당할 뿐 아니라, 여기저기 불려가다 보면 하루 이틀 답사 일정은 아예 망쳐버린다고, 나는 김 선생에게 앞으로 사진 촬영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단단히 주의를 받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때 나는 참 겁도 없이 셔터를 눌렸던 옛 일본 관동군사령부 건물 사진이다. 그때 내 카메라는 슬라이드 필름을 넣었기에 그 관동군사령부 건물이 제대로 찍혔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귀국 후 충무로 단골 DP점에서 인화한 즉시 그 장면을 확인하자 천만다행으로 또렷이 관동군사령부 건물이 필름에 담겨 있었다. 그때 그 기쁨은 얼마나 컸던지…. 아마도 사진기자는 이런 기쁨 때문에 위험도 감수하고 셔터를 누르나 보다.

특종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태그:#창춘 관동군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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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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